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은 많이 놀랐다. 처음에는 누가 들어오는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강단 쪽으로 내려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반갑지 않은 방해자라 되도록이면 안 들키고 싶었다. 그래서 의자에 몸을 더 묻으며 낮추다가 슬쩍 돌아본 순간 심장이 떨어질 만큼 놀라고 말았다.'최경훈, 그가 왜?'너무 놀라 잠시 그렇게 앉아 있다가 그가 가까이 다가오는 걸 보고서야 비로소 몸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보고 놀라지도 않았다. 마치, 그녀가 여기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그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그녀가 서 있는 계단 끝에서 멈추었다.'“혼자서 뭐 해?”'선배는요? 여기 왜 있는 거예요?'지원은 입 밖으로 내지도 않을 질문들을 목 안으로 억지로 삼켰다.'“계속 혼자 있고 싶어?”'네…… 아니요.'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알 수 없는 상실감과 무력감, 슬픔, 안타까움, 이 모든 감정을 속으로 삼키고 무디게 마모시켜 마침내는 사라질 때까지 혼자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보는 순간 이 강당의 어둠만큼이나 진한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혼자 있을 때는 정작 느끼지도 못했던 외로움이 최경훈을 보는 순간 그녀를 덮쳐 버렸다.'함께 있고 싶다. 그가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인마, 괜찮아. 다 그런 거야.’라고 하는 말을 듣고 싶었다. 위로하듯 어깨를 감싸 주고 ‘그러면서 크는 거다, 자식아.’ 하며 허물없이 하는 그의 행동들이 그리웠다.'하지만 지원은 그에게 같이 있어 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외과의사는.”'지원은 어느새 익숙해진 침묵을 가르고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나직하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작은 강당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환자를 대할 때 연민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하지만 환자의 울음소리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고대 로마시대 의학자의 말이야. 사람들은, 인간이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아. 하지만 의사는 완벽해야 한다고 믿지. 그래야 자신들의 목숨을 맡길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의사도 인간이야. 환자의 울음소리에 초연할 수는 있어도 죽음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의사는 없어. 우리도 인간이니까.”'그는 안다, 그녀가 왜 혼자 있고픈지. 강은아 씨의 죽음이 그녀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는 아는 것이다.'지원은 그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기적을 바랐어요.”'조용한 목소리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선배처럼 저도 기적을 바랐어요. 그런 기적을 보고 싶었어요. 아직 삶을 마감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사람이어서…… 눈을 감는 그 얼굴이 너무나…… 외로워 보여서…… 기적이 일어나길 바랐어요. 내가 그 기적을 만들어 주고 싶었어요.”'목이 메었다. 가망이 없는 환자였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기적을 보았던 그의 손끝에서 기적이 일어나 아까운 생명이 다시 불꽃을 피우기를 간절히 바랐었다.'지원은 목 언저리에 꽉 막힌 뭔가를 꿀꺽 삼켰다. 눈을 치뜨고 맺힌 물기를 말리려고 애썼다.'뚜벅.'한 걸음, 그가 다가온다. 지원은 또 목을 꽉 누르는 뭔가를 다시 삼켰다.'뚜벅, 뚜벅.'자꾸만 그가 다가온다. 그럴수록 그녀의 목은 더 깊이 잠겨들고 눈가의 열기도 짙어졌다.'부드러운 손길 하나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지원은 슬쩍 몸을 틀었다. 하지만 끈질긴 손은 또다시 어깨를 감쌌다. 슬며시 당기는 힘이 느껴진다. 지원의 몸은 힘없이 그가 당기는 쪽으로 기울었다. 떨치지 못할 만큼 강한 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따뜻함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건 추운 겨울날 칼바람 속에서 느껴지는 유일한 온기였다.'지원은 머리를 그의 가슴팍에 기댔다. 아니 조금, 아주 조금 닿았던 것뿐이다. 누군가에게 기대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어서 그녀의 머리는 아주 조금 그에게 닿아 있을 뿐이었다.'“기적은 일어났었어.”'머리 위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울렸다.'“의학적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어. 그 환자는 오늘까지 견딘 것 자체가 기적이었어. 그 기적 같은 시간들이 그녀에게는 축복이었을 거야. 삶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하기 위한 준비도 하면서 1분을 하루처럼 여기며 살았을 거야. 아마, 모든 준비를 다 끝낸 후였을 거야. 그녀에겐 그게 바로 기적이 아니었을까?”'지원의 머릿속으로 마지막 순간에 마주쳤던 강은아 씨의 눈이 떠올랐다. 그 눈은 삶에 대한 미련이 아니었다. 살려 달라는 간절함도 아니었다. 편안해 보였다. 죽음을 맞을 준비가 된 사람처럼 너무나 초연했다.'기적…… 그래, 어쩌면 퇴원한 그날 이후로 오늘까지 그녀의 남은 시간은 매 순간이 기적이었을지도 모른다.'지원은 가슴을 누르던 뭔가가 뚫리는 것을 느꼈다. 이제야 편안히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순간,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웃음기 실린 목소리가 그녀의 정수리에 내려앉았다.'“많이 아파하고 고민하고 갈등해라. 그렇게 수많은 감정들을 겪으면서 우리는 진정한 의사가 되는 걸 거야. 나도 겪었고 우리 선배들도 겪었겠지. 그러니까 너도 겪는 거야. 이 감정들을 심장에 심고 기억해서 잊지 말자. 선명하게 기억해서 가능하면 이런 감정, 안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공부해서 환자를 살리자. 그게 바로 우리가 이런 과정을 겪는 이유일 테니까.”'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그는 모를 것이다. 그가 ‘우리’라고 해줘서, 그녀 혼자 바보처럼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고 해주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그는 아마 모를 것이다.'내가 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