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언제 돌아올 거야?”

아직은 쌀쌀한, 3월 중순. 그러나 카페의 통유리 너머로 들어오는 햇볕은 따스했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아메리카노 두 잔. 그 앞에서 진석은 물었다. 내가 돌아오는 게 당연하다는 듯.

“잘 모르겠어요.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좀 쉬어 볼까 생각도 들고. 내가 언제 돌아오는지가 뭐가 중요하죠?”

좀 비딱하게 말한 감이 없지 않지만 어쨌든 내 진심이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다는 말도. 그가 왜 그 시기를 묻는지 이해가 안 되는 마음도.

“네가 빨리 돌아오지 않으면 약혼이 깨질 테니까. 알잖아. 이제 굳이 이 약혼을 지속할 이유가 없다는 걸.”

진석은 하얀 머그컵을 들어 커피를 마셨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결국 그거였나. 예상은 했지만 너무 빠른데.

“그럼 진석 씨한테는 잘 된 일이네. 깨고 싶으면 언제든지 깨도 돼. 따로 알려 줄 필요도 없고. 언제 돌아올지는,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요. 회장님 화가 풀리면 돌아오게 되겠죠. 그 전에 다른 기발한 걸 개발하든가. 근데 그러고 싶지가 않네.”

나는 손목시계를 한 번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계는 오후 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점심시간 끝났다. 나도 바빠서요. 이삿짐센터에서 연락 왔어. 도착했다고. 지금 가면 딱 맞을 것 같아요.”

진석도 자리에서 일어나 선이 빳빳하게 서 있는 양복의 단추를 잠갔다.

“조심해서 가. 도착하면 연락하고.”

“우리가 그럴 사이던가? 심심하면 한 번 놀러 와요. 경치는 끝내주게 좋은 곳이니까.”

나는 웃으며 말하고는 진석보다 먼저 카페를 나섰다. 발레 파킹을 한 기사가 묵직한 중형차를 빼 주었고 그 차에 올라타 액셀을 밟았다. 가볍고 날씬한 차를 살 수도 있었지만 굳이 이런 차를 선택한 것은 어떤 종류의 항변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나를 무시할 수 없다는 무언의 아우성.

그러나 결국 이렇게 되었다. 언제 끝날지, 아니 끝이 있을지 알 수 없는 유배 생활. 색깔도 새까만 큰 차는 복잡한 골목을 벗어나 큰길로 나갔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왕복 8차선의 넓은 도로에 차는 몇 대 없었다. 나는 그 길로 시원하게 차를 몰아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함께 달리는 차들이 동지처럼 느껴졌다.

회색빛의 중앙 분리대가 끝없이 펼쳐졌다. 그 도시까지는 두 시간 정도가 걸렸다. 내가 유배되어 가는 도시. 에메랄드빛 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 인구가 6만이 좀 넘는 작디작은, 겨우 시(市)라는 명칭을 달게 된 그런 도시였다.

그곳에는 내가 얼마 전까지 경영 전략 팀 해외 개발 파트의 팀장으로 일하던 A 코스메틱의 국내 공장이 있었다. 지금은 설립 초기의 1호 공장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그저 남겨만 둔, 물량 생산은 거의 하지 않는 작은 공장. 나는 일주일 전, 그곳으로 유배를 당했다.

“병신들.”

입에서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까지 될 일은 아니었으니까. 아무리 능력이 없고 열등감에 정신이 나갔다고 해도 나를 회사에서 내치려고 회사의 기밀까지 빼다가 팔아넘길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의 회사였다. 나에겐 지분이 별로 없는. 그 열등감의 끝을 예상하지 못한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지.

내가 처음 그들의 앞에 선 건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의 일이었다. 내 엄마는, 예쁘고 어리석었던 그녀는 한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나를 낳았다. 문제는 그 남자가 유부남이었으며, A 코스메틱이라는 우리나라 최고의 화장품 회사의 회장이었고, 그리고 그 남자는 엄마를 심심풀이 땅콩처럼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엄마는 나를 낳았고, 그것으로 모든 게 다 끝날 줄 알았던 거다. 어리석게도. 회장이라는 사람은 늘 지금의 부인은 정략결혼으로 만나서 사랑이 없다고 말하곤 했으니까. 엄마는 부인의 자리가 자기에게 올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과 함께 회장은 발길을 뚝 끊었다. 예쁘기만 하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던 엄마는 회장에게도 버림받고, 가족에게도 버림받았으며 할 줄 아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어쨌든 나는 나의 기억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배를 곯았고, 봉투를 접는다거나 인형의 눈알을 붙이는 등의 일을 해야 했으며 늘 술에 취해 울기만 하던 엄마의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엄마는 하루는 하루 종일 술에 취해 울면서 너 때문에 인생이 망했다며 나를 저주하다 하루는 나의 엄마 노릇을 하겠다며 일을 찾아 밖으로 나가곤 했다. 그러나 그 책임감 넘치는 마음은 채 3일을 넘기지 못했고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소주 한 병을 사다가 해도 들지 않는 반지하 방으로 돌아왔다.

“나한테 식당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라는 거야. 처음에는 카운터에 앉아서 돈 계산만 하면 된다고 해놓고서. 그렇게 멍하게 앉아만 있을 거면 그만두래. 이게 말이 되니? 어? 내가 식당에서 설거지나 하려고 널 낳은 줄 알아?”

도대체 설거지를 하는 게 뭐가 어떻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먹을 게 없이 쫄쫄 굶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하지만 엄마의 말에 토를 달 수는 없었다. 엄마는 본인이 능력이 없다는 것과 먹고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못했다.

어쨌든 중학생 정도가 되자 웬만한 곳에서는 나이를 약간만 속이면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고 내가 약간의 돈을 벌 수 있게 되자 엄마는 더 이상 일자리를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삶이 힘들다고 느낄 때마다 나는 몇 년 전에 처음 본 아버지라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엄마가 하다하다 흘러간 술집에서마저 거절당하자 내 손을 붙잡고 찾아간 으리으리한 동네. 그나마 믿을 곳이라고는 얼굴밖에 없던 엄마의 자존심이 송두리째 떨어져 내린 그날, 그 사람을 처음 만났다.

믿을 수 없을 만큼 감흥이 없는 눈이었다. 찬바람을 맞으며 세 시간을 기다려 겨우 마주한 그 사람은 엄마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나를 스윽 쳐다보더니 새까맣고 커다란, 곧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릴 것만 같은 그런 철문 너머로 들어가 버렸다. 비서라는 사람이 오더니 엄마의 손에 흰 봉투 하나를 쥐어 주었다. 엄마는 그 돈을 모두 술을 먹는 데 탕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