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남자 친구가 생겼어요. 그래서…….”

영인이 처음으로 자신의 남자 친구를 소개해 주고 싶다며 건넨 말에 유 회장 부부는 무조건 데리고 오라며 반겼다. 몸이 약한 영인의 엄마가 천신만고 끝에 얻은 귀한 딸이 도통 연애에는 관심도 없이 대학까지 졸업하고 나자 드러내 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도 정략결혼으로 맺어져 애틋한 사랑이나 가슴 떨리는 연애도 해보지 못하고 조선 시대처럼 얼굴 한 번 겨우 보고 결혼을 했기에 꽤 오랜 시간 삐걱거렸고 두 사람 모두 깨를 볶는다는 신혼 기간이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영인은 그런 결혼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저 평범하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평생을 행복하게 살게 해주고 싶었기에 표면적인 조건 같은 것은 그리 중요치 않았다.

“이름은 뭐야? 몇 살인데?”

호들갑을 떨며 영인을 재촉하는 차 여사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대학 때에도 그 흔한 미팅도 하지 않는 딸 때문에 혹시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기에 영인의 연애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준수. 스물아홉 살. 지금은 K 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어.”

“머리가 좋은가 보네. 사진은 없어?”

소녀처럼 활짝 웃으며 준수의 사진을 종용하는 엄마를 보며 영인은 휴대전화를 들어 갤러리를 오픈했다. 그동안 준수와 다니며 함께 찍은 사진은 무척이나 많았다.

“착하게 생겼네. 우리 영인이가 아주 그냥 좋아서 죽네. 죽어. 이 사진 좀 봐요.”

아예 영인의 휴대전화를 들고 유 회장의 옆으로 옮긴 차 여사는 연신 손가락을 움직이며 영인과 준수의 사진에 푹 빠졌고 그것은 유 회장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활짝 웃고 있는 영인의 뒤에서 어정쩡하게 웃는 준수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거슬렸지만 남자들은 으레 여자들과 다르기에 유 회장은 다시 영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희가 원하는 시간 언제든 상관없으니까 날짜하고 시간만 미리 알려 주면 맞춰 보마.”

“아빠 바쁘잖아. 우리가 맞추면 되니까 실장님하고 상의해서 알려 줘요.”

“배려심도 깊지. 우리 딸.”

뭐가 그렇게 좋은지 영인을 보는 눈에서 소위 말하는 꿀이 뚝뚝 떨어지는 유 회장이었다. 세게 잡으면 부서질까 함부로 안아 보지도 못했던 어린 시절부터 영인은 자신을 실망시키거나 가슴을 아프게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었다. 영인이 필요하다면 자신의 심장이라도 망설임 없이 꺼내 줄 만큼 영인은 그런 존재였다.

“그래도 여자가 너무 좋아한다는 티를 이렇게 내면 너무 없어 보이니까 조금 좀 숨겨.”

유 회장은 여전히 영인의 갤러리를 보고 있는 차 여사를 흘끔 보고는 영인에게 타박 아닌 타박을 하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난 이만 나가 봐야 할 것 같으니까 나머지는 두 사람이 잘 정해 봐.”

“오늘도 나가시게요?”

소파에서 일어서는 유 회장을 따라 일어선 차 여사는 그제야 영인에게 휴대전화를 돌려주고 유 회장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당신 보기에는 어때요?”

“사진 보고 어떻게 알겠어. 만나 봐야 알지.”

“마음에……. 안 들어요?”

“갔다 오리다.”

더 이상 가타부타하지 않고 갔다 오겠다는 짧은 말만 남긴 유 회장의 반응에 차 여사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사진 속에서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썩 반기는 눈치가 아니었기에 제발 자신의 생각이 그저 기우이기를 빌었다.

모두가 고대했던 날이었다. 처음이니까 조용하게 한정식집에서 식사나 하자는 유 회장의 권유에 영인도 흔쾌히 수긍했다. 평소 가족 모임이 있거나 하면 가끔 오던 한정식집이었기에 영인은 커다란 기와집 앞에서 움찔하는 준수의 팔을 가볍게 잡으며 활짝 웃었다.

“떨려?”

“조금.”

준수는 영인을 바라보며 입술 끝을 올려 보았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기와를 얹은 긴 담벼락의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어 보이는 한정식집은 준수의 발걸음을 자꾸만 붙잡았다. 영인의 부모님과 처음 하는 식사 자리라서 자신이 마련할 수 있는 최대한의 돈을 마련해 왔지만 자신의 초라한 지갑은 꺼낼 수조차 없을 것 같았다.

“부모님은 벌써 오셨대. 어서 들어가자.”

자신의 맘도 모르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영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선 준수는 셔츠 안쪽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느낄 수 있었다. 한 걸음을 내딛을수록 점점 작아지는 자신의 어깨가 왜 이렇게 짜증스러운지 철없이 자신의 옆에서 웃고 있는 영인까지 미워질 지경이었다.

‘그래. 고작 밥 한 끼야. 쫄지 말고 당당하자.’

스스로에게 고작 밥 한 끼라며 세뇌를 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손에 들린 작은 꽃다발까지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이 점점 더 초라해졌다.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오빠 긴장하게.”

“우리도 지금 막 왔어. 어서 와요.”

차 여사의 말에 영인과 준수가 안으로 들어갔고 준수는 허리를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와 준비한 꽃다발을 건넸다.

“이준수라고 합니다. 꽃을 좋아하신다고 하셔서…….”

“어머, 고마워요.”

“일단 앉지.”

초라한 차림새는 둘째치고 살짝 구부러진 몸과 한곳에 집중되지 못하고 불안한 듯 흔들리는 눈동자가 계속 눈에 거슬렸기에 평온해 보이는 유 회장의 눈빛이 처음과 다르게 조금 굳었지만 아끼는 딸의 남자 친구라서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다른 이도 아닌 영인이 선택한 남자이기 때문이었다.

“K 대 석사 과정에 있다고 하던데 전공은 뭔가.”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아빠는 무슨 처음부터 그렇게 딱딱하게 묻고 그래. 배고파.”

영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미리 주문해 둔 음식이 상 위에 가득 채워졌고 우선 식사를 하자는 유 회장의 말에 별말 없이 식사가 진행됐다.

“술은 좀 하나?”

“가볍게는 괜찮습니다.”

“이 집에서 직접 담근 더덕주가 참 유명하니까 가볍게 한 잔만 하지.”

술을 주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끗한 백자에 담겨 나온 더덕주의 향이 은은하게 풍겼고 준수는 무릎을 굽히고 유 회장에게 최대한 공손하게 술을 따랐다.

“우와, 향이 진짜 좋다. 나도 한잔할까?”

“차는 어쩌고.”

“그런가? 그럼 오늘은 패스.”

영인이 배시시 웃자 차 여사는 못 말리겠다는 듯 피식 웃으며 술잔을 들고 있는 준수를 바라봤다. 좀 과하다 싶게 긴장한 듯 보이는 준수의 모습이 조금 안쓰럽게 느껴졌다. 영인처럼 편하지는 않겠지만 저렇게까지 긴장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식은땀이 배어 있는 목덜미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우리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 아닌데 준수 군이 너무 긴장했네. 편하게 해요.”

“아, 아닙니다. 괜, 괜찮습니다.”

처음부터 주눅이 들어서 그런지 준수는 좀처럼 안정되지 않았고 스스로에게 자꾸만 짜증이 치밀었다. 더구나 자신을 해부하듯 샅샅이 살피는 유 회장의 눈빛이 불쾌함을 넘어 두려울 지경이었다.

“우리 영인이와 교제한 게 얼마나 되었나.”

“1, 1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1년하고 석 달 됐어. 지금 결혼 허락받으러 온 거 아니거든요. 그냥 아빠랑 엄마한테 오빠를 소개해 주는 자리라고요. 너무 앞서지 마세요.”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치국만 엄청 마시는구나. 준수 군도 우리 영인이를 가벼운 연애 상대로만 생각하는 건가?”

유 회장이 술잔을 들어 마시자 그때까지도 술잔을 들고 있던 준수는 몸을 틀어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쌉싸래하고 향긋한 더덕주의 맛 따위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잔을 내려놓았지만 유 회장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가벼운 상대로 만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결혼은 자신에게 너무 먼 얘기였고 무엇보다 영인의 집이 이렇게 대단한 집인지도 몰랐기에 유 회장의 물음에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오, 오빠가 아직 공부를 많이 해야 해서…….”

“우리 영인이를 사랑하나?”

물 잔을 들어 텁텁한 입을 헹구고 있던 준수는 유 회장의 그 짧은 물음에 기어이 사레에 들려 기침을 해댔고 그 모습에 평온했던 유 회장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지만 그 모습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아빠는 처음 보는 사람한테 뭘 그런 걸 묻고 그래. 오빠가 놀랐잖아요.”

“죄송합니다. 영인이를…….”

“괜찮네.”

그 후 소소한 대화가 오고 갔지만 식사가 끝나는 내내 유 회장은 아무런 말도 없이 더덕주를 몇 잔 더 마셨을 뿐이었고 그것이 준수를 더욱 작아지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