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외관은 그대로였지만 1층 거실을 포함한 식당과 부엌의 인테리어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집 안을 떠도는 공기만큼은 5년 전 그대로인 것 같아 하진은 안도했다. 5년 전 하진과 명후가 외롭게 자리를 채웠던 식탁은 그 크기가 더욱 커졌고 다섯 사람이 앉아 있다 보니 묘한 충만함이 흐르고 있었다. '석훈은 식탁의 상석에, 하진은 명후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이들은 그와 마주본 채 나란히 앉아서 서툰 젓가락질과 숟가락질을 했다. 밥과 반찬들을 난도질하더니 죄다 흘리기도 했다. 흘린 음식들을 손으로 주워 먹으며 눈치까지 살피며 하진을 응시했다. 하진은 아이들에게 밥을 떠먹여 주려다 석훈이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손을 멈추고 말았다. '밥을 먹던 도중, 아이들은 의자 할아버지와 명후의 관계에 대해 질문했다. 아빠의 아빠, 그래서 할아버지. 그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잘생긴 아빠에 근사한 할아버지까지 생겼다며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식탁에 앉은 사람은 고작 다섯이었고 그중 둘은 꼬마였지만 열 사람은 먹어도 남을 만큼의 만찬이 차려져 있었다. 하진으로선 이 음식을 차려준 천안댁과 그녀를 도와준 보조 도우미를 보며 저절로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음식은 맛이 있었지만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 지 코로 들어가는 지도 알 수 없었다. '“좀 많이 먹어.” '명후는 깨작거리는 그녀를 보며 한 번씩 옆구리를 찔러 댔다. '밥그릇이 반쯤 비워갈 즈음이었다. 문득 상석에 앉아 있던 석훈이 쌍둥이들을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다 말했다. '“미국 생활 정리하고 이 집에 완전히 들어올 거다.” '명후 역시 예상은 했지만 허를 찔린 표정이었다. '“아버지. 하진이 불편해하잖아요.” '하진 역시 떨떠름하긴 마찬가지였다. 아이들 때문에 들어오긴 했지만 심지어 어떤 방에서 어떻게 지낼지에서부터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전혀 상상도 못했다. 명후도 그녀를 데려오는 데만 급급해 그 이상은 생각한 것 같지 않았으니 막막하긴 했다. '석훈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 업계는 소문이 빨리 나는 곳이다. 책잡힐 거라면 빨리 정리하는 게 낫겠지. 애들 호적이 하진이 밑으로 들어가 있으니 그거 빨리 정리해야 할 거다. 사람들 입방아 오르기 전에 단속하는 것 잊지 말고.”'호적 정리를 한다는 것. 쌍둥이를 명후의 아래에 올리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자신은? 하진은 고개만 끄덕이는 명후를 응시했다. '“너무, 서두르는 게 아닐까요? 아직 시간적 여유는 있으니까.” '“명후 아래로 넣고 싶지 않은 게냐? 그럼 정리해서 쌍둥이들 내 밑으로 넣는 건 어떨까?”'“아버지! 제 딸이에요! 당연히 제 호적에 가야죠!” '“혹시라도 싫다고 하면, 쌍둥이들은 내 호적에라도 넣어야 하지 않겠니?” '명후는 발끈했고 하진은 실제로 석훈이 그러고도 남을 거라는 걸 알았다. 일단 말이 나오면 끝까지 해대는 성격들이었으니까. 서 여사도 그랬다. 석훈은 무슨 소린지 갸웃거리는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휠체어를 이동해 아이들의 뺨에 묻은 밥풀을 떼어 주었다.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아이들이 식탁에 앉아 배꼽인사를 하는 모습에 석훈의 미소가 더 크게 번졌다. '“애들 방은 1층에 있는 게 좋겠더구나.” '“아버지.” '반박하려던 명후는 이어진 석훈의 말에 입을 닫았다. '“아이들의 방을 크게 하나로 틀 거라 하진이 네가 쓸 만한 방이 없을 것 같더구나. 2층 손님방이 채광이 좋으니 거기 머무는 게 좋겠다.” '명후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러죠. 뭐.” '뭔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무언가가 명후의 눈가에 장난스럽게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나, 오후에 회사 나가 봐야 하는데 괜찮겠어?” '하진 역시 명후가 자신과 아이들 덕분에 요 며칠 지나치게 시간을 할애한 것이 신경 쓰였다. 잠을 제대로 자기나 한 걸까? '그것보다 명후는 아이들과 하진을 석훈과 함께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하진은 석훈을 돌아보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물러날 수는 없잖아. 일단 들어오기로 한 것이라면 있어야 했다. 명후의 곁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어떻게 될 것인지 아직 알 수 없지만. '“난 괜찮아, 아저씨가 불편할까 봐 걱정이지.” '그 말을 하고 나니 정말로 괜찮아졌다. 비관적인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석훈은 그녀에게 있어서 생명의 은인이었고 불편한 관계였지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어차피 만나야 할 사람이었다. 명후와 함께 있기 위해서라면. '하진에게 불편했던 식사는 오래되지 않아 끝났다. 아이들은 배가 빵빵해졌고 집 안을 돌아보겠다며 벌써부터 야단이었다. '명후는 회사에서 계속 걸려온 전화를 받고 2층에서 옷을 갈아입고 급하게 회사로 나가야 했다. 석훈과 그녀가 집 안에 남아 있는 것이 걱정스러웠지만 그는 어차피 출근을 해야 했다. 하진은 석훈이 무슨 말을 할까 마음을 졸이고 있었지만 아이들이 너른 1층의 거실을 마구 뛰어다니는 탓에 말을 걸기도 힘들었다. 일단 아이들과 자신의 짐을 들여놓고 있노라니 배가 부르고 운동까지 한 아이들이 이젠 소파에 앉아서 졸아 대고 있었다. '석훈은 잠시 정원으로 나간 차였기에 하진은 아이들을 재울 손님방을 찾아 1층의 방들을 열어 보았다. 5년간 어떤 변화가 있었던 탓인지는 몰라도 방마다 먼지만 잔뜩 쌓여 있고 침대나 가구들은 없었다. 하진이 쓰던 부엌의 옆방 역시 몇 개의 박스만이 쌓여 있을 뿐이었기에 일단 1층 안방으로 아이들을 데려가 뉘였다. 석훈은 이 방을 자신의 공간으로 개조한다고는 했지만 손도 대지 않은 탓에 서 여사의 취향이 그대로 안방에 베어 들어 있었다. 좌식공간이라 휠체어를 탄 석훈이 쓰려면 탁자와 침대가 필요해 보였다. 천안댁은 하진을 따라와 아이들을 같이 뉘여 주었다. '“반갑다는 인사도 못해서 미안해요, 아주머니.” '하진이 이 집에 올 때만 해도 제법 젊었던 천안댁은 이제 노년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잘 왔어. 나갈 때 무슨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애들을 둘씩이나 데리고 돌아올 줄은 더욱 몰랐고. 힘들었겠구먼.” '하진은 말없이 웃었다. '“그런데 손님방들 어떻게 된 거예요? 예전엔 기본적인 침대나 가구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명후 도련님 그 성격에 가만히 있었겠어? 하진이 너 나가고 죄다 부쉈지. 아예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고. 2층도 초토화된 건 마찬가지여서 도련님 방에 있었던 그 커다란 그림도 갈기갈기 찢어놨더라고. 그래도 하진이 네가 좋아한 산사나무는 뽑지 않더라고. 하여간 성격도.” '하진은 웃으며 대꾸했다. '“쌍둥이들 명후 성격 그대로 빼어 닮았어요.” '천안댁의 시선이 더 동정으로 변했다. 하지만 천안댁 역시 하진이 돌아와 안도하고 기뻐하는 기색이 어려 있었다. '아이들을 제대로 뉘여 주었다. 천안댁 역시 처음 보는 쌍둥이들이 워낙 예뻐서인지 눈을 떼지 못했다. 아이들은 한번 잠들면 좀처럼 일어나지 않기에 두세 시간은 쭉 잘 것 같았다. '1층 안방을 나서자 그 앞을, 석훈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좀 어떠냐.” '“어젯밤부터 아빠 집에 간다고 기뻐서 잠을 설쳤어요. 지금은 곯아떨어졌고요.” '석훈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천안댁, 커피 한잔씩 줘요.” '천안댁이 물러갔다. 하진은 1층의, 볕이 잘 드는 거실에서 석훈과 함께 있었다. 정원은 공사 중이라 시끄러웠지만 집 안까지 시끄러운 소음이 전달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석훈에게 어떤 말을 시작해야 할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하진은 알 수 없었다. '혼내거나 욕을 하거나. 모두 자신이 감수해야 할 몫이었지만 어깨가 마냥 무겁기만 했다. '커피를 마셔갈 즈음. 석훈의 어깨는 하진이 기억하던 것보다 더 왜소하고 말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석훈도 늙은 것이다. '“나, 너 아직 용서한 거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진은 고개를 숙였다. 석훈이 아이들을 좋아하긴 했지만 하진은 아니었다. 쫓겨나거나 또 언제 나가게 될지도 모른다 여겼었다. '“아이들은 예쁘게 컸더구나.” '“예쁘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말썽이 많은 애들이라 다루기가 쉽지 않아요. 저나 아이들과 함께 있는 쪽이 불편하실 겁니다. 명후만 괜찮다면 저나 아이들은 다른 곳에서 살고 싶어요.” '“내가 불편한 게냐? 내가 나가길 원하는 게냐?” '하진은 언성이 높아지려는 석훈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저 보기 불편하시잖아요. 저 아이들 때문에 들어오긴 했지만 합치는 것이 잘하는 짓인지 어쩐 건지 확신이 서질 않아요. 아저씨도 저 보기 불편하실 테니까 서로 매일 보며 마주치는 것보다야…….” '석훈은 한숨을 쉬었다. '“애들 아직 어리다. 난 애들한테서 엄마 뺏을 생각도 없다. 게다가 애들 잃어버릴 뻔했다면서? 지금 너랑 아이들이 이 집밖을 나간다 해도 조용하진 않을 게다. 방운의 최 회장이 명후라면 이를 갈고 있으니 애들 내보내는 것도 위험해.” '위험. 그 단어에 하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상황을 만들게 되서 죄송합니다. 의도한 것도 아니었고 변명을 하려는 것도 아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방운도 문제고 적을 사방에 만들어놓은 명후 놈이 더 문제지. 게다가 방운의 최 회장 따위에게 내 아들을 사위로 주느니 차라리 네가 나을 지경이다. 하지만 널 절대로 허락한 건 아니다.” '“알고 있어요. 아이들 때문이라는 거.” '하진이 너무 쉽게 동의하자 외려 석훈이 불편한 인상이었다. '“굳이, 애들 때문만은 아니다. 이 나이쯤 먹고 나면 소중한 게 무엇인지 알 게 되는 법이지. 지금 이 상황에서 굳이 널 반대해 봤자 뭐가 남겠느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송 기사 납골당에 갔었느냐?” '석훈이 하진의 아버지에 대해 언급한 것은 나이를 먹은 뒤 거의 처음이었다. 하진은 무언가에 홀린 듯 석훈을 응시했다. '실제 납골당의 위치는 잘 알고 있었지만 제 날짜에 제사를 챙기거나 자주 방문하지는 못했다. 그날은 명후의 모친이 사망한 날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석훈이 창을 내다보며 말했다. '“아내 제사 모신 절에 네 아비 제사도 위탁해 두었었다. 아마 지금도 올리고 있을 테니 한번 시간이 되면 가자꾸나. 애들도 데리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진은 석훈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너한테 화를 내는 게 아니었다. 몸이 이렇게 되고 나서 몇 년간은 살고 싶지 않았다. 미워할 상대가 필요했던 게야. 그때 내 아들 곁에는 네가 있었지.” '담담하게 말하는 석훈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었다. '“27년 전의 그때의 일. 네 아비의 탓도 너 때문도 아니다. 그냥, 사고였을 뿐이다. 게다가 이젠, 너와 나는 가족이 될 테니까.” '나쁘지 않았다. 아니, 눈물이 날 만큼 좋았다. '석훈은 자존심이 강해서 절대 미안하다고도 사과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족했다. '“감사해요.” '그냥, 하진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마음속의 응어리가 흐물흐물 천천하게 녹아내린다. '하진은 커다란 창문 너머로 보이는 높고 새파란 가을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산사나무의 열매들이 무척이나 유혹적으로 보였다. '그냥, 아무 일도 아닌데 울음이 나왔다. 그냥 그렇게 울고 싶은 날이 있다. '눈물을 훔치며 하진은 말했다. '“올해에는 산사주를 잔뜩 담가야겠어요.” '이제야 돌아왔다. 산사나무,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나무는 바람에 춤을 추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