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천하의 절경이라 불리던 설죽산은 비적의 소굴이 된지 오래였다. 대나무가 많은 설죽산은 눈이 내리면 그 절경이 천하제일이라 했었다. 백은국과 국경이 접해 있는 설죽산은 깎아지른 절벽 사이사이 자라는 오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 아름답다는 절경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끊겨 누구도 제대로 감상해 보지 못했다. 화안국과 백은국을 오가는 가장 가까운 거리이기도 했던 그곳을 이용하지 못하고 산을 돌아 먼 길을 이용해야만 했다. 상인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오가다가 비적에게 당해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허다해 모두가 피하고 멀리하는 길이었다.

최근엔 비적들이 사람을 사고판다는 보고까지 있었다. 설죽산 비적을 소탕해 달라는 상소가 쌓이고 또 쌓이는 것을 보며 그 지역의 관리가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화안국의 황실은 인지하기 시작했다.

전쟁만큼 위험한 출정에 열여섯이 된 화안국의 태자가 함께 하기로 했다. 화안국 황실을 떠나 설죽산에 도착해 군막을 치고 주변을 정탐하고 비적의 소굴을 발견하기까지 달포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비적소굴을 소탕하기 위해 그 곳에 도착했을 때 선은 끔찍하리만큼 잔인한 광경에 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짐승을 가두는 우리도 그것 보다는 깨끗할 듯했다.

지난 나흘 간 비적 산채의 구조 파악을 모두 마치고 야심한 시각을 틈타 급습을 결정했다. 평소와 비슷한 밤이었다. 다만 다른 것은 열 살은 될까 싶은 어린 여자 아이가 비적 두목의 방으로 비명과 함께 끌려갔다는 것이 좀 달랐을 뿐이었다. 비적의 두목이 어린 여자 아이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맞는 것 같았다. 여자 아이가 끌려 들어가는 것을 본 뒤로 이선의 마음이 좋지 않았다.

“군사들에게 준비하라 일러라.”

“예, 마마.”

열여섯, 태자 이선은 아버지 무신을 닮아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했다. 열여섯이지만 이미 웬만한 장정보다 크고 무예로 다져진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숨죽인 수백의 군사가 이선의 손짓만 기다리고 있었다. 군사를 이끌고 나온 첫 출정이었다. 병사들과 실전과 같은 산행을 여러 번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훈련이었다. 오늘 싸움에서는 실제로 죽어나가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는 진검을 다루는 날이었다. 이선의 심장이 무섭게, 그러면서 무겁게 뛰고 있었다.

“비적의 두목을 잡는 것이 우선이다. 선발대가 비적을 상대할 동안 장적 그대는 나와 함께 비적 두목의 방으로 갈 것이다.”

“예, 마마.”

궁수대가 먼저 준비를 했다. 이미 선발대가 산채 가까이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고 궁수대가 보초를 서고 있거나 혹은 밖에서 움직이고 있는 비적들을 먼저 치기로 했다. 허공으로 높이 치솟은 이선의 손짓을 따라 수십 개의 화살이 소리 없이 날아갔다.

가장 중요한 일은 비적의 두목을 잡는 일이었다. 병사들이 비적의 졸개들을 상대할 동안 이선은 선발대와 함께 비적 두목의 방으로 향해 달려갔다. 비적의 규모는 파악한 대로 어마어마했고 오합지졸의 비적이 아니었다. 나름 체계가 있었고, 비적들의 검을 다루는 솜씨 또한 어설프지 않았다.

“마마, 생각보다 훈련이 잘되어 있습니다.”

장적이 이선을 보호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두목을 잡는 일이 중요하다. 절대 놓치지 마라.”

“예, 마마.”

하지만 정작 두목의 방으로 몰려 들어갔을 때, 이선은 당황해 움직이지 못했다. 정말 작은 여자 아이가 두려움과 공포에 질린 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하고 기진한 채 누워 있었다. 저항을 하다가 맞았는지 뺨이 붉게 부어 있었다. 비적 두목이 도망쳐버리고 난 뒤 홀로 남겨진 아이는 군복의 사내들이 들이닥친 것에도 놀라 바들바들 떨었다. 아이는 뭐든 끌어다 몸을 가리려 애썼지만 마비가 된 듯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두려움에 질린 아이의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너희는 모두 나가 두목을 찾거라.”

이선은 서둘러 겉옷을 벗어 아이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아이는 그럴수록 공포에 질려 갔고 더욱더 바들바들 떨렸다. 이선은 아이의 눈빛을 무시하고 다가가 그의 옷을 덮어 주었다. 커다란 옷 속에 파묻혀 버린 아이의 눈에서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괜찮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너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줄 테니, 안심해도 된다.”

아이는 이선의 손길에 도움을 받으며 겨우 일어나 앉았다. 일으켜 앉힌 손을 놓아버리면 아이는 그대로 쓰러져 버릴 것처럼 기진해 있었다. 이선은 살며시 아이를 안아주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아이는 괜찮다, 괜찮다 속삭여주는 이선의 목에 매달리듯 안겨 울기 시작했다. 그의 품에 안겨 우는 아이는 보기보다 더 작았다. 그 작은 아이가 온몸을 쥐어짜듯 울고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아이임에도 아이의 눈물에, 아이가 온몸으로 겪은 이 참혹한 일에 마음이 아파왔다.

이선은 병사 둘을 불러 아이를 혼자 두지 말고 잘 지키라고 했다. 아이를 두고 일어서자 작은 아이의 손이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가지 말라고 말도 못하는 아이였다. 도와주러 왔다지만 또 다시 낯선 사내 둘에게 남겨지게 되는 일에 겁에 질려 있었다. 이선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낮추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올 때까지 저 병사들이 지켜주고 있을 거니까 여기서 기다려야 한다. 내 말 믿지?”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불안한 눈으로 그의 옷자락을 놓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선은 그의 옷자락을 잡고 있는 아이의 손에 그의 손수건을 쥐어 주었다.

“비적들을 잡으러 왔어. 더는 이런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잖아.”

이선의 말에 아이는 망설이듯 그의 옷자락을 놓아 주었다.

“착하구나. 걱정 말고 있거라.”

아이는 방을 나가는 그를 향한 눈빛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비적을 모두 소탕하고 많은 것이 정리가 되고 난 뒤에야 이선은 작은 아이를 떠올렸다. 정신없이 바쁘고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아이에 대한 생각은 문득문득 떠오르고 있었다.

“그 아이는 어떻게 하였느냐?”

장적은 이선이 무엇을 묻는지 알고 있었다. 이선보다 여섯 살이 더 많은 장적은 2년 전부터 이선의 호위무사가 되어 늘 함께 다니고 있었다. 자잘한 정이 별로 없는 이선인데 조금 전 비적 두목의 방에서 봤던 아이의 모습은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하긴 장적이 봐도 아이의 모습이 너무도 처참해 보였다. 집채 만 한 사내가 한주먹도 안 되어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를 취하려 했었다. 정말 인간으로써 상상도 못할 짓이었다.

“의원이 돌보고 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아이는 겁간을 당하지 않았다 합니다. 다만 충격이 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잘 돌봐서 아이의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하거라.”

크고 작은 일들을 보고 받고 다친 병사는 없는지, 비적들에게 잡혀 있는 민간인은 얼마나 되는지 그 민간인들이 어떤 신분의 누구인지 파악하고 기록하고 처리에 대해 논하느라 시간은 한정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깊은 밤을 지내고 이선은 새벽녘에 잠시 눈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