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더 자신감 가져도 돼

‘진정 좀 해. 이런다고 될지는 모르겠지만.’

수인이 했던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렇게 그녀가 안아 주고 난 후, 서운했던 마음이 마법처럼 풀렸다.

마음은 풀렸지만 심장은 계속 두근거렸다.

그 상황이 자꾸 생각나서 일에 집중을 할 수도 없었다.

결국 도운은 퇴근 시간까지 수인만 생각하다가 나와야 했다.

“하, 덥다.”

날씨가 더워진 건지, 제 몸에 열이 오르는 건지 그저 덥기만 했다. 손부채질을 해봐도 열기는 식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이나 사갈까.”

찌뿌둥한 몸을 개운하게 하기 위해 쭉 기지개를 켜고 허리도 좌우로 돌린 그는 근처의 아이스크림 가게로 가볍게 달려갔다.

하숙집 식구들과 같이 먹을 양의 아이스크림을 포장한 도운은 혹여나 아이스크림이 녹을세라 그 길로 택시를 탔다.

얼마쯤 갔을까. 쌩쌩 지나가는 차창의 풍경을 보던 도운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기사님! 저 여기서 내릴게요.”

차를 세우지도 않았는데 카드부터 내미는 손님이 어지간히 급한가 보다 생각한 기사는 얼른 갓길에 정차를 했다.

“감사합니다!”

도운은 카드를 돌려받자마자 택시에서 내려 또 달렸다. 택시가 지나온 길을 그대로 따라 뛰어 도착한 곳은 한 공원이었다.

그곳에서는 두 남녀가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그들의 주위를 에워싸고 구경을 하고 있었으며, 그사이에는 잘 아는 얼굴도 보였다.

도운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가 그녀의 어깨를 턱 잡았다.

“단수인! 여기서 뭐 해?”

“어? 오빠가 왜 여기 있어?”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뛰어오느라 차오른 숨을 골라야 해서 대답하지 못하는 도운 대신 수인이 답했다.

“난 집에 가는데 여기서 공연하길래 보고 있었지. 오빤 퇴근한 거야?”

“어. 택시 타고 가는데 네가 보여서.”

어느 정도 호흡이 안정된 도운은 숙였던 허리를 세웠다. 이제야 기타의 선율이 귀에 들어왔다.

도운의 툭 내뱉은 말에 귀가 빨개짐을 느낀 수인은 괜히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을 했다. 귀가 긴 머리카락에 가려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이것만 듣고 가자.”

수인은 다시 노래하는 남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도운도 별다른 대꾸 없이 진지하게 음악을 감상했다.

한 곡을 더 부르고 공연을 마친 남녀가 떠나자 구경하던 사람들도 자리를 떴다.

“우리도 갈까? 근데 그거 아이스크림이야?”

수인이 도운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보며 물었다.

“아, 깜빡했네. 녹진 않았겠지?”

“더 녹기 전에 빨리 가자.”

“야, 좀만 천천히 가!”

제 팔을 잡고 달리는 그녀를 따라 그의 다리도 달렸다.

오늘 무슨 날인가. 계속 달리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래. 단수인이랑 이도운은 이렇게 지내야지.

수인과의 관계 회복이 마음에 든 도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훈훈함이 둘 사이를 가득 채웠다.

* * *

언제 와도 좋은 주말.

열심히 글을 쓰는 이진의 귀로 맑은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마루 끝에 걸터앉은 도운이 뭔가에 심취한 표정으로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간단한 연주를 마친 그는 감았던 눈을 뜨고 고개를 홱 돌렸다. 그와 눈이 마주친 이진이 화들짝 놀랐다.

“글은 잘 쓰고 있어요?”

“어? 어. 연주 좋다, 야.”

괜스레 멋쩍어진 이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다시 자세를 고쳐 앉고 글을 쓰려는데 도운이 그녀의 방문 가까이 와서 앉아 말을 걸었다.

“누나, 누나는 진짜로 작가가 꿈인 거 맞죠?”

그럼 꿈을 진짜로 말하지 가짜로 말하겠나.

갑자기 이런 걸 왜 묻는지 궁금했지만 이진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응.”

“저는 음악을 하는 게 꿈인데요, 저번에 저 버스킹 하는 거 봤으면 알겠지만 제가 기타를 연주하고 노래를 했을 때 사람들이 반응해 주는 게 좋아요. 그런 거에서 희열을 느낀다고 해야 하나?”

확실히 도운의 버스킹 때의 모습은 행복해 보였다. 관객들과 음악으로 소통하는 것도 보기 좋았고,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행복함을 느끼면서 하는 일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진은 그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었다.

“기타는 대학생 때부터 독학으로 연습했어요. 원래 전공이 조리학과라 일은 레스토랑에서 시작하긴 했지만요. 이건 제 입으로 말하기 좀 그런데, 지금은 제가 기타를 좀 치는 편이거든요. 처음엔 코드 익히는 데만 몇 달 걸리니까 때려치울까 생각도 했었어요. 손가락에 물집도 잡혀서 너무 아팠거든요.”

“…….”

“그래도 기타 치는 게 재밌었어요. 간단한 코드 익혀서 쉬운 곡 치게 됐을 때는 나 자신이 정말 자랑스러웠어요. 뭐, 쉬운 곡 하나 쳤다고 자랑스럽기까지 하냐는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 저는 그랬어요. 그 후론 어려운 코드까지 손가락에 굳은살 박일 정도로 연습했죠. 그 덕에 지금 이렇게까지 치게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

“아, 너무 내 얘기만 했나? 하하. 재미없죠?”

“아니야. 계속해도 돼.”

제 말을 묵묵히 들어 주는 이진에게 도운은 엷게 미소 지었다.

이진보다 더 오래 알고 지낸 식구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들이 그녀 앞에서는 봇물 터지듯 술술 내뱉어졌다. 너무 심각한 얘기는 아니라서, 이번엔 그녀도 질문을 하면서 들을 수 있게 물었다.

“제가 버스킹을 언제부터 했는지 아세요?”

“언제부터 했는데?”

“레스토랑 야유회에서 연주를 몇 곡 한 적이 있어요. 그때가 기타 배운 지 6개월쯤 됐을 때였는데, 어느 정도 곡들은 칠 수 있었거든요. 그날 제 연주를 듣는 셰프님들, 직원들이 환호를 해주고 앙코르를 요청하는 걸 보면서 오만 가지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때를 회상하는지 도운의 얼굴에 기분 좋은 웃음이 번졌다.

“아, 나는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음악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걸 좋아하는구나. 이걸 그때 깨달아서 그 후로 버스킹을 처음 나갔어요.”

“그랬구나. 떨리진 않았어?”

“어후, 말도 마세요. 엄청 떨렸죠. 사람들 한 명도 안 오는 거 아닌가, 나 혼자 연주하고 노래만 하다 돌아가는 거 아닌가 걱정 많이 했어요.”

“그 걱정이 무색했을 것 같은데?”

“네. 다행히 형들이랑 수인이가 와줘서 고마웠어요. 제가 연주하고 노래하는 동안 사람들이 한둘씩 몰려들더라구요. 다 끝나고 나서는 멋있다, 잘했다 하면서 손뼉 쳐 주는데 그때의 감동을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혼자서 해냈던 그 순간, 자신의 힘이 되어 준 사람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그 사람들이 제게는 고마운 존재였다.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이도운도 없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