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출발'''' “후우…….”' 마치 온 세상의 무거운 짐이란 짐은 몽땅 가슴 위에 내려앉은 듯 답답한 속이 후련해지길 바라며 커다란 숨으로 공기를 한껏 들이 마심과 동시에 눈앞에 놓여 있던 호박색 액체가 담긴 잔을 들어 단숨에 목구멍으로 들이 부었다. 그래도 답답한 속은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음, 그러니 벌써 2년째인가?”' 그는 오후에 있었던 회의에서조차 안건에 집중하지 못한 채 뚫어져라 자료를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바삐 메모하고 의견을 내놓고 또 정리하던 그녀의 옆모습을 흘깃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기가 찼다. ' 회사에서도 소문난 냉혈녀인 그녀의 무엇이 자꾸만 그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인지 그 스스로도 이해가 불가능했다. 처음엔 단순히 그녀의 차디찬 표정과 자로 잰 듯한 행동거지, 발음이 분명한 그녀의 맑은 목소리가 흥미로웠다. ' 특히 그 청명한 목소리는 눈을 감고 들으면 푸른 잔디밭에 누워 높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를 듣고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평화로움을 주었다. 그러나 아주 실망스러운 사실은 눈을 떠서 아무 감정 없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듣는 목소리는 평화로움과는 너무 동떨어진 소리라는 사실이다. ' 냉혈녀라고 불리는 자신의 별명이 공공연하게 떠도는 것을 분명 들었을 텐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걸 보면 타인의 시선에 영향을 받거나, 상처를 입는 소심한 성격은 아닌 듯싶었다. 아무튼 냉혈녀니 어쩌니 하는 무성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끊임없이 데이트를 신청하는 남자들이 줄을 서고 있는 사실은 그에게 묘한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 여자들이 나쁜 남자들에게 끌리듯 남자들도 차고 도도한 그녀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았다. 바로 자신처럼 말이다. ' 우연히 휴게실에서 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하던 마케팅 팀장을 발견한 낮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 영업부에 일이 있어 잠시 내려갔다가 자신의 사무실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길 기다리며 낮은 소리로 허밍을 하고 있던 그의 귀에 웃음기를 머금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외의 소리에 반가움이 앞서 흘깃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별반 표정 없는 눈동자를 한 채 박 팀장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역시나 자신이 느낀 웃음기는 착각이었나 보다. ' “오늘이 더워요? 제 곁에 온다고 하시고? 얼어 죽을지도 모른단 소문이 박 팀장에겐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보죠?”' 한겨울 시베리아 벌판에 부는 바람이 저 어조보다 차가울까 싶은 말투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하는 연수의 말에 박 팀장은 무안함을 웃음으로 슬며시 감싸듯 씩 미소 짓더니 그녀의 어깨를 톡톡 치곤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현준은 그런 박 팀장과 그녀를 등 뒤로 예민하게 느끼며 서 있었다. ' 잠시 후 이젠 익숙하다 못해 가끔 환향이 느껴질 정도로 친근한, 상쾌한 향이 그의 옆에서 느껴졌다. 그는 무심함을 가장한 태도로 흘깃 자신보다 약간 뒤쪽에 서서 엘리베이터의 숫자 판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초연한 그녀의 모습을 보자 불현듯 저 절재 된 감정 선을 흩트려 놓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느껴졌다. ' “난 꽤 더운 걸? 얼어 죽는 것은 좀 곤란할 것 같고 시원하게 정도는 해 주면 좋겠네? 어때? 생각 없어?”' “사생활 침해군요. 아님 예의가 없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