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시린 겨울

20년 전,

‘쾅, 쾅, 쾅……. 쾅, 쾅.’

경복궁과 창덕궁에 사이를 이루고 있는 북촌 어느 집, 인경이 지난지도 한참인데 처절한 판문(板門) 두들기는 소리는 끊일 줄 모른다.

“이 문을 열어라. 열지 못하겠느냐. 나는 가야 한단 말이다. 여기서 이리 지체할 시간이 없다. 어서!”

안에 갇힌 이의 울부짖음이 고요한 어두움을 가르고 사랑채로 흘러 들어간다.

큰 사랑채에서는 희미한 불빛과 함께 그에 비치는 정자관을 쓴 인영(人影)이 어른거린다.

“……대감마님 어찌할까요. 계속 저리 두시면…….”

청지기인 장 서방은 안절부절못하며 주인의 결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책을 넘기던 손이 멈춰졌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방문이 열리고 흰머리 성성한, 그러나 눈빛만은 아직 젊은이 못지않은 중년사내가 밖으로 나왔다.

노론의 수장 어광목이었다. 그는 신을 신고 곧장 광이 있는 뒤채로 향했다.

‘쾅, 쾅, 쾅.’

판문은 두드릴 때마다 큰소리를 내며 제 몸을 움찔하였다. 어광목은 매서운 칼바람처럼 판문을 노려보았다.

“…….”

“문을 열란 말이다. 이놈들아. 내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야. 흑흑…….”

결국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문을 열어라.”

어광목의 말이 떨어지자 장 서방이 얼른 열쇠고리에서 광 열쇠를 찾아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매 안에 있던 이의 움직임이 일시 정지됐다. 눈발이 날리어 광으로 들어갔다.

“……아, 아버님.”

어광목을 아버님이라 부르는 이는 이 집안의 장손, 어담후였다. 이제 막 약관이 지났다. 시리도록 차갑고 밝은 겨울 보름달이 젊고 말쑥한 얼굴을 슬피 내리 비추고 있었다.

“보내 주십시오. 아버님. 제발…….”

어담후는 한 번 던 간절히 제 아비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재갈을 물리고 기둥에 묶어라.”

“아, 아버님. 소자 진정으로 양희 낭자를 은애하옵니다. 읍……. 이거 놔……. 읍……. 이거 놓지……. 읍, 읍.”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졌다.

어광목은 아들의 얼굴을 노려보다 뒤도 안 돌아보고 광을 나가버렸다.

소복, 소복 희미하게 눈이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함박눈이다. 살창으로 흩뿌려져 들어오는 눈송이들이 담후의 옷자락으로 내려와 스며들듯 녹아버렸다.

‘자박, 자박…….’

발소리가 들린다. 작은 발소리는 광 앞에서 머뭇거린다.

“……어찌 그 낭자여야만 했단 말이냐. 어찌.”

담후의 어머니 소씨였다. 요 며칠 그 누구보다 속이 문드러졌을 그녀였다.

“왜 하필 소론 집안의 여식인 게야.”

“…….”

질책하는 말투였지만 그보다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이 더 켰다.

눈이 쌓여 갈수록 어미와 자식의 슬픔도 쌓여갔다.

**

산중의 밤은 너무나 일찍 찾아왔다. 겨울이라 그 밤은 따갑고 쓰리고 아렸다.

시야가 어두워져 앞으로 나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녹다가 얼어붙은 눈이 양희의 발을 가지고 놀았다. 미끄러지는 횟수가 발걸음 수보다 많다.

한 손은 부른 배를 감싸고 또 한 손으로는 나뭇가지를 잡아끌며 앞으로 또 앞으로 가나 양희가 기다리는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 또 눈이 내린다.

양희의 눈가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같이 떠나자 했던 임의 배신, 그와 자신의 사랑인 뱃속의 아기 그리고 이제 아무 곳으로 돌아갈 수 없는 제 처지가 눈처럼 몸에 쌓였다.

눈물은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차갑게 식어 속눈썹에 얼어붙었다. 온종일 눈 덮인 산을 헤매던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악!”

겨울밤의 날카로운 바람이 양희의 등을 세차게 밀었다. 떠밀려진 몸은 속절없이 비탈진 곳을 굴러 내려갔다. 순식간에 아래로 굴려버린 양희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은 제 아픔보다 뱃속에 있는 아기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다.

양희는 안간힘을 써 몸을 일으켰다. 제발 무사하기를. 혹여 굴러 떨어진 충격으로 아기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녀는 정말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윽…… 아앗!”

몸을 일으키던 양희는 배에서 통증이 일자 미간을 찌푸렸다.

안 된다. 아직. 여기선 안 돼. 아가야, 조금만 참아 주렴.

양희는 배를 감싸고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섰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좀 전보다 한층 심해진 통증이 배를 휘어 감았기 때문이었다. 몇 번이고 이를 악물고 일어나려 하였지만 맘대로 되지 않았다.

“안 돼…….”

시간이 흐를수록 몸의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들려 하나 지칠 대로 지친 양희는 눈꺼풀을 서서히 내리고 말았다.

.

.

.

.

아팠다. 배의 통증이 온몸으로 전해져 왔다.

“윽…….”

허나 아픔을 느낀다는 건 정신을 잃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양희는 무거운 눈꺼풀을 올렸다. 환하였다. 눈의 그 하얀 것이 아니라 촛불, 불빛이다. 그제야 제가 산중이 아닌 인가(人家), 방 안에 누워 있음을 깨달은 양희는 눈을 크게 떴다.

“정신이 드십니까?”

여인의 목소리였다. 양희는 돌려지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돌려 보려 하자 상대방이 먼저 얼굴을 쑥 들이민다.

비구니였다. 그럼 여기는 절이란 말인가.

양희는 안심이 되었다. 차가운 얼음바닥인 아닌 따뜻한…….

“윽…….”

순간 큰 통증이 다시 살아났다.

“힘을 주세요. 그래야 아기가 나옵니다.”

또 한 명의 여인네가 양희 아랫도리 쪽에서 말했다. 양희는 이미 해산을 위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나이 지긋한 목소리의 여인은 다리를 벌린 양희 안을 들여다보았다.

“훅…… 윽…….”

허나 아픔을 참으며 힘을 준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잘하고 있었어요. 조금만 더. 조금만…… 아기 머리가 보입니다.”

그 소리에 양희는 이를 악물고 힘을 주었다.

“……으아아앙!”

고통스러운 양희의 신음소리 대신 아기의 울음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달궈진 가위로 탯줄이 잘리고 아기는 양희의 품에 안겼다. 핏기가 채 사라지지 않은 아기 머리를 양희는 조심스레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