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고객님 혹시 필요하신 것 있으십니까?”

통로를 가로질러 음료수를 나르던 승무원이 책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남자는 긴 손가락으로 책을 조금 들어 승무원을 확인했다. 여 승무원의 얼굴엔 이미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그는 책 안쪽으로 피식 헛웃음을 터트렸다. 승무원의 분위기로 보아 그와 말을 섞어보지 않고는 절대 자리를 떠나지 않을 기세였다.

그는 책을 내려놓고 흐트러진 황금빛 머릿결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불빛아래 드러난 그의 아름다운 턱 선이 환상적으로 빛났다. 때를 놓칠세라 승무원의 눈이 빠르게 그의 얼굴을 훑기 시작했다.

살짝 내려 뜬 짙은 속눈썹과 그 아래 감춰 진 그의 신비로운 눈동자, 조각 같이 날렵한 콧날만으로도 지켜보는 승무원의 입을 바짝 마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결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황홀해지는 그의 치명적이고 섹시한 입술.

승무원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무엇하나 매력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히나 그의 귀에서 차갑게 빛나고 있는 다이아몬드 귀걸이는 흔들리는 여심을 단번에 쓰러트리고도 남았다. 마치 그의 섹스심벌을 연상시키는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여 승무원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심봤다! 지극히 이기적인 외모의 소유자다. 기내를 돌고 온 동료들이 휴게실에서 난리를 칠 만도 했다.

귀에서 이어폰을 빼낸 그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방해 안 받았으면 좋겠는데.”

매력적인 허스키 보이스다. 승무원은 자신이 할 일도 잊은 채 그를 바라보며 그만 넋을 놓고 말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댄 채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런 다음 살짝 내렸던 눈꺼풀을 끌어올려 아직도 멍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승무원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네? 아, 네. 죄송합니다. 고객님.”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드는 듯 그의 눈빛에 흠칫 놀란 승무원이 황급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방해 말고 꺼지란 소리를 저런 식으로도 할 수 있구나. 그의 차가운 눈빛과 냉담한 반응에 승무원은 부끄러운 듯 급히 자리를 떠났다.

승무원이 사라지자 그는 다시 책으로 얼굴을 가렸다. 뉴욕에서 서울까지 꼬박 13시간을 비행기 안에 갇혀 지내야만 했다. 그는 의자를 조금 젖혀 굳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쌓인 피로를 조금이나마 풀어보려 했다.

“도착하기만 해. 마루 이 자식 넌 죽었어.”

그는 화를 삭이는 듯 깊은 숨을 들이키며 낮은 신음을 삼켰다. 의자 손잡이를 움켜 쥔 손 안에서 뿌득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휴게실로 들어선 승무원은 급히 승객명단을 뒤적였다. 명단을 훑던 그녀의 손끝이 한곳에서 멈칫거렸다. 다른 승무원들이 체크를 하고 난 뒤였는지 이미 그의 이름 위에 형광펜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이루다. 24세. 국적 코리아. 뉴욕 발 한국 행 탑승.

***

서울 명동. 클럽 시크릿.

화려한 조명 아래 서로를 탐닉하는 유혹적인 몸짓이 현란하다. 젊음으로 가득 찬 클럽 안은 그들이 뿜어내는 열기로 이미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눈을 현혹시키는 어지러운 조명 탓에 서로를 육안으로 알아보기는 힘들었다. 상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몸으로 느끼는 것뿐이었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사람은 무대 위의 남자다. 여자들에 둘러 싸여 춤을 추고 있는 그에게선 섹시함을 넘어 관능의 경지가 느껴지기까지 했다. 검게 빛나는 머릿결은 부드럽게 흩날렸고 반쯤 풀어헤친 셔츠 사이로 보이는 식스 팩은 이미 땀에 흠뻑 취해 있었다. 몸에 붙는 날렵한 바지는 최고급 섬유로 만든 듯 미끈하고 유려하게 그의 육체를 감쌌다. 한마디로 여자들에겐 최상의 먹잇감인 셈이다.

“오빠 오늘 나랑 어때?”

그는 등 뒤에서 몸을 비비적거리며 접근해 오는 여자를 향해 빙글 몸을 돌렸다. 덕분에 여자의 몸이 그의 가슴에 안기다시피 기울게 되었다. 몸매는 글래머. 그런대로 볼만하고, 얼굴은 고친 티가 조금 나긴 하지만 하룻밤 상대로 쳐지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풍만한 가슴이 참 착하다.

“가슴이 참 착하네. 아가씨. 몇 살?”

그가 여자의 허리를 팔로 감싸며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아이, 진짜 솔직하다. 그러는 자기는 몇 살?”

빙글 무대 위를 한 바퀴 돌며 그가 다시 속삭였다.

“밤새 뛰어도 거뜬할 나이?”

여자가 킥킥거리며 좋아 죽겠다는 듯 웃었다. 그의 입가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그가 여자의 몸을 뒤로 기울이며 입술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감미롭게 말했다.

“하다 좋아 죽어도 난 모른다.”

벌써 달아오르기 시작한 여자의 거친 숨소리가 그의 입술을 애타게 갈구했다. 그의 입술이 여자의 입술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가 순식간에 떨어져 나왔다.

“무조건 원 나잇. 더는 안 돼. 알지?”

그의 두 번째 키스는 여자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 정도의 깊고 강렬한 딥 키스였다. 그의 입술이 멀어지자 여자는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황홀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에게 흠뻑 취한 여자의 모습에 그는 답례라도 하듯 가벼운 윙크를 날려 보냈다.

“못 참겠다. 자기야. 지금 바로 올라갈래? 내가 잡아놓은 룸 있는데. 그리로 가자.”

‘쩝. 너무 들이대는 여잔 별론데. 그래도 가슴이 착하니까. 그냥 넘어가 줄까?’

부르르.

그때 진동으로 해놓은 핸드폰이 몸부림을 쳐댔다. 무시하자. 여자를 향해 싱긋 살인 미소를 날리며 다시 작업에 들어가려는데 또 다시 핸드폰이 요란스레 몸을 떨어댔다. 예감이 좋지 않다. 그는 이마를 긁적이며 잠시 망설이다. 끊길 줄 모르는 폰 탓에 할 수 없이 여자를 한 손으로 받친 채 폰을 꺼내 들었다.

‘미친놈.’ 액정 위에 떠오른 글자에 그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여자를 빙글 돌려 다시 원위치 시켜놓고 잠시만 기다리라는 손짓을 해보인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물론 주위 소음을 완벽히 차단시켜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 이소 네가 웬일이냐? 이 몸한테 전화를 다 주시고.”

-야! 이 미친 새끼야! 너 죽고 싶어!

그는 핸드폰을 귀에서 멀찍이 밀어내고 귀를 휘적거렸다. 귀청 떨어지겠네.

-너 일 이따위로 할 거야? 헉헉.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야? 빨리 말 안 해?

호흡이 꽤 거친 걸 보니 일이 제대로 터지긴 터진 모양이었다. 그는 핸드폰을 입 가까이 가져간 다음 섹시한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