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임마! 너 지금 몇 시인지 나 알아?」''자취방 앞에 서 있는 희수를 보며 진혁은 자신의 손목에 있는 시계를 힐끔 보았다. 벌써 9시가 다 되어 간다. 10시 30분이면 희수가 지내는 기숙사가 문을 닫을 시간이다. ''「가자. 기숙사까지 데려다 주께.」''「싫어. 형이랑 술 한 잔 하려고 벌써 두 시간째 이러고 서 있었어. 들어가자. 나 추워.」 ''그제야 진혁은 희수의 빨간 코와 맥주가 담겨진 비닐봉지를 쥐고 있는 그녀의 얼은 손을 보며 재빨리 자물쇠를 열었다. ''「전화는 놔 뒀다 엿 바꿔 먹니? 안 오면 전화를 해야지 미련하게 추위에 떨고 있니. 떨고 있긴.」''걱정스러운 마음에 말이 곱게 나오지 않는다.''「미련한 애인 뒀더니 그 바보바이러스가 전염됐나 보지, 뭐.」''열려진 문 틈 사이로 재빨리 들어가며 희수가 투덜거렸다. 희수는 들어가자마자 불을 켜고 보일러를 작동시킨 뒤 이불을 꺼내 폭 뒤집어쓴다. 그리고선 턱으로 자신이 들고 온 까만 비닐봉지를 가리켰다. ''「오징어랑 줄줄이 소시지 사 왔어. 빨랑 안주 준비해. 난 추워서 꼼짝도 못하겠어.」''다짜고짜 명령체에 진혁은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꼭 자신의 집처럼 구는 희수가 사랑스러워 보였다. ''「네. 네. 마님. 나 너한테 장가가면 어떻게 생활할지 눈에 선하다. 진짜 최진혁 인생 봄날은 가는구나.」''진혁이 비닐을 들고 부엌으로 돌아서며 푸념 섞인 말들을 뱉어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검게 가라앉아 버린 희수의 눈이 쫓고 있었다. 절대 잊지 않으려는 듯이. 그의 머리 결에서 발끝 하나, 하나까지 훑어보고 있었다. 희수의 눈이 슬픔으로 점점 어두워진다. 이미 자신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사람인데, 산소를 들이키며 살아가는 것처럼 자신에게는 살아가는 이유 자체인 사람인데…….''「그런데 정말 너 가봐야 하는 거 아냐? 시간 빠듯하잖아.」''안주와 맥주를 준비한 진혁이 돌아오자 희수는 재빨리 표정을 바꾸었다. 자신의 얼굴 표정 하나까지 놓치지 않는 그였다. 내일이면 자신을 원망하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걱정하는 진혁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는 투덜거리면서도 안주를 먹기 좋게 다듬어 그녀의 앞으로 밀어놓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자기 자신보다 그녀를 더 아끼고 위했다. 자신은 한 끼를 굶을지라도 평소 책읽기를 즐기는 희수에게 책을 선물하던 사람이었다. 길을 걸을 때면 습관처럼, 버릇처럼 길 안쪽에 그녀를 세우고 자신은 차들이 다니던 바깥길만 고집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녀를 사랑하던 사람이었다. 평생 사랑만 해도 모자라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 평생 같이 보며 사랑할 줄 알았다.''「마셔. 마셔. 술 놔두고 무슨 걱정이 그리 많아. 늦으면 형이 재워주면 되지. 무슨 걱정이야.」''자꾸만 약해지려는 자신을 추스르며 희수는 그의 잔에 소리 나게 자신의 잔을 부딪혔다.''「이 여인네 말하는 거 보게. 넌 내가 순한 양으로 보이냐.」''진혁이 느끼한 눈빛을 지으며 씩 웃어 보이자 희수가 낄낄거리며 웃어댄다. ''「녀석. 웃을 일도 없다. 이 정도에 눈물까지 흘리며 웃어대긴.」''- 형. 어떡해. 내일이면. 날이 밝으면 희수, 형 못 볼 건데. 형보고 싶어서 희수 어떡해. 응?」 ''희수는 눈가에 눈물을 찍어내며 방긋 웃어 보였다. ''「형, 오디션 본 거 결과는 나왔어?」''「그래. 오늘 안 그래도 거기 갔다 오는 길이야. 정확한 결과는 일주일 뒤지만 관계자 말이 거의 내가 확실하대. 너도 내 실력 알잖아.」''진혁이 으스대듯 폼을 재자 희수가 고개를 끄떡거렸다. ''희수는 진혁의 노래를 사랑했다.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그 무언가가 그의 노래에는 실려 있었다. 사실 진혁은 대학가에서는 거의 스타급 뮤지션이었다. 그가 노래를 부르는 라이브카페에는 언제나 그를 보려는 사람들로 넘쳐나곤 했었다. 이번 제일음반사의 오디션에 진혁이 나오자 다른 경쟁자들도 이미 체념한 상태였다. ''「우와! 형. 가수 되면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팬클럽 같은 것도 생기겠네.」'「응. 그러면 나 너 꼭꼭 숨기고 애인 같은 건 없습니다. 이럴 수도 있어. 너 만날 때도 변장해서 몰래 만나고 전화도 번호 두 개 만들어서 네 전화는 따로 받고 말야.」''말은 너스레를 떨어대지만 벌써부터 진혁은 그동안 희수에게 해주지 못했던 것들의 리스트를 떠올리며 나름대로의 꿈에 빠져 있었다.''「피, 김칫국은.」''배시시 웃고 있는 희수의 짧은 커트머리를 쓰다듬으며 진혁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 가수 되고 유명해져도 너 숨기고 그런 일 안 해. 우리 희수 너무 예쁜데. 이렇게 예쁜데. 왜 숨기고 그래. 내가 사랑하는 여자라고 떳떳이 내세울 거야. 우리 희수 많이 예뻐해 달라고 막 떼쓰고 그럴 꺼야, 나.」''「형이 그럴 꺼라는 거 알아.」''희수가 싱긋 웃자 진혁의 마음이 따뜻해졌다. 진혁과 희수가 유명한 캠퍼스커플이 된지도 이미 2년이 지나고 있었다.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고 아르바이트까지 하면서도 장학금을 놓치지 않는 그녀였다. 힘든 생활이지만 언제나 당당하고 웃음을 잃지 않는 그녀였기에 진혁은 희수가 더 자랑스러웠다. ''어머니가 한 분 계시다는 말만 들었지 자신의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기에 진혁은 그저 희수의 가정형편이 좋지 않다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야! 벌써 10시 넘었어. 일어나.」''진혁이 시계를 보며 벌떡 일어났지만 희수는 앉은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도리어 오징어만 질근질근 씹어대고 있었다. ''「한희수! 10시 넘었다니까.」''「나 여기서 자고 갈 꺼야.」''그녀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한 진혁이 멍하니 희수를 바라보았다. ''「힘으로 끌어 내봐. 나 여기서 꼼짝도 안 할거니까. 기숙사 춥단 말야.」''희수가 고집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한희수,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니? 계집애가 어디서 남자 혼자 사는데 쳐들어 와서 자고 간다고 생떼를 부려?」 ''「앉아. 형 너무 커서 올려다 보다 내 목 디스크 걸리겠다.」''진혁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희수가 한 번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하늘이 두 쪽이 난대도 하고야 마는걸 알고 있기에 진혁은 그저 맥주를 들이키고 있는 희수만 바라보았다. ''「너. 무슨 일 있는 거야?」''평소 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희수를 보며 진혁은 그제야 희수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일은. 그냥 추운 기숙사보다는 형 품이 더 따뜻할 거라고 생각했지. 전에 졸업여행 갔을 때도 우리 안고 잤잖아.」''「임마. 그거야 친구들하고 같이 있을 때고 여기는 너랑 나랑 단 둘 뿐이잖아.」'「그게 뭐 어때서.」''「으악. 내가 미친다. 미쳐.」''자신의 머리를 마구 문질러 대는 진혁을 보며 희수는 마지막 잔을 들이켰'다. ''- 형. 나 오늘 형 여자 되려고 왔어. 다른 남자한테 안기기 전에 한번이라도 형한테 안겨보고 싶어서 왔어. 처음은 형한테 꼭 주고 싶었으니까. 이 한 번의 추억으로 나 이제 평생 살려고.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서도 형하고의 추억만 가지고 나 살아가려고 하는 거니까.''「다 마셨다. 빨리 치우고 이불 펴.」''이젠 아예 꿈쩍도 못하겠다는 듯 자리에 들어 누워버리는 희수였다.''「너 정말 여기서 자고 갈려고 그러는 거야?」''「지금가도 기숙사 못 들어가. 나 여관방에서 재울 거야?」''희수의 고집스러운 얼굴을 보며 진혁이 한숨을 내질렀다. 술상을 정리하고 이불자리를 펴면서도 그녀를 지켜 주십사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자신이 순한 양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