미리보기나비매듭 2권

“언니를 다시 불러주셔야겠습니다.”'정광명이 문영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반드시, 언니를 데려와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제 생각이 짧았음을 이제야 깨달은 모양. 초조한 소진은 소형의 기억을 되돌리길 원했다.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소형이었으니 그녀의 기억이 돌아오면 이번에야말로 해를 완벽히 떠나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시는 화근을 남기지 않겠다는 확실한 의지였지만, 그런 소진에게 정광명은 답하지 않았다. 이미 한 번, 소형의 기억을 지운 그로서는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그러나 왠지 모를 꺼림칙함을 느끼던 차였다. 미처 읽어내지 못한 뒤틀림이 있는 것이었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는 판. 그에 가장 쉬운 해결책은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그래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문영을 끌어들였다. '“이리 오시겠습니까.”'아무것도 모른 채 정운과 들어선 문영은 그를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정운을 한 번 바라보고는 마지못해 다가서는데, 그녀의 전생이 돌아온 것은 찰나였다. 그의 부름에 홀린 듯 다가와 그가 들고 있는 꽃신에 손을 댄 순간이었다. 정광명의 눈을 통해 900년 전을, 그리고 자신이 죽은 후를 본다. 짧고도 길었던 900년이 문영의 눈으로 쏟아져 들어가고, 그 순간 문영은 소형이 된다. 다른 사람은 그저 눈을 한 번 깜박했을 시간이지만, 이미 모든 의식은 끝나 있었다. 그녀에게는 900년을 지나는 아주 긴 시간이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순식간이었다.'“이제…… 된…… 건가요?”'조용한 의례 끝에 정운이 물었다. 이제 정말로 자신의 딸이 돌아오는 것인가 가슴을 쓸어내린다.'시키는 대로 해야 문영이 돌아올 것이라 하였다. 이리해야 예전의 문영으로 돌아온다 했다. 문영을 꼬여냄에 일조한 것은 그 때문이었지만, 정광명의 눈은 불안하게 흔들렸다.'“왜…….”'뭔가 잘못된 것이었다. 정운이 보아도 처음 전생을 자각할 때와는 다른 반응이다.'크게 뜨여진 눈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눈물로 일그러진 눈동자엔 한스런 빛이 가득하다. 붉게 떨리는 입술로 거친 숨소리만 뒤섞일 뿐,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너무 아파서,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서 문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소형아…….”''그의 목소리였다.''“소형아.”''끊임없이 주변을 떠돌던 흐느낌. 그것은 그녀에게 연심을 바치던 지아비의 눈물이었다.''“내 비를 모시러 왔어.”'“너무 늦었느냐. 늦게 왔다 화를 내는 것이냐.”''이제야 알았다. 창백한 얼굴로 말에서 내리던 사내가 자신의 지아비였음을. 죽어가는 그였음을.'“아아아아아아―――!”'그것을 깨달은 문영에게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목 언저리를 맴돌던 것이 터진다.''“죽이지 마. 제발……. 제발, 살려줘.”''그렇게 빌었는데. 그렇게 애원했는데. 남은 것은 죽어가는 지아비의 모습뿐.'“으아아아아아아아――――!”'바닥에 주저앉아 어쩔 줄을 몰라 비명을 지른다.'“흐아아아아아악―――――!”'하늘을 향해 쏘아 올릴 듯 날카로운 비명과 몸부림이지만, 아무도 그런 문영을 위로하지 못한다. ‘꺽꺽’ 가슴 꺾이게 오열하는 문영을 보며 정운도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모른다.'“문영아…….”'자신의 딸이 아닌, 그저 문영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보는 것 같다. 소형에게 느껴지는 섬뜩한 이질감과 이 상황을 정운은 감당해 낼 수 없다.'그렇게 바라만 보는 정운을 두고 작게 몸을 만 문영이 손을 뻗었다. 부들부들 떠는 손이 바닥 아래 꽃신을 움켜잡는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쏟으며 애틋이 바라보다 가슴에 끌어안는다.'지아비가 신겨준 신발이었다. 지아비가 품고 죽었던 꽃신이다.'“어떻게……. 어떻게.”'그 아픈 것을 품어 안고 흐느끼는 문영 앞에, 꿋꿋이 서 있던 정광명도 무릎을 굽혔다. 몸을 숙여 작은 어깨를 감싸는데 붉게 젖은 눈가가 바르르 떨린다.'다시 이어진 의식 속에 죽어가는 그녀의 사내가 보였다. 거짓 고함에 그녀를 죽이고, 그 때문에 미친 그가 있다. 소진의 거짓 뒤에 숨겨진 소형의 죽음을, 그 잔인한 사실을 정광명은 지금에야 확인한다. 그것이 아무도 알지 못한 비밀이었고 그도 보지 못한 진실이었다.'“……슴이…….”'“…….”'“가슴이…… 아파요.”'아프겠지. 많이 아프겠지. 그녀가 느끼는 아픔이 빼곡히 들어찬 정광명도 몸이 찢어질 듯 아팠다.'“너무…… 너무…….”'가슴을 틀어잡고 울면서도 한 손은 신을 놓지 않는다. 얼마나 애달피 우는지 쥐어짜듯 비틀린 앞섶이 소형의 가슴을 보는 것 같다. 그것이 정광명도 다르지 않아 그도 숨이 막힐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비명도 새어 나오지 못한다.'소형과 이어진 꽃신 때문이었다. 문영과 맞잡은 꽃신으로 문영이 본 과거가 그에게도 보였다. 그녀에게 잔인했던 혈육과 매정하게 버릴 수밖에 없었던 지아비. 그에 대한 원망과 자책이 그의 심장까지 비집고 들어와 버렸다. 쉼없이 울어대는 사내의 울음이 이젠 그에게도 들린다.'“왜죠? 아직도 그분의 울음소리가 들려요.”'다시는 기억하지 말아야 할 전생이었다. 모르는 것이 좋았을 과거다. 자신으로 인해 미쳐 간 지아비를, 목숨 걸고 지키려 했으나 끝내 지키지 못해 죽어간 지아비를 소형은 몰라야 했다.'“지금도 울고 계세요…….”'자신이 죽을 때보다 더 고통스러운 눈이다. 독물에 뼈와 살이 녹아날 때에도 이보다 아파하진 않았으리라.'“가야 해요. 계속…… 계속 저를 부르고 계세요.”'그것은 과거에서 이어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정말로 해가 소형을 찾는 소리였다. 문밖에서 소형을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다.'“그럼, 가셔야지요.”'정광명도 색이 바랜 비단신을 놓으며 말한다. 벌써 900년이나 기다려 온 그였으니. 몇 겁을 다시 태어나 그녀를 찾아 헤맨 그였으니. '“이번엔 마마께서 가시는 겁니다.”'그것을 문영은 서럽게 바라봤다. 그것을 안고 울던 사내 때문에 가슴이 아프다. 자신의 눈물이 떨어진 곳에 그가 흘린 눈물도 번졌으려니, 신을 더듬는 손끝이 시렸다.'“문영아.”'그저 문영을 위하는 일이라는 말에 정광명이 하는 짓을 보고만 있던 정운이 부르지만, 돌아보는 눈에는 조금의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봉신인 도하와 달리 집안의 흉계는 모르는 정운과 도명이었으나, 문영이 그들에게 느끼는 감정은 부모를 대하는 애틋함이 아닌, 이(李)가의 권속을 보는 원망이었다.'한꺼번에 빨려든 전생의 기억으로 문영은 조금도 남아 있질 않았다. 존재하는 것은 죽어가는 해의 모습과 작은 꽃신을 안고 흐느끼던 그의 처량한 뒷모습뿐, 문영이었을 때의 기억은 없다. 근심과 측은함으로 애타게 찾아야 할 상대도 도명과 정운이 아니라 저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고 있을 해다.'그런 해에게 가기 위해 소형은 그의 한숨같이 무거운 문을 연다. 정광명의 말처럼 이번엔 자신이 그를 찾기 위해 이 집안을 벗어난다.'그러나 문 앞에서 마주한 것은 초라하게 무너진 사내였다. 찾아 나설 것도 없이 소형 앞에는 힘없이 주저앉은 그가 있었다.'꿈에서 본 그대로. 그때도 사내는 이리 쓸쓸히 내려앉아 울었다. 이 모습으로 죽어갔다. 자신을 그리면서, 자신을 부르면서.'지금도 그때처럼 우는 거겠지. 작게 수그러진 얼굴 앞에 꽃신을 내민다.'‘나 여기 있어요. 내가 왔어요’ 그리 말하는 것이었지만 해는 소형을 보지 않는다. 눈앞의 것이 소형인 것처럼 귀하게 받아들 뿐, 올려다보지 못한다.'무서웠다. 자신을 외면할 소형이 두려워 쳐다볼 수가 없다.'“날…… 버릴 것이냐.”'잠시, 고개도 들지 못하고 꽃신만 움켜쥐고 웅얼거린다.'“또…… 버리는 건가.”'보이는 것은 꽃신 위로 떨어지는 눈물방울뿐이었지만, 보지 않아도 그의 얼굴을 알 수 있었다. 꿈속에서도 슬프게 울던 사내. 그 얼굴이 어찌나 애틋했는지. 얼마나 안아주고 싶었는지. 소형은 이제야 그 사내를 품에 안는다.'양팔 가득 품에 안은 머리가 떨고 있었다.'“잘못했습니다.”'참으로 잘못한 것이었다. 위하는 일이라며 버리려 했으니. 모르는 척 했으니.'“제가 잘못했습니다.”'그리 읊조리며 지그시 감은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자책하는 것이었으나, 그것을 모르는 해는 이것이 마지막이다 체념할 따름이다.'이렇게 보듬어준다고 믿을 것 같으냐. 온화한 품에 안기고도 그 온기를 믿지 못해 마음을 닫는다.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 더 큰 낙담에 상처받지 않는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버림받을 준비를 한다.'“이러고 또 버리겠지?”'사실은 버림받고 싶지 않아 아등바등, 어떻게든 붙잡고 싶어 안달이 났으면서 단념한 듯 내뱉는다.'“떠날 거잖아. 그렇지?”'그 무거운 물음에 소형이 고개를 저었다.'“약조하지 않았습니까. 다시 돌아오겠다, 신첩 약속하지 않았습니까.”'다행이었다.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소진에게 갚아야 할 빚이 남아 있지 않아 다행이었다.'이번에도 이 사람을 버려야 했다면……. 아니, 지금은 버리지 못한다. 그리 애처롭게 죽어간 지아비를 본 지금에는 버리지 못한다. 전생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 내세에 더 큰 벌을 받게 되더라도 가엾은 자신의 사내를 버리지 않는다.'“이제는 아무 데도 가지 않습니다. 전하 곁에 있습니다.”'자신을 버리지 말라며, 잠이 들면서도 손을 놓지 못하던 그가 생각나 흐느끼는 어깨를 더욱 힘주어 안는다.''“내가 잘못했다, 소형아. 나를 버리지 마라.”''그가 찾던 소형이었다. 그 이름이 슬펐던 것은 그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그것을 이젠 문영도 알지만, 해는 아직도 믿지 못한다. 소형이 자신을 떠날 것이다, 마음을 놓지 못한다. 외려 자신과 있겠다는 그녀가 진짜가 아닐 것이라 의심한다.'“정말로…… 소형인가?”'불쌍한 사람. 애틋한 마음이 끓어올라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네……. 소형이에요.”'조금 더 거센 포합에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나서야 해는 소형이 거짓이 아님을 믿는다.'“정말로 가지 않느냐?”'이제야 소형의 허리를 그러안으며 제 여인이 돌아왔음을 확인한다.'“이젠…… 나와 있는 건가?”'안긴 품의 나긋함만으로도 함께 있겠다는 그녀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흐느껴 우는 가슴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정말인가?”'어느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잊었다. 소형을 빼앗길 것이란 두려움도 사라졌다. 무엇이 소형을 돌려놓은 것인지 몰라도 좋았다. 지금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한다.'그러나 소형에게는 한시도 있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눈앞의 도하를 보는 순간 뜨겁던 몸이 차갑게 식는다. 말간 눈동자로 독기가 들어차며 다시는 너희들에게 죽게 하지 않는다, 원망 어린 눈으로 도하를 바라본다.'“더는 이곳에 있지 않겠습니다.”'그리 말하며 지아비를 세게 끌어안는 것은 그를 지키기 위함이었지만, 그제야 슬금슬금 늘어난 이(李)가의 봉신을 눈치 챈 해가 소형을 안아 들었다. 서둘러 문을 찾는 듯하지만, 느긋한 손은 소형에게 꽃신을 신긴다.'“나도 그대를 이곳에 두지 않는다.”

미리보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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