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에서 나와 일월산(日月山)에 도착하자 이국적 향취가 물씬 느껴졌다. 해와 달이 나오는 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답게 기묘한 모양으로 깎여진 돌들로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곳에는 하국에 보지 못했던 신비의 나무, 부상(扶桑: 동쪽 바다의 해가 뜨는 곳에 있다는 신성한 나무)도 볼 수 있었다. 산 위에 솟은 부상은 200리도 넘어보였다. 그 나뭇잎은 흡사 갓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처음 보는 부상에 눈길을 빼앗겨 넋을 놓고 있던 항아에게 이소가 말했다. '“여기입니다. 형님, 차비마마.”'누가 만든 건인지 그곳에는 누각이 세워져 있었다. 누각 안에는 이소가 마련한 듯 보이는 잘 차려진 간식 상이 준비되어있었다. '“저 아래 내려가 보아도 됩니까?”'“아직 온원곡(溫源谷)의 물이 찹니다. 그리고 물살도 다소 거세니 조심 하신다 약조해주시지요.”'고개를 끄덕인 뒤 항아가 신이 난 듯 온원곡으로 내려갔다. 하국에서 자유로이 왕궁 밖으로 나와 돌아다니던 시절이 되살아난 듯, 활기 넘치는 20살 아가씨의 모습 그 자체였다. '“장소가 좋지 않구나. 어째서 오거(吳姖: 하늘의 문)로 온 것이냐?”'“형님. 얼굴을 푸시지요. 차비마마는 기분이 좋으신 듯보이니 좋은 일이 아닐는지요.”'“요즘 내, 너의 의중을 알 수가 없구나.”'“형님과 차비마마를 조금 도울 뿐입니다.”'이소는 빙그레 웃으며 찻잔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항아는 물이 흐르는 온원곡 안을 들여다보았다. 신기하게도 골짜기에 흐르는 물 안으로 보이는 것은 흔한 자갈이 깔린 바닥이 아니라 겹겹의 산들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재미가 있어, 물가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어 눈을 커다랗게 떠보자 무릉도원이 있다면 이와 같을 법한 세상이 항아의 천진난만한 눈에 와 닿았다.'잠시 고개를 들어 황태자와 황태제 이소가 있는 쪽을 올려다보니 누각에 앉은 이소가 항아 쪽을 보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차를 마시는 황태자의 옆모습을 보니, 며칠 전 일이 생각나 황태자가 잡았던 손이 아릿한 느낌이 들었다. 항아 쪽을 쳐다보지 않은 채 아무런 표정이 없는 황태자를 보자 내가 왜 이러나 싶었는지 항아는 도리질하며 다시 물가로 시선을 돌렸다. 분명 좀 전까지는 물 안에 산들만 가득한 듯했는데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귀여운 깃털이 달린 꼬리를 살랑거리는 것이 너구리인 듯도 한데 물 안에 있는 것이 신기하여 항아가 손을 넣었다. '“안 돼!”'이소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항아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보려는 찰나였다. 순식간에 누각에 있던 이소가 항아가 있는 쪽으로 내려와 항아를 잡아끌어 들쳐 안았고, 항아의 눈앞에는 이빨만 족히 석자는 넘는 괴수가, 검은 깃털들을 흩뿌린 채로 화살을 맞아 가르릉 거리며 기분 나쁜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윽고 다시 죽을 기세로 발악을 하며 항아 쪽으로 괴수가 달려들려 하자, 때를 놓치지 않고 다시 화살이 날라 왔다. 화살은 괴수의 심장을 관통하며 수북한 깃털만을 남긴 채 괴수와 함께 스르륵 사라졌다. '항아가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화살이 날아온 곳을 바라보자, 그 시선의 끝자리에 바로 황태자가 서 있었다. 황태자는 손에서 활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활이, 마치 화살이 그러했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이 장면……이 장면을 본 적이…….”'“그러기에 조심하신다고 약조해 달라 하지 않았습니까…… 차비마마.”'싱긋 웃는 이소에게 무언가 더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항아의 눈은 감겨졌다. 다리에도 힘이 빠진 듯 이소의 팔 안에서 꼼짝도 못한 채 정신을 잃었다. ''“예(羿: 태자의 이름)야. 네가 왜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을지 모르는 이소와 둘이서만 여행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냐.” '“어마마마. 이유는 어마마마도 아시지 않습니까? 이대로는 수국의 기운이 다해간다 하니 수국을 구할 방도를 찾아와야 하지 않습니까? 이건 아바마마의 명이시기도 합니다.”'“천녀는 이소의 어미와 동복이니 이소에게 너의 약점을 알려주려 하는 속셈 아니겠느냐.”'“그렇다 하여도 아니 갈 순 없습니다. 어마마마. 아바마마께서도 허락지 않으실 겁니다.”'“예야. 그렇다면 조심해야 한다. 너에게 그 해괴망측한 기운이 있을 것을 이소에게 알려주면 아니 된다. 네가 그 능력이란 것을 들켜 천궁으로 끌려가버린다면, 그래서 이소 녀석에게 태자의 자리가 간다면 이 어미는 죽은 목숨일 것이야.”'어머니는 아버지의 무관심을 그저 나랏일에 빠져 그러한다 위안을 삼으셨다. 그런데 이소의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이소가 태어나자 어머니의 대단한 자존심에 심각한 금이 간 것이었다. 천녀를 품는 것은 금기시 된 수국에서 천녀를 품은 아버지. 이소는 이를 덮기 위해 모두 아는 진실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황태제(황태자의 동복형제)가 되었다. 사랑을 모르는 아버지를 정말 사랑했던 순진한 이소의 어머니가 목숨을 잃었지만 그것으로는 어머니의 성에 차지 않았는지 어머니는 이소를 끔찍이도 싫어하며 이소가 호시탐탐 나의 황태자 자리를 노린다 여겼다. 어머니께서 빗나간 나에 대한 모정으로나마 삶의 위안을 채우시는 것 같아 모르는 척 어머니의 장단에 맞춰주고 있었지만, 귀신을 다루는 능력을 해괴망측하게 여기는 것은 어린 나이에는 무척 상처였었다. '더욱이 하늘의 계시를 받는 천녀가 다른 이도 아닌 왕궁의 자손이 천기를 나누어 받아 태어난 것을 모를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어머니는 언제나 나의 능력이 새어나갈까 전전긍긍했다. '“황태자저하. 당신의 능력은 당신을 강하게 하지만, 정작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군요.”'“무슨 소리냐? 천녀.”'“당신은 이 수국은 구할 수 있어도 가장 지키고 싶은 것은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내가 가장 지키고 싶은 것이 이 나라다.”'어린 황태자의 치기 어린 대답에 천녀는 모든 것을 달관하고 있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것이 아직은 어린 소년인 황태자를 더욱 반항심 서리게 했다. '“황태자 저하와 이소마마께서는 구슬이 인도하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시지요.”'“왜지?”'“마마님들은 인간의 몸으로 천기를 얻으셔서 귀(鬼)계의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계십니다. 천기를 얻은 것이 좋을 듯해 보이나 수명을 단축시키는 마약과도 같습니다. 하늘이 허락한 마마님들의 수명을 귀신들이 잘라내게 둘 순 없지요. 그러니 불사약을 가진 운명을 찾아 천수를 누리게 돕는 것이 저의 임무입니다.”'“불사약을 가진 운명?” '예(羿)와 이소가 동시에 말했다.'“한눈에 알아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마마님들의 운명의 끈을요.”'천궁을 나서는 예(羿)와 이소에게 천녀는 마지막 말을 보태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