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치현 그의 정체는

최종 간택에 오른 부영은 내일부터 나흘간 사가로 돌아갔다가 다시 들게 된다.

그녀가 최종 간택에 합류했단 소식에 남 상궁은 제 일처럼 기뻐했으며 나인 소이는 울먹이기까지 했다. 또한 그네들은 최종 심사 동안에도 그녀를 보필하게 되었다.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챙기며 부영은 답답한 속내를 다스리지 못한 채 연신 들숨 날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좋아.”

최종 간택에 들 것을 상상도 못 했던 자신. 그렇기에 앞일을 내다보기가 두려웠다. 더욱이 그를, 치현을 어찌 볼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직분이라도 알아 둘 것을.”

어떻게 그와 연락하지. 새삼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이 떠올랐다. 짐을 챙기던 부영은 그가 남기고 간 단도를 손에 쥐었다. 언제 보아도 세밀한 세공이었다. 그것을 가만히 손끝으로 매만졌다.

“치현.”

나 어쩌나요. 어째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어.

부영은 멍하니 단도만 만지작댔다. 그러다 손끝이 따끔했다. 손을 들어 확인해 보았다.

“피 나네.”

놀라지도 않는 단조로운 눈빛이었다. 단도를 쓸어내던 손끝이 갈라지며 피가 비친다. 안 그래도 보기 흉한 상처투성이 손에 핏물까지 배어나니 이제 웃음이 났다. 그녀는 자연스레 피맺힌 손끝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인지. 뒤로부터 불쑥 손 하나가 내밀어졌다.

“하지 마.”

언제 어느 때 들었는지 알 턱이 없는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고 있었다. 더는 놀라기도 지쳤다. 부영은 힘없이 미소 지었다.

“어떻게 왔어요.”

“그냥 왔지.”

“그렇구나…….”

부영은 고개를 휘었다. 그리고 그를 확인했다. 분명하게도 눈앞에 있었다. 여전한 모습으로, 또 한결같이 다사로운 눈빛으로. 그에게 할 말은 많았다. 그러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야박하게 굴었다.

“그래도 이렇게 오면 어찌해.”

“그럼 가?”

“가라고 하면 가요?”

“가라면 가야지.”

“그럼 오라면요.”

“오라면 와야지, 당연히.”

그의 뻔뻔한 반응에 못내 웃음이 났다. 실 없단 의미였다. 그럼에도 부영은 앞뒤 재지 않았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바람을 희망을 고백했다.

“내가 안아 달라면요.”

“…안아야지. 이렇게.”

이도왕 치현은 부영의 손목을 잡아끈 채 제 품으로 이끌었다. 부영은 나비처럼 그의 품으로 안착했다. 그의 두 팔이 그녀의 등과 허리를 보듬고 부영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둘은 미동도 없었다. 그저 안고 안으며 서로를 느낄 뿐이었다.

가만히 기댄 부영은 그의 심장이 거세게 박동하는 것을 느꼈다. 포근했고 안락했다. 오늘 힘든 모든 일들이 그의 심장 소리에 발맞춰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왕의 허리를 끌어안는 부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도왕 역시 더없는 손길로 그녀를 부드럽게 품에 안아 들었다.

달이 환한 빛을 내보이며 언제까지라도 움직일 생각을 않는 두 사람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

이원당.

우찬성 김휴한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못마땅함을 숨기지 않는 김휴한과는 달리 지설은 여유만만이었다. 또한 둘에게선 이상한 기운이 스멀댔다.

“그게 될 법이나 한 소린 게야! 회임이 그리 쉬운 게 아니라 했거늘.”

“대감. 언성 좀 낮추시지요. 이번엔 분명 회임이라니까요. 그건 그렇고 간택이 막바지라지요?”

“대왕대비가 미는 후보와 대비가 미는 후보가 막상막하라 누가 왕후가 될지 좀체…….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게 되었단 소문이 자자해. 거기에다 복병이 당하관 상선 대감의 양녀…….”

“대감, 그만. 알게 뭔가요.”

김휴한이 찢어진 눈빛으로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자 지설은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웃을 일이 아니지. 자네가 그리 앞서가지만 않았어도 왕후 될 집안과 막후 협상을 맺을 수도 있었잖은가!”

“그게 무슨 소용이라고요. 예까지 와서 배포를 넓게 가지셔야지요. 그깟 최종 후보가 누가 되든, 윗전에서 누굴 밀었든 또 누가 왕후가 되건 달라질 건 없지 않겠어요?”

“지설! 그렇게 쉽게 되지 않는다니까.”

“대감! 지설이라니요? 엄연히 첩지 있는 몸이올시다!”

이름이 불리자 언성까지 높이는 그녀의 도도함에 우찬성 김휴한은 입을 다물었다.

“거참…….”

“더욱이 이 몸은 한 단계 높은 첩지를 받겠지요. 물론 왕후가 되지 못하나 앞으로 대감보다 이 몸이 더 급이 높음을 잊지 마시라고요.”

지설은 거침없이 일침했다. 우찬성 김휴한의 눈빛엔 지설을 향한 애증이 떠올랐다. 한낱 기생에게 일생일대의 기회를 주었더니만 이젠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 한다. 더욱이 아직은 쓸모가 있는 그녀였다.

“분명 회임했을 겁니다. 느껴져요, 충분히.”

눈이 풀린 채 한껏 미래를 꿈꾸는 지설은 며칠 전 왕과의 교합에 있어 뜨거웠던 몸이 좀체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다시 왕의 든든한 육신을 느끼고 싶었다. 그렇기에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제 몸을 손으로 훑었다. 그 모습은 사내의 음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역시나 김휴한의 눈빛에 음심이 서렸다, 사실 그는 그녀가 직첩을 받기 전과 후에도 몇 번 관계를 가졌었다. 원체 애욕이 넘쳐흐르는 그녀인지라 주체하지 못할 욕정으로 인해 왕의 여자임을 잊고서 몸을 섞은 적이 여러 번인 것이다. 먹고 먹히는 사슬 관계를 애써 풀 필요 없는 김휴한이기에 지설은 거슴츠레한 눈빛으로 혀를 날름댔다.

“그날 더한 육신이셨지요, 폐하께오선. 강직도가 그만이라, 어디 대감의 몸도 그러한지 하아……. 또 이리 날뛰네… 대감…….”

괜히 요기를 살살 흘렸다. 역시나 그의 격앙된 눈빛이 심상치 않더니만 벌떡 일어나 참을 수 없는 열기를 쏟아부으며 어느새 그녀의 옷가지를 반쯤 벌렸다. 물론 그의 하의도 한껏 내려가 있었다. 지설은 괜한 앙탈을 부렸다.

“이러지 마시어요. 태에 주군의 아기씨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실수라도 하면 어찌하시려고요. 만에 하나라도 들통 나는 날이면 둘 다 목이 성치 않을 겁니다. 참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