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대군과 결혼이라니. 난 이 시대에 살아갈 수가 없는데

#1.

영의정 차 가(家)의 저택.

보향은 눈에 불을 켜며 궁에서 나온 나인을 닦달했다.

“다시 말해 보렴. 뭐가 어쨌다고? 정혼녀? 원영대군께서 누굴 안아 말에 태우셨다고?”

보향의 음성은 찢어졌다. 나인은 달달 떨었다. 더없이 앙칼진 모습에 여태껏 보았던 그녀가 맞는지 의심날 지경이었다.

“어서! 뭐 하는 게야!”

나인이 머뭇대자 보향은 다시금 언성을 높였다. 나인은 다시 한번 눈으로 본 바를 소상히 아뢨다.

“…이르게 대군께서 드셨나이다. 대비마마와의 자리를 파하신 뒤 분명 대군께서는 정혼… 녀의 허리를 감싸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에 태우는 모습을 많은 나인들이 목격하였…….”

“그만! 그다음!”

“대군께서 드시자 대비전에선 웃음꽃이 끝이질 않았습니다. 이후 좌찬성 대감까지 들어서니 정혼은 기정사실 되었고요. 꽃피는 청명 즈음 날을 잡는다, 그리 약조를 했다 합니다. 더욱이 대비마마께옵서 정혼녀 되시는 소저가 손수 이바지 조로 만들어 온 찰떡이 그리 곱고 맛났다면서, 대비전 상궁들과 나인들도 소저의 솜씨에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다시금 세세히 아뢴 나인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보향의 낯빛은 좀 전보다 더 얼룩덜룩 난리였다.

“고작 찰떡이라니.”

곱게 색을 칠한 입술이 일그러졌다. 나인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향과 친밀한 시비가 그녀를 대신해 문갑에서 꾸러미 하나를 전달했다. 제법 묵직했다. 나인의 표정은 금세 환해졌다.

“감사합니다. 아씨. 하면 소인은 이만.”

나인이 연신 허리를 숙이자 그제야 보향은 언제 난리를 피웠나 싶게 정색했다.

“오냐, 그래. 앞으로도 종종 알려다오. 그리해준다면 섭섭지 않게 대접할 터이다. 아울러 내가 부부인만 된다면 그 공은 전부 네게 줄 것이니, 명심하렸다.”

“물론이고말고요. 염려 놓으셔요. 소식이 생기는 대로 곧장 방문하겠나이다.”

행여나 꼬투리 잡힐까 싶은 나인은 꾸러미를 품에 감싼 채 재빨리 그곳을 벗어났다. 그렇게 나인이 돌아간 뒤, 보향의 별당에선 요란한 소리가 뒤이었다.

와장창! 쨍그랑! 귀한 면경이 보향의 손짓에 의해 단숨에 깨졌다.

“에구머니. 이 귀한 것을.”

시비는 귀한 것이 깨진 것을 아까워했다. 그러나 보향은 코웃음 남발하며 눈도 깜박하지 않았다.

“그깟! 그나저나 속이 뒤집어져 못 살겠다.”

“그래도 어쩔 겁니까. 대비마마께서 직접 날을 잡아 공표하신다는데요.”

“내가 대비전으로 그리 퍼 날랐건만 그깟 찰떡에 그리 홀라당 넘어갈 수 있단 말이냐?”

“에구, 아씨. 누가 듣겠습니다.”

“들으라지! 대비 덕분에 내 사주가 되돌아왔는데, 파혼녀가 된 내 심정은 누가 알아준다더냐!”

“저, 저기 아씨…….”

보향이 있는 대로 소릴 지르자 깨진 조각을 치우던 시비는 안절부절못했다.

“안 되겠다. 내 열불이 나서 도저히!”

보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다음 벽에 세워진 체경 앞으로 다가가 매무새를 살피기 시작했다.

“영아!”

“예, 아씨.”

“차림이 빈약하구나. 가장 돋보이는 차림으로 꾸며다오.”

“지금요?”

“그래, 지금! 대군 댁으로 가야겠다. 내 눈으로 확인해야만 진정될 듯하니 준비하렴.”

“……예.”

보향의 고집을 익히 알기에 알았다 대답한 시비는 그녀의 의중대로 준비는 하나 영 께름칙했다. 보자면 대군과 연을 맺게 해 달라 조르다시피 대비전에 드나든 것도 보향.

상대에 아랑곳없이 사주단자를 먼저 보낸 쪽도 보향이니 스스로 자초한 결과임에도 그녀는 승복지 못한다. 그녀가 아무리 발악해도 왕실에서 그리 정했다 하니 결과야 뒤집어질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제 상전은 이리저리 날뛰니 시비는 그저 지켜볼 도리밖엔 없는 듯했다.

“뭐하더냐! 어서!”

“예, 예! 준비되었나이다.”

대단한 안하무인, 보향은 대군이 정혼하겠다는 소저를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가마에 올랐다.

원영대군의 저택 성하재.

여전히 가자미눈을 한 채 대군과 마주한 소종은 탁자 앞에 놓인 다과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흠흠. 소종아.”

“부르지 말아요.”

“그게……. 차가 우려진 듯한데.”

대군이 찻주전자를 눈짓하자 소종은 더욱더 벼린 눈빛으로 대군을 보았다.

당신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직접 따르든지요.”

“오냐. 너도 마실 테냐.”

감히 턱짓을 하고 있는 그녀. 엄히 벌해도 될 만큼 무엄한 행동이었으나 대군은 잠자코 손수 차를 따랐다. 물론 소종에게도 잘 따라 내밀었다.

“향이 좋다.”

좋거나 말거나. 대군의 친절한 손짓엔 아랑곳없이 소종은 코 평수까지 넓혔다. 대군의 입술이 꿈틀꿈틀 움직이는 듯했다. 사실 그는 터지려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소종은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대결을 청하듯 강하게 나왔다.

‘저 좀 보시죠.’

기막히고 코 막히나 그 모습이 어찌나 유쾌한지, 그녀의 뒷모습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서재에서, 또 그녀가 노려보는 코앞에서 찻잔을 입으로 가졌다. 그러나 한 모금 채 삼키기도 전에 인상을 팍, 써댔다.

차가 쓰디썼다. 우려진 깊이가 상당한 듯 어찌나 소태 같은지 넘기기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차마 대군 된 입장에서 쓴소린 할 수가 없으니 고작 신음 한 번으로 삼켜야 했다. 그 모양새가 의아한 소종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왜요?”

“맛이.”

대군이 찻잔을 놓으며 신음 섞인 한마디를 하자 맛에 대한 호기심은 누구보다 강한 소종이 그가 따라준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단숨에…….

“이게 뭐야.”

역시나 소종도 미간을 찌푸려야 했다.

“덜 여문 씀바귀를 먹어도 이거보다 낫겠네.”

쓰디쓴 맛은 소금처럼 짠맛도 났다. 소종이 인상을 쓰자 대군은 그릇에 담긴 달달한 유과 한 점을 내밀었다. 소종은 그의 행동에 잠시 행동을 멈췄다.

“뭐죠.”

“입이 쓸 테니 먹어.”

“안 써요.”

“방금 덜 여문 씀바귀보다 쓰다며. 조금만 먹어둬.”

유과를 든 대군의 손짓, 소종은 잠시 그와 그의 손을 보았다. 사내치곤 길고 수려한 손마디였다. 물론 큰 손이라 그의 손끝에 잡힌 유과는 유난히 작아 보였다.

“지금 그걸 입에 넣으라고요?”

“어. 아! 먹기에 큰가?”

그러면서 대군은 소종이 기함할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게 지금…….”

소종은 뜻밖의 행동에 눈과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제 되었네. 먹어.”

대군이 다시 내민 유과. 그것은 정확히 반으로 잘려 있었다. 대군이 직접 입으로 물어뜯은 것이다. 아니, 그의 입속으로 반이 사라졌다 하는 게 옳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