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7년 만의 재회

어둡고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공간.

달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크리스털 잔이 영롱함을 뽐내기라도 하듯 지수의 손에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지수는 그런 빛은 관심도 두지 않고, 쓰디쓴 호박색의 액체를 무심코 잔에 채웠다.

잔에 채워질수록 크리스털만이 가지고 있는 차가운 빛은 차츰 사라져버렸다.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잔을 들어 독한 술을 한입에 털어 넣었고, 술잔을 내려놓기도 전에 술병을 들어 술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딩동.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지수는 초인종 소리를 들으면서도 전혀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이곳에 그 누구도 올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심한 손길로 술을 마시고, 또 한 번 잔에 술을 따랐다.

-딩동.

초인종 소리가 또 한 번, 요란하게 울렸다.

그제야 재촉하듯 울려대는 초인종 소리가 신경 쓰여 무심코 인터폰 모니터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쿠당탕!

벨을 누른 사람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지수는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의자가 뒤로 넘어가 큰 소음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런 소음에는 관심도 없는 듯, 지수는 후다닥 현관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얼음물에 머리라도 담근 것처럼 취해가던 정신이 멀쩡해지다 못해 모든 신경들이 쭈뼛 서는 것이 느껴졌다.

인터폰 모니터에 열기 버튼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지수의 이성은 달아난 상태였다.

급하게 손잡이를 잡고 돌려 문을 열었다. 문을 여는 그 짧은 시간이 지수에게는 길게만 느껴졌다.

혹시라도 벨을 누른 사람이 기다리다 지쳐 돌아가 버릴까 봐 초조했다.

그저 지금 바라는 것은 딱 하나였다. 제발 문 앞에 있는 사람이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있어 주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현우……!”

지수는 발걸음을 돌려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지려는 현우의 이름을 부르며, 급하게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놀랐는지 현우의 눈이 한없이 커졌고, 그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담겼다.

손목에서 느껴지는 강한 힘에 현우는 그대로 몸이 얼어버려 소리를 지르지도 못했다.

그녀의 상태를 알면서도 지수는 잡고 있던 손목을 놓을 수 없었다. 이대로 놓아버리면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은 불안한 마음 때문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그녀를 놓쳐버리면, 다시 잡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들 때문에 여린 그녀의 손을 강한 힘으로 잡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아파…….”

“아! 미안해.”

현우의 한마디에 잃어버렸던 이성이 돌아왔다. 화들짝 놀란 지수가 힘을 풀어 잡고 있던 현우의 손을 놓아줬다.

얼마나 강한 힘으로 잡고 있었는지, 그 짧은 시간에 현우의 손목이 빨갛게 부어있었다.

현우를 아프게 했다는 사실에 충격받은 얼굴로 지수는 멍하니 그녀의 손목을 바라봤다.

“괜찮으니 그만 그렇게 쳐다봐.”

현우보다 더 놀라는 지수를 진정시키려 짧게 말했다.

“응.”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답을 하는 지수를 보며 현우는 피식 웃어버렸다.

시선은 여전히 자신의 손목을 향해 있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대답부터 하는 그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안도감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의 변함없는 모습 때문인지, 아니면 넋을 놓은 사람처럼 멍해 있는 그의 모습 때문인지는 현우도 자세히 알 수 없었다.

“현우, 네가 여기 왜……?”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지수는 진정이 되었는지 현우를 바라보며 의아한 시선으로 물었다.

“현수가 여기로 오라고 해서 왔는데…….”

순순히 대답하면서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현우의 말은 끝맺지 못하고 허무하게 흩어졌다.

“들어와.”

“아니야, 나 갈게.”

지수의 말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현우는 뒤돌아서려 했다.

“가지 마!”

멀어지려는 현우를 잡기 위해 지수는 실내용 슬리퍼를 신은 채, 밖으로 뛰쳐나와 그녀를 막아섰다.

재빠른 그의 행동에 현우는 멈칫하며 움직임을 멈추고 한참이나 키가 큰 지수를 올려다봤다.

더 이상의 움직임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강렬한 눈빛을 뿜어내는 그를 차마 모른 척할 수 없어 현우는 말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들어갔다 가.”

“술 마신 것 같은데 쉬어. 난 가볼게. 현수 이놈을 내가 그냥……!”

과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현우는 일부러 더 목소리를 높였다.

단지,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지금 벗어나지 않으면 감당하지 못할 일들이 벌어질 것만 같아 어떤 수를 쓰더라도 지수의 앞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들어갔다 가.”

그런 현우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는지 지수는 단호한 표정으로 같은 말만 반복했다.

깊은 눈매와 한 쌍인 날카로운 눈빛은 갈 곳을 잃어버린 강아지처럼 미세하게 떨리는 지수를 보며 현우는 더 이상 그를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현우는 이성보다 행동이 먼저 앞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현우의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지수는 빠르게 그녀의 손목을 잡아 집 안으로 끌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코를 찌르는 독한 술 냄새에 현우는 코를 찡긋하자, 그녀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는 지수는 부리나케 달려가 마시고 있던 술의 잔해를 치워버렸다.

“여기가 지수 네 집인 줄 몰랐어. 알았으면…….”

“알았으면 뭐?”

부드러워졌던 지수의 눈매가 순식간에 매서워지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받아쳤다.

언제라도 달아날 준비를 하고 있는 그녀를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는 한이 있어도 자신의 곁에 두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어 현우가 눈앞에서 마법처럼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말았다.

“안 왔어.”

날카로운 지수의 눈빛을 받아내면서도 현우는 할 말을 끝까지 매듭지었다.

처음 보는 낯선 지수의 매서운 모습에도 현우는 굴하지 않고 대답했다.

쉽사리 나오지 않으려는 대답을 억지로 꺼낸 이유는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왜?”

“내가 와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이제 나 좀 볼 때도 됐잖아. 젠장.”

감정이 담기지 않은 현우의 말에 지수는 결국 낮은 목소리로 욕지거리를 뱉어냈다.

시원하게 뻗은 이목구비가 일그러졌다.

자신보다 작은 현우를 내려다보는 지수의 눈빛은 싸늘해진 겨울 날씨보다 더 차가웠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 느슨하게 매고 있던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아무렇게나 던졌다.

현우를 향한 시선이 애절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