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주황빛 전구가 외롭게 비추는 어스름한 화장실 안.
블랙 시스루 셔츠 속에 흰 살갗을 숨긴 한 여자가 두껍지 않게 화장품을 바른 무결점 피부를 자랑하는 눈송이 같은 얼굴 위 눈을 제외하고는 홀로 다른 색을 내는 입술 위로 붉은 립스틱을 그라데이션 없이 풀로 주욱 그었다.
가희는 입술 밖으로 조금 삐져나온 장밋빛 립스틱을 엄지로 스윽 닦았다.
그녀는 공허한 눈으로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새빨간 입술 사이 새하얀 치아와 약간 올라간 눈꼬리.
당장이라도 생간을 먹을 것을 같은 구미호의 모습이 그녀에게서 보였다.
*
술집 ‘에멜무지로’를 등진 지훈의 입에서 뿌연 담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전자 담배를 피우며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둠이 짙게 깔린 그 밤을 홀로 고독하게 빛내는 별 하나.
달도 흐린 이 밤에 밝게 비추는 별을 보며 지훈은 피식 웃었다.
“웬 별?”
서울의 별, 그저 낯설게만 느껴질 뿐이다.
까만 밤의 저 하얀 별이 그에게 이질감만을 안겨 주었다.
“오빠.”
애교 가득한 콧소리가 섞인 부름에 고개를 돌리니 원피스를 차려입고 머리에 웨이브를 넣어 지금 신고 있는 7cm 구두만큼이나 한껏 힘을 준 여자가 사뿐하면서도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다가온다.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건 그녀의 구두만이 아니었다.
어색하게 올라간 입꼬리와 애매한 각도로 흔드는 가는 손목.
그 모든 게 눈에 들어왔지만, 지훈은 그런 건 모르는 척 웃어 보였다.
“어, 왔어?”
지훈은 피우고 있던 전자 담배를 주머니에 넣고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여자를 향해 싱긋 웃으며 그녀가 쉽게 팔짱을 낄 수 있도록 팔을 내주며 술집으로 들어섰다.
『연애는 누구나 자신을 속이는 데서 시작하고, 남을 속이는 데서 끝나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이 지상에서 일컬어지는 로맨스이다.』 -와일드-
숨은 연애 감정 찾기: 연애의 기술
<1>
화장실에서 나온 가희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덩치 있는 남자에 헛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그녀는 단아한 걸음으로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는 우두커니 제자리를 지키는 강현을 스쳐 지나가며 흘리듯 내뱉었다.
“그 인간이 보냈나 보지?”
애초에 강현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었는지 가희는 멈칫하는 동작 하나 없이 그를 스쳐 지나 바로 대각선에 있는 테이블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이미 취기가 올라온 듯 눈빛이 흐릿했다.
가희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걸 증명하는 듯한 흐트러진 머리와 술을 애타게 찾는 떨리는 손에 이유 모를 희열을 느꼈다.
“그래서, 할 말이 뭐라고?”
동재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톡, 톡, 톡.
길고 뾰족한 손톱으로 책상을 두드리던 가희는 그 잠시의 기다림조차도 지겨워 보였다.
얕은 한숨을 뱉은 가희가 그의 앞에 놓인 담배를 하나 집어 입에 물고는 그의 터보 라이터로 불을 붙이자 하얀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헤어지자, 우리.”
“…….”
뭐라 반응 없이 담배만 피우는 가희에게 동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잘 못 들었나 싶어 그가 다시 한번 말했다.
“…그만 만나자고, 우리.”
“…아하하하하.”
동재의 진지함이 가득 담긴 말에 잠시 피식 웃던 가희가 이내 소리 내며 웃었다.
그건 분명 비웃음이었다.
비웃음 안에서 느껴지는 그 싸늘함은 마치 악마의 피를 만졌을 때의 촉감과도 같았다.
웃음은 곧 멈췄고, 그 위에는 대리석같이 냉한 얼굴만이 남았다.
“아… 재밌다. 어쩜 그렇게 한 치의 예상도 안 빗겨 나갈 수 있을까?”
가희의 나지막한 말에 동재의 미간이 구겨졌다.
가희는 동재의 표정이 어떻든 말든 그의 심정보다 자신이 입고 있는 청바지의 삐져나온 실밥이 더 신경 쓰였다.
“넌 모르겠지만, 나 그동안 많이 참았어.”
가희는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삐져나온 실밥을 손톱 끝으로 살살 건드렸다.
“다 이해하려 했어. 네 모든 것을.”
“아, 그으래?”
“여러 남자 만나는 것도, 네 무심한 행동 모두 다 이해하려 했다고.”
입에 담배를 물고는 새는 발음으로 대강 대꾸하고는 그의 터보 라이터를 다시 집어 삐져나온 실밥을 태워 없앴다.
그녀가 성의 없이 반응한다는 걸 당연히 안 동재가 인상을 더 구기며 입을 열려 하자 그래도 나름 재밌다는 표정이던 가희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가희는 동재의 터보 라이터를 그의 앞쪽으로 던져주고는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그래서 어쩌라고. 만나기 싫으면 만나지 마. 내가 뭐 너보고 만나 달라고 애원하기라도 해?”
“뭐?”
“너 뭔가 되게 많이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기가 찬다는 표정이 그녀의 얼굴을 가득 메웠다.
숨 막힐 정도로 촘촘하게 말이다.
한순간에 일그러지는 가희의 얼굴에 동재가 흠칫하면서 술잔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가희는 그런 동재를 한심스럽게 보며 픽 웃고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넌 내가 조금이라도 아쉬워하길 바라는 것 같다?”
“붙잡을 줄 알았어.”
몸의 열기를 식게 하는 알코올이 그를 솔직하게 만들었다.
평소였다면 자존심 때문이라도 입 밖으로는 꺼내지도 못할 말들을 당차게 내뱉는다.
“건방지네.”
“내가 그동안 너한테 쏟아부은 돈이 얼마인데. 아쉬운 건 당연히 너 아니야?”
“내가 왜?”
가희의 반문에 동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멍해져 버렸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반격이었다.
“허, 왜냐니. 너 나 아니면 살 수 있어?”
“못 살 건 뭔데?”
“…….”
“거봐. 넌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어.”
표정으로 냉기를 뿜어내는 저 자태를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아주 우아하게 잘근잘근 씹어 먹어 줄 거라고 말하는 듯한 톤이 동재의 심장을 압박했다.
“걱정하지 마. 너 아니어도 갖다 바칠 놈 많아. 네가 좋다고 갖다 바친 것 가지고 생색내지 마. 추접스러워. 그리고… 너랑 나랑 사귄 것도 아닌데 뭘 헤어져. 주제넘게, 진짜.”
이를 살짝 악물며 말하는 가희에게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멍한 동재가 침을 꼴깍하고 삼켰다.
미리보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