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소진의 첫 키스는 향기였다. 만개한 연남색의 붓꽃들, 가벼우면서도 은은했다.

밀어낼 수가 없었다. 턱 끝에 머문 그의 손짓과 더불어 난생처음 입술과 입술이 닿았다. 새로이 깨어난 감각 사이사이 화인군에게서 느껴지는 체향은 덤이었다. 온몸이 그에게 결박되었다.

“응…….”

숨을 쉬기 위해 입을 벌리자 기다렸다는 듯 촉촉하고 뜨거운 뭔가가 살짝 닿았다 멀어졌다. 감겼던 눈이 절로 번쩍 뜨였다. 그와 동시에 화인군은 소진을 살짝 밀어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시선 아래였다.

“왜 입맞춤을…….”

소진은 간헐적으로 색색대며 물었다. 짧은 입맞춤이나 숨쉬기 버거웠던 만큼 두 뺨은 발그레 달아올랐다. 화인군은 그 사랑스러운 뺨에 손을 올렸다.

“왜…….”

소진은 계속하여 같은 물음만 던졌다. 그의 입 끝이 늘어졌다.

“덕분에 가셨구나.”

그것인즉 먹어야 할, 고통을 가시게 할 환 대신 소진과의 입맞춤으로 대신했다는 뜻이었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그의 무수한 상처들. 단단해 보이는 모습과 달리 불안하게 살아온 그의 삶이.

또 괜스레 물기가 어렸다. 뭐라 말해야 하건만 소리가 되지 않았다. 그의 입맞춤이 다사롭게 느껴진 건 확실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마음 한편에 바람이 든 듯했다.

“그 의미가…….”

“한소진.”

그가 부르는 이름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제 이름이 분명하나 이 시대, 그의 입에서 불리는 이름에는 영혼이라도 스민 듯 숨죽이게 된다.

“의미는 중요치 않아. 하고 싶었다, 내가. 너는 거부하고 싶었더냐.”

화인군은 무겁게 되물었다. 어디에도 웃음기는 없었다. 소진은 막 잠에서 깨어난 듯 눈부신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의 두 손은 소진의 얼굴을 완벽하게 감싸며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동안 너의 마음에 다른 이가 담겼느냐.”

소진은 버릇처럼 눈만 깜박였다. 문든 떠오른 왕자 신제. 같으나 다른 느낌인 화인군을 눈에 담으며 소진은 제 마음을 엿보듯 화인군을 응시했다. 중앙에 놓인 화로의 숯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말해. 다른 이가 있느냐.”

“이해치 못하겠어요. 당신은……. 화인군께선 아니 대군마마께선.”

제대로 호칭을 입에 담지 못하는 소진에 그의 눈빛이 휘어졌다. 그의 엄지는 소진의 뺨을 어르듯 살살 쓸어냈다.

“뭐라 부르고 싶은데.”

“……대군마마.”

“그래. 대군이나 그 어떤 특혜도 권력도 없는. 난 신제다.”

신제……. 같은 이름. 소진은 울면서 웃었다. 흐릿해지는 눈빛에 화인군은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이번엔 솜털 같은 입맞춤이었다. 이마 위로 닿았다 멀어지는……

소진은 화인군, 대군마마를 응시했다. 몽글해지는 기분이었다. 그의 손끝이 그녀의 두 뺨을 매만졌다.

“이 눈. 너무도 맑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알아보았다.”

“언제…….”

“형님의 호위들에게 쫓기고 있을 때.”

의아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소진은 당겨 들었다.

“하면 나와 처음 만난 때가 언제…….”

그러나 막 소진이 진실 한 자락에 다가갈 때였다. 문이 열렸다. 호위장 현이 입김을 날리며 급히 들어섰다.

“대군!”

화인군은 안았던 손길을 풀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소진의 손목을 어루만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충직한 그답게 대군의 안위를 먼저 챙겼다. 소진은 한 발 물러나 호위장에게서 맞았던 약제 주머니를 쥐었다.

“괜찮아.”

“독이 발라져 있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자객의 입을 열어야 합니다. 증거를 남겨야 하니.”

“……늘 그렇듯 사주한 이는 같을 게다.”

“대군!”

“돌아간다.”

화인군은 붕대지 두른 몸에 옷을 걸친 뒤 돌아섰다. 소진은 호위장과 눈짓을 나눴다.

밖으로 나오자 미명이 차오르고 있었다. 먼저 말에 올라선 대군이 손을 내밀었다. 소진은 그의 손과 호위장을 번갈아 보았다. 대군은 매섭게 일침 했다.

“신경 쓰지 말고 어서 타라.”

언제 부드러웠나 싶게도 엄준한 화인군으로 돌아갔다. 호위장 역시 말에 올라 말머리를 돌렸다. 하는 수 없는 소진은 대군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이번엔 그의 뒤가 아니었다.

“바람이 차다. 특히 새벽은.”

화인군의 품속이었다. 그의 굳건한 두 팔이 소진을 감싸듯 말고삐를 잡았다. 아늑했다, 그의 품은. 소진은 속울음 잠긴 숨을 힘들게 삭혔다. 비록 노천에서 푹 잠기지 못했으나 대군의 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 뜨겁고 더 몸에 감겼다.

달려가는 길목에서 소진은 목에 감긴 반지를 만지작댔다.

‘신제…….’

그를 떠올렸다. 정략 약혼 상대자. 막 일어선 호감, 손톱만 한 감정은 아직도 생생했다. 또한 여전히 청야담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은 굳건했다. 그렇기에 언제라도 기회가 된다면 수표교를 밟을 것이다.

소진은 화인군의 품에 등을 기댔다. 그의 팔이 오므려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