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아침에 눈을 뜨자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현실이라는 걸 증명하듯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훈에게서 전화가 왔다.

늘 아무런 감정도 생각도 없이 받았는데 막상 어떠한 관계가 되니 전화를 받는 기분이 어쩐지 묘하다.

-일어났어?

“방금 막.”

나긋하게 아침 인사를 하는 지훈 역시 지금 이 상황이 낯간지러우면서도 좋아 보인다.

목소리를 깔고 말하는 게 어린애 같아 귀엽게 느껴졌다.

-보고 싶다.

“하지 마. 낯간지러워 그런 말.”

-차가운 여자 같으니라고. 그럼 더 해야지? 보고 싶어요. 보고 싶어. 보고 싶은데.

유치하게 느글거리는 목소리로 하는 ‘보고 싶다’는 말에 내성이 없는 가희가 질색하며 하지 말라고 해도 청개구리 심보를 보이는 지훈에 가희는 말을 말아야지 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은 가희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려 있다는 걸 핸드폰으로 목소리만 들을 수 있는 지훈도 알 것이다.

-오늘 어디 나가?

“아니. 다리 때문에… 하도 돌아다녀서 좀 쉬어야 할 것 같아.”

-아….

“그러는 그쪽은?”

-나는 낮에 약속이 있긴 한데….

“여자?”

-뭐….

그러고 보니 생각하지 못했던 난관이 있다.

사랑.

남들이 부르는 그 사랑을 이용해 늘 얻어낼 것들을 얻어낸 이들.

진짜 사랑을 하게 되면서 이제껏 해온 일들을 놓아야 하는 걸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래야겠지.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겠어.

“맞구나? 여자?”

-혹시 싫어?

“아냐. 싫을 게 뭐 있어.”

-이거 너무 단칼이라 오히려 서운한데? 좀 잡아 주는 척이라도 하든가.

하지만 상대는 김가희, 이지훈이다.

정상적인 연애를 할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지.

그들은 잘 안다.

비정상은 정상이 될 수 없다는 걸.

비정상인 걸 스스로도 아는데 억지로 정상의 틀에 맞춘다고 들어맞지는 않는다는 걸 그들이 모를 리가 없다.

그들의 비정상적 면모는 남들보다 스스로가 더 잘 아니까.

“나 그쪽이 일하는 거 신경 안 써. 대신 그쪽도 신경 쓰지 마. 나 일하는 거.”

-좋아. 그렇게 합시다. 일은 일이니까. 대신 질투는 허용이지?

“사절할래요. 피곤해, 그런 거.”

-푸흐. 알겠어요.

지훈은 뭔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래도 그녀의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거의 20대 평생을 이렇게 보내왔는데 그녀나 자신이나 한순간에 기존의 삶을 버려 버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

비정상적인 사람이 한순간에 정상이 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 저녁에 시간 되는데, 우리 만날래요?

“저녁에? 음… 그러자.”

-그럴래요? 그럼 내가 가희 씨 집으로 갈게.

“이젠 아주 우리 집에 오는 게 당연하네.”

-당연하기까지야. 다리도 안 좋은데 모시러 가야죠.

“그 정도는 아니라니까.”

-뭐래도 데리러 갈 테니까 그런 줄 알아.

장난스럽지만 굳은 의지가 보이는 지훈에 가희도 수긍하고 말았다.

-아, 맞아. 방금 좀 신경 쓰였는데.

“어떤 거?”

-나 부를 때.

“그쪽을?”

-그래, 그거. 그쪽.

“이게 왜?”

-나 마음에 안 드는 데 그 호칭. 사귀는 사이에 그쪽이 뭐야, 그쪽이. 남도 아니고.

“그런가?”

딱히 신경 쓸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반대로 지훈이 ‘가희 씨’가 아니라 ‘그쪽’이라고 표현해도 딱히 신경 쓰일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아닌 모양이다.

“그럼 그쪽은 어떻게 하고 싶으시길래 그래?”

-또 또 그쪽이란다. 음… 어떤 애칭이 좋을까? 자기?

“아, 헐.”

-왜 그렇게 정색해?

격하게 거부하기라도 하는지 육성으로 터져 나온 외마디에 지훈이 심통 난 투로 물어 왔다.

지훈하고는 성격이 안 맞는 게, 가희는 이런 쪽과는 거리가 멀다.

오글거리고 느끼한 말투나 행동은 가희가 정말 싫어하는 거다.

그런데 어쩌다 이런 오글과 느끼로 구성된 남자를 사랑하게 된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그건 아니지.”

-그렇게 싫어요?

“큼,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그건 좀 아닌 것 같네.”

직설적이고 거리낌 없이 말하는 가희 성격상 이 정도면 그래도 돌려 말한 축에 든다.

-그래…?

그가 조금은 실망한 기색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다.

-그러면 가희 씨는 어떤 호칭이 좋아요?

“평범하게 하죠. 평범하게.”

-평범하게라… 그럼 이건 어때요?

“다시 말하지만 평범하게.”

-완전 평범하게 내 사랑? 나의 곰 인형?

“…아니, 하아. 그… 그러니까 나는 그런 게….”

더는 싫다 하기도 미안할 지경이었는데 지훈은 이미 그녀가 어떤 쪽을 싫어하는지 파악했는지 키득인다.

아… 일부러 그런 거구나.

갑자기 열이 확 받네, 이거.

하루 만에 김가희 놀리기 선수가 된 지훈이다.

역시 사람 다루는 데는 능숙한 아이이다.

내가 너무 물로 봤나 봐.

역시 이런 능글맞은 타입이 제일 어려워.

-너무 얼음 공주라서 걱정했는데 그래도 막상 사귀니 귀여운 면이 있는데?

“네가 미쳤지, 아주?”

-어우, 왜 또 갑자기 살벌해지셨어.

정말인지 달콤살벌한 그녀다.

“시끄러. 까딱하기만 해도 아주 기어오르려고 난리야, 이게.”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아무튼, 저녁때쯤에 갈 테니까 그런 줄 알아요.

“그러든가 말든가.”

사귄 지 이틀.

말이 이틀이지 거의 1일째나 다름없는데 시작부터 싸울 줄을 꿈에도 몰랐지.

그래 봤자 가벼운 티격태격일 뿐이긴 하지만.

*

“귀엽네.”

어제부터 좀처럼 입가에서 미소를 떨어트리지 않는 지훈이 저도 모르게 기분이 한껏 들떠서는 좀 전까지 가희와 통화를 한 핸드폰을 침대 위에 두고는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사랑이라는 단어의 위대함을 일평생 처음 알게 되었다.

감정이 무슨 급작스러운 교통사고처럼 한순간에 충돌해 왔다.

밀고 당기는 거만큼 잘하는 것도 없었는데 그렇게 경주마처럼 돌진한 건 처음이었다.

재킷을 입고 거울을 보니 어젯밤 입었던 셔츠가 바닥에 너부러진 것이 보였다.

그걸 보고 있자니 어젯밤 키스를 마친 그녀의 촉촉한 입술을 엄지로 매만져 주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까? 딴 여자들한테는 하지 않은 말을 해주고 싶은데, 안 떠올라.’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던 그녀가 재킷의 넥라인 쪽에서부터 파고들어 어깨 부분이 드러나게 옷을 걷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다가왔다.

그녀의 입이 그의 어깨를 물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그녀가 물었던 곳에 시선을 두었다.

‘립스틱 자국. 묻히고 싶었는데 립스틱을 안 바르고 왔네.’

‘립스틱 참 좋아해.’

그녀다운 도도한 말에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이 집에 온 날에도 그대는 립스틱 하나만 남기고 갔지.

‘은근 욕심 있는 사람이네.’

‘내가 좀 그래. 왜? 네 취향은 아니야?’

‘딱히. 것보다 자연스럽게 말 놓는 거 봐.’

‘이게 내 타입인데. 싫어? 싫으면 안 하고.’

‘나쁘지 않아. 친근해.’

‘그러는 댁도 은근히 말 놓네.’

셔츠를 보니 어젯밤 목을 끌어안으며 눈웃음이라는 걸 보인 그녀가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