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금살금, 뒤꿈치를 한껏 들어 올리고서 문 앞까지 무사히 걸어 나왔나 싶었는데, 목덜미를 살포시 잡아채는 목소리 하나.'“정다인.”'다인은 조심하느라 잔뜩 치켜올렸던 어깨를 톡 내려뜨리곤 그 자리에 섰다. 입술은 비죽, 콧날은 찡긋. 그러나 오빠 다현을 향해 돌아설 땐 다인의 얼굴은 상큼한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잠깐만 오빠. 한 시간만, 아니 삼십 분만. 응?”'굳이 못 나가게 할 다현도 아니지만 혼자 놀러 나가는 게 미안해서 다인은 짐짓 애걸조로 말했다.'“나도 잠깐만. 요것만 갖다 주고 와.”'다현이 김밥 접시가 얹힌 쟁반을 내밀었다. 다인은 쟁반을 받아 들었다. 배달통이 아니라 쟁반인 걸 보니 근처인가 보다.'“어딘데?”'“저기.”'다현의 손끝을 따라 다인은 길 건너의 동물병원을 넘겨다보았다. 며칠 내내 인테리어를 새로 한다고 뚝딱거리다 오늘은 좀 조용해지더니 제법 모양새를 갖춘 것이 곧 오픈할 모양이다.'“하필 이 시간에 배달이람.”'지금은 오후 3시. 평소 같으면 가장 한가할 시간이다. 그래서 다인이 한두 시간쯤 가게를 비워도 무리가 없을 만큼. 오늘 다인은 영은이네 비디오가게에 들러 영화 한 편을 보고 올 생각이었다. 매일같이 오던 영은이 며칠째 걸음이 없어 궁금한 것이 더 근본적인 이유이긴 했지만.'“배달 아니고, 선물.”'“피, 선물은 무슨. 뇌물이겠지.”'“정다인. 고작 요 김밥 몇 줄 갖고 뇌물은 좀 심한 거 아냐?”'“어쨌든, 앞으로 우리 집 김밥을 자주자주 애용해달라는 속셈이 깔린 거잖아. 그러니까 순수한 선물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지.”'“갈 거야, 말 거야. 싫음 여기 있어. 내가 갔다 올 테니까.”'“알았어. 가. 간다구.”'다인은 쟁반을 들고 가게를 나섰다. 2차선 도로를 법적으로 제대로 건너려면 저만큼 사거리까지 걸어 내려가 횡단보도를 이용하는 게 옳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좌우 둘러보고 차가 안 올 때 그냥 쓱쓱 건너다니곤 했다. 다인 역시 그랬다.'길을 건너가 선 다인의 눈에 ‘설 동물병원’이란 간판이 단정하게 올라가 붙어 있는 게 보였다.'“설? 성이 설 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