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그 날 아침의 바람은 다른 세상으로 인도하고

#1.

신록의 계절이니만큼 그 날의 햇살과 바람은 유난했다.

청야담 안쪽, 별당 장지문이 요란스럽게 열렸다. 손녀인 소종이었다. 맑은 날에 반해 그녀의 표정은 말도 못 하게 일그러져있었다. 숨소리조차 거칠었다.

“내가 다시 할머니와 대화하면 개다 개!”

말본새도 거칠기 짝이 없었다. 어깨엔 배낭을 멘 채 꺾은 단화조차 어설픈 그대로 씩씩댔다. 그러나 그녀의 눈엔 물기가 어려 있었다.

“내가 잘못한 게 뭔데! 내가…….”

차마 끝까지 내뱉지 못한 소종은 못내 울컥했다. 그녀는 잠시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푸르른 하늘은 눈부셨다.

“참 쓸데없이 맑다니까.”

청명한 이 아침은 이토록 아름다운데 청야담의 대단하신 김신제 여사의 호통은 어찌 그리 매서울 수 있단 말인가.

“내 참 웃겨서 진짜.”

소종은 제 처지가 우스워 하릴없이 웃었다. 어깨의 배낭을 고쳐 멨다. 배낭엔 대충 챙긴 짐이 아무렇게나 쑤셔져 있었다.

낡은 대문조차 기나긴 세월이 담긴 청야담. 사대문 안쪽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오랜 고택인 이곳은 전통과 품격으로 명맥이 끊기다시피 한 왕실의 맛을 전통적으로 재현하는 예약제 한식당이다.

두터운 담벼락을 중심으로 안채와 별당, 행랑채, 그리고 손님을 맞이하는 사랑채와 별채 곳곳은 예스러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즐겨 찾는 손님들 면면 또한 정재계를 비롯한 유명인사에서부터 이름난 연예계 스타들까지. 명성이 자자한 곳이었다.

또한 소종의 조모인 김신제 여사께선 3대째 이어온 만큼 이곳 청야담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정확히는 청야담 고유의 손맛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청야담의 전통을 마구잡이 잡스러운 것으로 섞지 말거라.’

‘잡스러운 게 아니죠. 재해석을 통하여 새로운 요리를 선보이려는 건데요. 온고지신의 정신에 기초하여 보다 창조적으로 계승되어야…….’

‘꼬박꼬박 대거리하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이 할미가 이젠 기력이 없어 보이더냐? 네가 그리 안달을 낼이유가 없다!’

‘안달이 아닌데요. 난 그저 배운 바 현세대에 맞는 요리를 지향해야…….’

‘어디 가서 청야담의 손녀라 말하지 마라. 네가 감히 어디서 우리의 한식을 운운해!’

‘왜 안 되는 것인데요. 저도 할 수 있습니다, 할머니, 아니 여사님! 고유의 맛에 조금 색다른 가미를 행할 뿐이…….’

‘안 된다. 늘 말하지 않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솜씨로 수라간에 드나들라치면 여기서 썩 나가거라!’

‘너무하세요! 그럼 뭐 하러 유학을 보내주고 뭐 하러 실력을 쌓게 한 건데! 내려온 손맛을 지탱하여 새롭게 변화하자는 것이 왜요!’

‘이 고연. 어디서 감히! 명색이 청야담의 핏줄인 네가 우리의 전통을 무시해? 너 같은 손녀 필요 없다! 당장 나가거라! 당장!’

‘네! 나갑니다! 나가요! 여기 아니면 내가 칼 쥘 데가 없을까 봐! 나간다고요! 할머니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제 근본 없는 요리, 맛나게 먹어줄 이들을 찾아갈 것입니다.’

좀 전까지의 상황을 그려내자 푸른 하늘이 노래졌다. 소종은 고개를 떨어트렸다.

“내 신세 정말.”

요 몇 달간 최선을 다해 수라간 숙수들과 솜씨를 다졌다. 더욱이 요리학교로 유학까지 다녀온 만큼 충분한 실력을 겸비했다 자부하며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드디어 자신만의 풍미를 가진 요리를 손님상에 내놓겠단 요구를 했었는데……. 결과는 비참했다.

“맛은 변하기 마련이야. 시대가 어느 땐데.”

조모인 김신제 여사는 소종이 차린 상을 냉혹히 평가했다. 구색이 틀렸다, 모양새가 어울리지 않는다, 자극적인 맛이 강하다, 솜씨가 요란하다 등등. 오랜 청야담의 정통만을 이어가길 원했다.

“참말 꼬장꼬장 하다니까! 왜 모르시냐고!”

소종은 중문을 당차게 지나쳤다. 으르렁대나 성이 풀리지 않았다.

“전통 따위가 뭐! 그놈의 전통!”

한이 맺힌 기분이었다. 소종은 그 자리 우뚝 멈췄다.

“좋아! 진짜 나간다. 내가 청야담 아니면 요리할 수 없을까 봐! 이래 봬도 오라는 곳은 많거든!”

오기였다. 수습이든 뭐든 보란 듯이 청야담보다 더 멋들어진 곳에 들어갈 테다. 그렇게 되면 할머니의 표정이 볼 만 하겠어.

“이참에 청야담을 벗어나 보일 테야! 보란 듯이 성공할 거라고, 난.”

그래서 내 이름을 건 단독건물도 세우고 현대식 간판에 유럽에서나 봄 직한 멋스러운 의자와 탁자를 놓아야지.

벌써부터 전부 이룬 듯 붕 뜬 소종은 아주 씩씩하게 대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내 청야담 담벼락을 지나쳤다. 그동안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동안 그만큼 했으면 됐어.”

암, 그렇고말고. 명가의 후손으로서 청야담의 후계자니 뭐니 들어가며 아까운 십 대를 철저한 교육과 순응으로 옛것을 고스란히 답습했잖아. 정통 방식 그대로 대대로 내려온 손맛을 지켜 내기만 하면 뭐해.

소종은 창조를 곁들이려는 것이다. 일종의 개혁이라 할까. 새로운 맛을 추가하고 싶었다.

“변해가는 사람들의 입맛은 크게 달라졌다고요. 할머니.”

저 혼자 주절주절, 소종은 제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걸음이 한층 느려졌다. 잠시 뒤엔 흘깃 뒤를 돌아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쫓아오는 이는 없었다. 소종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한탄했다.

“기막혀서. 그렇게 소리소리 질렀는데. 내가 청야담을 나가겠다는데 말리는 이도 없어?”

그래 좋아. 정말 끝이다. 내 요리가 근본 없는 쓰레기 취급을 당할 수야 없지.

아주 단단히 마음먹은 소종은 익숙한 길을 걷다 수표교(水標橋)에 다다랐다. 세월의 흔적이 여실한 반월교였다. 닳고 닳아 사라진 무늬들도 정겹고 주변 풍성한 나뭇가지를 뻗치고 있는 수목들도 평화로웠다. 소종은 잠시나마 한적한 전경에 눈을 빼앗겼다.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만, 언제 이런 길이 있었나?”

왠지 모르게 익숙한 듯하면서 낯선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곧 그녀의 의문을 잠재울 청량한 소리들이 있었다. 이리저리 지저귀는 이를 모를 새들이었다. 새들은 오밀조밀 모여들며 날개를 푸득대다 각기 울어댔다.

“그래, 일찍 나는 새가 먹이도 잘 잡는다더라.”

지켜보다 어쭙잖은 고사까지 들먹였다. 그런데 지저귀는 새들이 점점 많아졌다. 거기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울어댔다. 소종은 혹시나 싶어 발을 들었다가 멈춰 보았다. 역시나 새들이 울부짖듯 지저귀다 멈췄다. 웃기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웃음이 났다.

“새들이 내 걸음을 아나 봐.”

소종은 말그레한 낯빛으로 보란 듯 한 발씩 발걸음을 떼었다. 걸음을 옮길수록 지저귀는 새들의 수는 늘어만 갔다. 점점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새들아. 조금 조용히 해야겠어. 그렇게 울다간 민원 들어가겠다. 아니면 날 응원해 주는 거니?”

소종은 혼잣말까지 주절대며 수표교에 발을 올렸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응?”

소종은 한 발은 수표교에 걸친 채 고개를 두리번댔다. 주위의 풍경이 휘청거리면서 어그러진 듯했다. 소종은 한 발 더 디뎠다. 이번엔 그대로였다. 또한 그토록 시끄럽게 울던 새들이 조용했다. 새들은 나뭇가지에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마치 소종이 다리를 건너나 안 건너나 감시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또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