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불타오르는 청춘답게 뜨거울 수밖에 없는 대학생들의 사랑이 봄의 기운을 받아 스멀스멀 꿈틀거린다. 지극히 이성적일 것만 같은 의대생들도 사랑 앞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의대생이기 전에 짐승의 본능이 가장 강한 때인 캠퍼스의 남자, 의대생들! 그들은 주로 동아리를 통해 그들의 짝을 찾곤 했다. 새 학기가 되면 으레 새내기 회원들 에게 관심이 집중되었다. 의료 봉사 동아리에도 이제 막 수줍게 피어오르는 꽃봉오리처럼 어여쁜 회원들이 여럿 들어왔다. 그중 수경은 두드러지게 뭇 남학생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꽃분홍 모자를 쓰고 나타난 수경이 수줍게 인사하는 모습에 의료 봉사 동아리 남학생들은 모두 심장 마비에 걸릴 지경이다. 희고 불그스레한 얼굴에 비단결 같은 갈색 머리는 마치 폭포수가 흘러내리듯 길게 내려뜨렸고, 몸매가 드러나는 딱 달라붙은 니트 원피스는 모자 색깔과 깔맞춤을 해 귀여움을 더했다. 그 모습은 마치 화사한 꽃봉오리가 살포시 개화를 시작하며 수줍게 얼굴을 내밀고 세상과 인사를 나누는 것처럼 황홀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의대생이 아닌 간호학과 학생이라는 점에서 모두들 놀랐다. 동아리 회원 대부분이 남녀 구분 없이 대다수가 의대생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원들의 박수를 가장 많이 받았다. 수경은 새내기 회원답게 솔선수범하며 궂은일들을 자처했다. 어릴 적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들이지만, 봉사는 그녀에게 그 어떤 것보다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기에 마다하지 않았다. 수경이 간호학과를 선택한 이유도 그녀가 어린 시절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을 때, 정성껏 간호해 준 간호사 언니의 사랑 때문이었다.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아버지를 둔 부잣집 외동딸로서, 남부럽지 않게 자란 수경은 어렵게 건강을 되찾으며, 살아가는 동안 나누는 삶을 살고자 결심했다. 그러나 어릴 적 품은 꿈을 현실화하기에는 경영학을 전공해 아버지의 사업을 전수받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반대로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수경은 고집이 세고, 한 번 한다면 꼭 하고야 마는 성격인지라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간호학과에 입학했다. 입학 후, 첫 의료 봉사 단체에 들어와 자신의 의지대로 꿈을 펼쳤다. 의료 봉사 동아리에는 눈부실 만큼 빛나는 두 남자가 있었다. 동아리 회장, 조용! 동아리 총무 서도윤! 수경의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은 남자들이다. 수경의 마음만 두 남자에게 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두 남자 역시, 수경에게 한눈에 반해 쿵쾅거리는 마음을 소리 없이 진정시키느라 애먹었다. 두 남자가 수경을 사랑하는 방법은 달랐다. 가정 형편이 녹록치 못한 동아리 회장 조용에게 연애는 사치였다. 사랑은 타이밍이라는데, 사랑은 쟁취하는 거라는데……. 조용도 물론 다 잘 안다. 하지만, 조용은 용기를 내지 못했다. 차마 사랑한다고 말도 못 하고, 상상만 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라서 수경과의 사랑을 상상 속으로만 데려갔다. 텔레파시가 통한 걸까? 수경은 조용의 눈빛에서 사랑을 읽어 낸다. 가급적 그의 행동반경에서 벗어나지 않고 도우려 노력했다. 이와 반대로 도윤은 가슴앓이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크게 고민하지 않는 스타일로, 자신이 좋으면 갖은 방법을 동원해 자신을 어필한다. 기회가 닿는 대로 애정 표현도 과감하다. 누가 보아도 항상 자신감 넘치고, 소유욕이 강한 도윤은 수경 이외에는 그 누구도 눈에 넣지 않는 직진남이다. 도윤의 박력에 수경의 마음이 살짝 열리는가 싶었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더니, 수경은 두 사랑 앞에 자신도 결정 장애가 있음을 처음으로 발견한다. 사랑은 변한다는데…… 사랑, 참! 어렵다.

#1. 두 남자

연합 의료 봉사 동아리 단체에 신입 회원들이 몇 명 들어왔다. 그중 한참 후배라며 고개를 90도로 꺾어 인사하는 수경을 보고, 그 누구 하나 반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특히, 가장 선배인 조용과 서도윤은 그 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녀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빛이 너무 눈부셔 눈이 멀 정도였다. 모든 자원봉사자들이 신입 회원들을 열렬히 박수로 환영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살짝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덧니가 살짝 보이는 수경의 웃음은 영락없이 수줍은 스무 살 소녀였다. 봉사 동아리 회장인 조용은 정신을 차리고, 환영사를 간단히 말했다. 이윽고, 총무인 도윤도 동아리 연중행사 계획을 공지하고 파이팅을 외쳤다. 대부분이 공부하기 바쁜 의대생과 간호학과 학생들이지만, 뒤풀이까지 이어지는 날이 딱 세 번 있다. 바로 신입 회원 환영식과, 의료 봉사 나가는 상반기, 하반기의 마지막 날들이다. 관행대로 회원들의 신고식이 끝나고, 대학가 근처에 합리적인 가격에 차별화된 맛과 다양한 요리를 즐길 수 있는 퓨전 레스토랑으로 갔다. 이곳은 대학가의 특성에 맞게 음식과 술, 차까지 저렴한 가격에 한곳에서 모두 즐길 수 있는 가성비가 좋은 곳이었다.

“여기 처음이지?”

“네.”

조용의 물음에 수경은 바짝 군기가 들어 대답했다.

“오늘은 특별히 스페셜이야. 많이들 먹어. 술들은 마실 줄 아나? 우리 동아리는 술은 필수, 안주는 선택이거든.”

붙임성 좋은 도윤은 얼른 두 사람의 말에 끼어들며 말했다. 신입 회원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 교환을 하고 웃었다. 모두가 유머러스한 도윤에게 호감을 표했다. 음식은 먼저 스테이크와 함께 와인이 나왔다. 동아리 회원 중 금수저 한 명이 다 쏘겠다고 선언을 하고, 직접 메뉴를 예약했다는데, 그게 바로 도윤이었다. 음식은 계속해 코스로 나왔고, 값비싼 와인도 계속 병이 바뀌었다.

“아, 이제 와인 말고 맥주로 바꿔 주세요.”

조용은 새 와인 병을 들고 오는 웨이터에게 말했다.

“선배, 괜찮아요. 그냥 와인으로 쭉 가요. 얼마 차이 난다고…….”

조용을 저지시키고 다시 와인 병을 받아 든 건 도윤이었다. 도윤과 용은 같은 학교 의대생이기도 하지만, 같은 고향에 고등학교 선후배이기도 했다. 중소 도시인 두 사람의 고향에 산업단지가 들어서는 바람에 과수원을 하던 도윤의 부모님은 어마어마한 보상을 받아 건물들을 사들였다. 임대업으로 부유한 생활을 하며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도윤의 집과는 달리, 동아리 회장 조용은 시골에서 빚 없이 겨우 밥이나 먹고사는 평범한 부모님인지라, 의대 뒷바라지가 힘겨웠다. 덕택에 조용은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등학생 과외를 하며 공부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항상 절약이 몸에 배어 있었다. 흥청망청 써대는 꼴은 더더욱 못 보았다. 자격지심일까? 도윤의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다. 사실은 그보다 더, 도윤이 수경에게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인 행동을 하는 데서 더 화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