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남자의 첫사랑

내 첫사랑은 당찼다. 예뻤고, 멋있었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녀를 처음 본 건 10살 때였다. 처음 축구를 시작했던 그 날. 나이가 제일 어렸던 나는 일명 깍두기로 팀에 들어갔다. 남녀 상관없이 뛰어놀던 나이라 여학생 몇몇도 경기에 동참했던 걸로 안다. 방과 후 수업이라 다른 학년의 형, 누나들과 함께 경기에 들어갔었다. 그녀는 우리 팀 주장이었다.

“진명아! 달려!”

그녀는 고학년 형들까지 제치고 골을 넣을 정도로 실력이 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아마 내가 축구를 시작하고 싶었던 이유도 그녀 때문일 것이다. 늘 방과 후 수업 시간 교실에 앉아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그 이름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심장이 뛰었다. 도대체 누구기에 매 경기마다 사람들이 그 이름에 환호할까. 호기심에 하굣길에 들른 운동장 경기는 박진감 넘치는 경기의 막바지였다. 내가 처음 본 그 경기에서도 그녀는 최다 득점을 했었다. 혼자 옆 학교의 남학생들을 상대로 5골을 넣었으니 상대가 경기에 흥미를 잃을 만도 했다.

발육이 남달랐던 그녀는 나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었고, 팔, 다리도 훨씬 길었다. 또래 남학생들보다도 신체 조건이 좋을 정도였으니 모두의 우상이나 다름없었다. 선생님들은 그 아이가 남자였다면 앞길이 훤히 트였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그 아이의 우월한 외모보다 내가 정확히 그녀를 마음에 품었던 것은 나의 첫 경기에서였다. 처음 교체 선수로 들어갔을 때 팀원들은 날 거의 투명인간 취급했다. 뛸 줄도 몰랐던 때라 그저 공이 가는 걸 눈으로 좇으며 남들보다 한 발, 아니 두 발, 세 발은 느리게 공을 쫓을 때 유일하게 내게 패스를 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이름이 민이 맞지?”

“네. 강민이요.”

“난 6학년 현진명이야. 주장이고. 잘 부탁해.”

그 아이는 심지어 선생님조차도 내 존재를 모를 때 사람들 틈에서 빠져나와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넌 체구가 작아서 일단 스피드가 붙으면 남들보다 빨리 뛸 수 있을 거야. 힘으론 상대가 안 돼도, 몸집이 작아서 잘 빠져나올 수 있을 테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두 눈 크게 뜨고 네가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 알았지?”

“네.”

“상대편 골대 주변에 있어. 내가 패스하면 넌 골대를 향해 차기만 하면 돼. 할 수 있지?”

내 첫사랑을 확신하던 순간이었다. 그 미소는 아직도 기억이 난다. 필드에서 날 믿는다는 그 미소. 그리고 그녀는 매 경기마다 날 데리고 뛰었고, 항상 결정적인 골을 내게 넘겨주었다. 처음엔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녀 덕에 자신감을 갖고, 더 열심히 연습에 임하자 시기와 질투는 실력에 대한 경이로움으로 바뀔 정도였다. 1년 만에 팀의 기대주가 되었고, 고학년이 되었을 땐 학교 근처에 축구부가 있는 중, 고등학교에서 스카웃 제의까지 오기 시작했다. 멋도 모르고 그 아이에게 잘 보이고 싶어 축구를 계속하게 되었지만 그 아이는 학교를 졸업하면서 멀리 떠났다. 그러나 난 여전히 또렷이 기억한다. 그 아이가 떠날 때 해주던 말을….

‘민이 넌 분명 훌륭한 축구선수가 될 거야. 나중에 TV에서 나온다고 모른 체하면 안 된다?’

그리고 난 그녀로 인해 축구선수가 되었다. 사실 10살 꼬마가 무슨 사랑을 알겠냐고 하겠지만 내가 축구를 시작하고, 축구에 열정을 쏟아 붓게 된 계기가 그 아이였기 때문에 이 정도면 어른들 부럽지 않은 사랑이라고 하고 싶다. 그 사랑이 내 승부욕과 돌파력이 되었고, 난 무서운 기세로 중, 고등학교에서도 팀의 기대주가 되었다. 이제 내 위치는 그녀가 말한 대로 TV에서 볼 수 있는 정도였다.

“강민 선수! 오늘 경기에 대해 한마디 해주시죠?”

처음엔 어색하기만 하던 마이크도 이젠 익숙하기만 하다. 자연스레 내밀어진 마이크에 짧게 답했다.

“좋은 경기였습니다.”

뒤에서 들리는 애절한 기자들의 부름에도 난 라커로 향했다. 전반전에 2골이나 상대에게 내주자 사람들은 아직 내가 슬럼프를 극복하지 못했다며 혀를 찼다. 그러나 눈을 감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이 올 때마다 동기부여가 되는 그 미소를 말이다.

‘민이 넌 분명 훌륭한 축구선수가 될 거야. 정말이라니까?’

너무 아득한 옛 기억에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희미한 영상이었지만 그 예쁜 미소만은 선명했다. 그 미소에 내 입가에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 미소를 기억해낸 경기는 절대 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