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너의 남자 친구
바깥 풍경이 바람 따라 살랑거리는 창가에 가연은 영어 교사와 마주 서 있었다. 조금 전에 고민스러운 이야기를 털어놓은 터였다. 내심 사정을 봐주길 기대했지만 영어 교사는 공정하게 해야 한다는 답변을 들려주었다.
“정 힘들면 교무실에 와서 해도 선생님이 뭐라 하진 않겠지만, 점수는 마이너스가 될 거야. 다른 애들에 비해서는 아무래도 부담감이 덜한 조건에서 평가 받는 거니까. 형평성을 위해서 점수는 만점을 줄 수 없어. 그 점 감안해야 하는 건 이해하겠지?”
입장은 이해하지만 달리 도움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표정이었다. 가연은 수긍하며 시선을 떨구었다.
“네.”
가연을 안쓰럽게 바라본 교사는 소심해서 회피하려고만 하는 가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선생님은 가연이가 두려움 이겨 내고 애들 앞에서 멋지게 발표했으면 해. 가연이가 만점 받아 가는 것 볼 수 있을 거라고 쌤은 기대하고 있을게.”
교사는 침묵하는 가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면담을 마무리 지었다.
“그럼 수업 때 보도록 하자.”
교사가 어깨를 놓으며 지나쳐 가고 창가에 가연 홀로 남았다. 가연은 한동안 굳은 듯이 서 있었으나 오래 지체하지 않고 창가를 벗어났다. 교실로 돌아가기 위해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어떤 선택을 할지는 이미 정했다. 뭐라 말하든 그리 기대에 부응하고픈 마음이 아니었다.
줄곧 복도 맞은편에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던 채희는 복도 끝으로 멀어지는 가연의 뒷모습에 오래도록 눈을 두었다.
전에 복도에서 마주 지나치면서 한 번 본 것뿐인데 각인되듯 기억에 남은 애였다. 피부가 유난히 희고 웃음기 없는 얼굴이었기 때문일까.
쟤는 어떤 앤데 영어 쌤과 긴밀히 상담하며 우등생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지 궁금해 같이 있던 경선에게 물어봤더니 들려온 대답이 놀라웠다.
“아, 쟤 이가연? 1등?”
무심히 고갯짓 한 번 하고 말해 주는 것에 채희는 예기치 않게 가슴이 철렁했다.
쟤?
고등학교에 들어와 첫 시험을 치렀고 전교 2등을 했다. 1등이 누군지는 몰랐고 궁금해한 적도, 알아보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복도 창가에 영어 쌤과 마주 서서 긴밀하고 특별한 분위기로 대화 중이기에 쌤이 왜 저렇게 열성적이고, 대우하는 느낌인가 했더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고 나니 이상하게 속이 에는 듯하고 욱신거렸다. 그동안 스스로 무던하고 욕심 없는 성격이라 믿어왔는데 어쩌면 아닌지도 몰랐다.
얼굴과 이름을 알게 된 지금 느끼는 감정은 1등이 누군지도 모를 때 느낀 감정과 왠지 모르게 달랐다.
“졸 이쁘지. 세상 참 불공평해. 1등에, 이쁘기까지.”
경선이 팔꿈치로 채희의 옆구리를 누르며 말하고는 기대어 있던 벽 앞에서 떨어졌다. 그만 가자며 먼저 자리를 벗어난 경선이 복도 끝으로 멀어졌지만 채희는 뒤따라가지 않고 얼마간 머물렀다. 가연의 뒷모습이 복도 끝으로 완전히 멀어졌을 때에야 눈을 거두며 걸음을 뗐다. 그때만 해도 서로 뜻밖의 관계로 엮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저녁이 되자 학교는 여느 날처럼 학생들을 교사 밖으로 토해 냈다. 학생들은 교실에서 자습하는 유형과 독서실이나 도서관, 학원으로 향하는 부류로 나뉘어 불 밝힌 교실을 지키거나 어두운 교정을 빠져나갔다.
가연은 우글거리는 틈에 껴 교문을 빠져나가는 쪽이었다. 여느 날처럼 학교를 나와 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평소처럼 뒷문 근처에 자리하고 앉아서 보는 버스 안은 늘 그렇듯 삭막하게 덜컹거렸다. 가연이 자리하고 앉은 차창 밖으로 어둑해진 풍경이 지나갔다.
“응, 끝나고 가는 길이야.”
가연은 껌껌해지는 차창 밖을 흘끗 보고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아빠가 새삼스럽게 전화를 걸어서 의아해하며 받은 참이었다.
― 아줌마가 저녁 해준다고 같이 왔어. 오면 넷이서 같이 밥 먹자.
가연은 좀 뜬금없다고 느꼈다. 셋이 아니고 넷?
“왜 넷이야?”
물었더니 아빠는 별로 뜸들이지 않고 말했다.
― 아줌마 딸도 같이 왔으니까 넷이지. 너 어디쯤 왔어? 버스야?
“타고 있어.”
가연은 그냥 짤막하게만 답했다. 갑자기 넷이서 밥을 먹는다니 안 내켰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 버스 타고 오고 있어?
버스 타고 있다고 말했는데도 또 묻는다. 별 의미는 없이 되묻는 것에 불과했다.
“가고 있다고, 하여튼.”
가연은 툭 내뱉듯이 대꾸했다.
― 그래, 빨리 와, 그럼.
가연이 쌀쌀하니까 덩달아 무뚝뚝해진 건지, 아빠도 삭막하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집에 가보니 몇 번 봐서 이제는 좀 익숙한 아줌마가 와 있고, 아줌마가 데려온 딸도 있었다. 가연이 집에 막 들어서자 그 애는 눌러 보던 핸드폰을 그만 식탁에 내려놓고 의자에 앉으려다가 고개를 돌렸다. 가연은 쟤가 걔구나 짐작했지만 알은체하긴 머쓱했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냥 대충 고개를 움직여 인사하니 그 애도 똑같이 고개만 움직였다. 서로 같은 고등학생으로 보이는데 고개 숙여 인사하려니 좀 어색했다.
“뭘 인사들을 맥없이 들 하고 그래. 넌 빨리 가방 내려놓고 와서 앉아.”
근현이 아무렇지 않은 분위기를 만들려는 양 둘이 인사하는 모양새를 괜스레 타박하고는 가연을 재촉했다.
가연은 말없이 방에 들어가다가 아줌마 목소리를 들었다.
“하하. 맥없이 들 했다는 게 어떤 건데?”
영혜가 궁금한 듯이 물으며 상추를 씻다 말고 돌아보았다. 웃는 얼굴에 애들이 친해졌으면 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가연은 눈을 거두며 방문을 마저 지나쳤다.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고는, 얼른 나가기 뻘쭘해서 핸드폰으로 친구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하면서 지체했다.
얼마 후 네 사람은 식탁 앞에 둘러앉았다.
채희는 아무것도 모르고 왔다. 그냥 엄마 따라 와서 새 아빠가 될 아저씨의 딸도 함께 한다는 저녁 식사 자리에 함께 하려던 것이었다. 뭐 이런 기막힌 일이 다 있지 싶었다. 1등 하는 그 이가연이라는 애가 아저씨 딸이었다.
미리보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