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진 문 사이로 말을 탄 사내가 보인다. 급하게 말을 몰아왔는지 괴로워 보일 정도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얼굴까지 파랗게 질려서는 숨도 고르지 않은 채 말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선다. 어디에 시선을 두는 것일까.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어도 그 방향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홀린 듯 비틀거리던 사내의 안색이 밝아진 것이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곧 울 것만 같던 사내가 지은 미소는 안도감이 느껴질 정도로 평안한 것이었다.'그러나 그것도 잠시. 또 무슨 이유인지 얼굴이 굳어져 버린다. 하얗게 질린 입술이 경련을 일으킨다. 누구를 부르는데 저렇게 애가 타는 것일까.'“……형아. 소형아, 소형아.”'버림받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당장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다. 어쩌면 이미 울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사내가 눈을 번쩍 뜬 것은 순간이었다.'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천천히 그것을 향해 다가간다. 아주 앙증맞은 발을 가진 여인이 신었을 법한 꽃신이다. 뽀얗게 햇살을 뒤집어쓴 그것은 보기에도 포근하고 따사로웠다.'그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사내도 꽃신을 잡아 든다. 무슨 향내가 그리도 좋은지 즐겁게 냄새를 들이마신다.'하지만 신을 안아 든 손은 떨고 있다. 붉은 비단신으로는 검은 물 점이 번진다. 사내가 흘리는 것이 분명한 눈물이다. 그 슬픔이 스미는 소리가 들린다. 폭……. 폭폭. 서러운 무게가 실린 소리다.'무어라 웅얼거리며 저 사내는 울고 있을까. 다 큰 사내가 꽃신을 안고 우는 모습은 굉장히 낯설면서도 가슴 아픈 느낌이었다. 왠지 그 슬픔을 알 듯하여 가슴이 아린다. 가여워 눈물이 날 것 같다. 안아주고, 위로해주고 싶어 자신도 모르게 속삭이고 만다.''[울지 말아요. 그렇게 슬퍼하지 말아요. 울지 말아요.]''그 소리가 그에게도 들린 듯 그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그 순간, 얼굴이 흠뻑 젖은 문영은 눈을 떴다. 아직 창밖은 검은 어둠이 드리워진 때였다. 손을 뻗어 시계 조명을 켜지만 역시나 아직은 잠을 깨기엔 이른 시각.'눈가의 물기를 닦고 시계를 내려놓는다. 이렇게 꿈에 밀려 잠을 깨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가끔, 아니, 종종, 아니, 문영이 기억하지 못할 뿐이지 어쩌면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하지만 이렇게 가슴이 아픈 것은 처음이었다. 아직도 가슴이 뻐근하다. 얼굴과 머리칼을 적신 것도 땀이 아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뺨을 타고 목으로 흐른 물기가 잠옷까지 적셔놓았다.'이제껏 오늘처럼 생생했던 적은 없는데, 처음 보는 사내가 이토록 가슴을 아프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날이 밝기까지는 아직 한참. 오늘은 학교도 오후 수업밖에 없으니 다시 잠을 자기에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다. 그러나 가시지 않는 가슴의 통증에 아무리 잠을 청해도 눈이 감기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예민한 신경이 봄바람에 더욱 민감해진 것이라 자조하며 억지로 잠을 재촉해 보지만, 문영이 다시 잠든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이번엔 아침이 올 때까지 잠을 깨지 않았으나, 다시 빠진 수마 속에서 무슨 꿈을 꾸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새벽녘, 곤하게 잠든 사이, 문영은 울고 있는 자신을 알지 못했다.'''“있지……. 꿈에서 어떤 남자가 울었어.”'강의 시간 내내 멍하던 문영이 말문을 열었다. 마지막 수업이 끝난 빈 강의실이었다.'“누군데?”'효주는 마시던 커피를 문영에게 내밀지만 문영의 얼굴은 아직도 멍하다.'“몰라.”'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문영의 얘기는 뜬금없는 것이었지만, 이미 여러 차례 들은 효주는 진지했다.'“몰라?”'대수롭지 않은 개꿈이라 웃어넘길 수도 있는 얘기였으나 효주는 언제나 차분하게 문영을 상대해준다. 이미 농담의 정도를 넘은 문영의 상태 때문이었다. 실은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도 눈치 채고 있었다. 그것이 별반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근데 가슴이 너무 아팠어. 너무 슬퍼서 같이 울은 것 같아.”'“그 남자 누군데?”'이번엔 효주도 난감한 눈치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문영은 명치끝만 쓸어내리고 있다.'언젠가는 시집가는 꿈을 꿨다고도 하고 또 언젠가는 피를 토하며 죽었다고도 했다. 도대체 무슨 꿈이 그런지. 그런 날이면 유난히 피곤해하더니 오늘도 과장은 아닌 것 같다.'“그 남자 왜 울었는데?”'마실 생각이 없는 문영에게 커피를 빼앗아 한 모금 삼킨 효주가 물었다. 어느새 책상에 얼굴을 묻은 문영은 효주를 멍하니 올려다보다 뺨이 눌린 목소리로 대꾸했다.'“몰라. 그냥 내 신발을 들고 울더라. 서럽게.”'“신발?”'신발이 나오는 꿈은 어떻게 해석하더라? 눈을 굴리는 효주가 되물었다.'“응. 내 꽃신을 들고 우는데…….”'“꽃신?”'“그래. 꽃신…….”'문영은 아기자기한 수가 놓인 붉은 꽃신을 떠올리며 답했지만, 문득 그런 자신에게 놀라 입을 다문다. 효주도 ‘웬 꽃신?’ 하고 묻는 표정이다.'내 꽃신?'뭔가 이상했다. 이제까지 신어본 적도, 본 기억도 없는 신인데, 꿈에서 본 꽃신은 분명 문영의 것이었다.'뭐지?'멍하게 묻고 있던 고개를 든다. 왜 그것을 제 것이라 생각하는지 다시 한 번 꿈을 되짚어본다.'분명 본 적 없는 남자였다. 그가 부르던 소형이라는 이름도 들은 적이 없다. 그런 옛날 집도 처음이다. 그런데 왜, 그 꽃신만은 자신의 것이라 생각한 것일까.'순간 소름이 끼쳤다. 뭔가 꿔서는 안 될 꿈을 꾼 것 같은 오싹함이 느껴진다.'아냐. 그럴 리 없어.'문영은 다시 꾹꾹 찔려오는 가슴을 문지르며 신발장에서 본 것도 같은 꽃신을 떠올렸다. 언제 신은 것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것. 꽃신은 다 그렇게 생겼으니 착각한 모양이다 넘기려 하지만,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리는 떨림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떠올리지 말아야 할 기억을 찾은 기분이다.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눈물샘을 자극해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에 효주도 당황한 표정이다.'“아직도 아파?”'그런가, 아픈 건가?'문영은 차가운 눈가를 훔치며 얼얼한 명치끝을 만지지만, 그것은 꿈속의 남자로 인한 아픔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그것은 기억해서는 안 될 금기의 것을 기억해버린 문영의 본능이 표현한 최초의 두려움이었다.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에 대한 강한 반동이다.'지금은 깨닫지 못했어도 문영이 그것을 알게 될 날은 그리 머지않았다. 오래전, 눈을 뜬 사내가 문영을 부르고 있었으니. 문영 스스로가 이날의 꿈을 되뇌게 될 터이니.'결국 잠들어 있던 과거가 문영을 찾아온 것은 며칠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