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는 오늘도 해가 중천에 떠서야 전신을 휘어잡고 늘어지는 따스한 잠자리를 겨우 떨치고 일어나 앉았다. 조금 더 부지런을 떨어 어학원이라도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한 지 벌써 어영부영 4개월이 흐르고 있었다. 삶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부르짖으며 뭐든 해야지, 하고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따르릉.'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있는데 전화기가 울렸다. 매번 똑같은 벨소리일 텐데 오늘은 더 유난히 시끄럽게 들렸다. 마치 수다스러운 여자의 성화 소리 같았다. 메이는 엄마의 잔소리를 들을 때처럼 귀찮고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언니, 언니! 얼른 출근해요.]'다짜고짜 달려드는 외침이 누군가 했더니, 미연의 목소리였다.'“또?”'미연이 전화를 한 이유는 분명히 늙고 까다로운 병원 이사장 때문일 것이다. 메이는 그 넓은 병원에, 그 많은 간호사 중에 이사장의 팔뚝에 주사를 놓을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얼마 전에 느닷없이 이사장의 저택에서 호출이 와 시키는 대로 주사를 놓아주고 왔더니 이제는 툭하면 그녀를 불러댔다. 근무 시간이 아닌 때에도 불쑥불쑥.'[말도 마요. 미선이가 갔다가 얼마나 여기저기 찔러댔던지 이사장이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나가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미선이 자르라고 난리쳐서 그 다음에는 영희가 갔는데, 영희도 혈관을 못 찾아서 달달 떨다 나왔대. 알잖아, 그 노인네 성질. 지금 선화가 그 다음번 타자로 갔는데 조짐이 안 좋아요. 그러니까 언니가 빨리 출근해요. 이사장님 댁에서 지명한 사람도 언니라니까! 왜 자꾸 다른 사람이 오느냐고 성질을 내더라고요.]'“그러니까, 그 양반은 왜 꼭 내 근무 시간도 아닌 때만 골라서 영양 주사를 맞느냐는 말이야. 시간외 근무 수당으로 잘 챙겨주지도 않을 거면서. 돈이라도 착착 받아야 이 힘든 일을 하는 맛이 나지 않겠냐?”'메이는 신경질적으로 빗질을 하며 따졌다.'[언니, 알았어. 알았으니까 일단 빨리 출근해요, 어? 지금 이사장님 아들이고 며느리고 다 달려와서 언니를 데려가겠다고 난리야. 무슨 병원 사람들이 저렇게 호들갑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어. 효녀, 열부 났다니까요. 빨리 와요, 아무튼.]'메이는 한숨을 푹 쉬며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이번 달은 오후 근무라 일을 시작하려면 아직 두어 시간은 더 남았다. 하지만 까다로운 병원 이사장 덕분에 출근 전의 여유로움을 완전히 빼앗겨버렸다. 서점에 들러 볼 책을 몇 권 고르려던 계획도, 오랜만에 느긋하게 영양가 있는 식사를 하려던 계획도 모두 포기해야 했다. '그녀는 전화를 받고 나서도 아주 느려터진 동작으로 출근 준비를 했다. 무슨 큰일이 난 것도 아니고 고작 영양 주사를 맞겠다는 것이 아닌가. 한 달에 한두 번씩 하는 그 일이 무슨 대수라고 이 난리들을 떠는 건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사장의 유난스러움과 그 자녀들의 지나친 염려에 그녀까지 호들갑을 떨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분명히 그 영감은 건강염려증일 거야.”'혀를 끌끌 차며 혼잣말을 하던 메이는 대문을 열고 밖에 나서자마자 놀라 걸음을 딱 멈추었다.'“어머!”'대문 앞에 난생처음으로 보는 아주 멋진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까만색 윤기가 잘잘 흐르는 것이 기름통에라도 빠졌다 나온 것 같았고, 방금 뽑아져 나온 것처럼 흠집 하나도 없이 말끔했다. 차에 대해서 잘 모르는 그녀였지만 눈앞에 버티고 있는 것이 아주 고급스런 외제차라는 것쯤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나라 경기는 바닥을 치고 있는데 어지간한 집 한 채 값은 되는 차가 그녀의 초라한 자취집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말 그대로 고급 집이 한 채 굴러다니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아효, 이놈의 세상! 까짓것, 내가 비켜준다.” '메이는 남의 집 대문 앞에 버젓이 세워져 있는 차를 피하느라 몸을 납작하게 옆으로 돌리고 게걸음을 걸었다.'“유메이 씨?”'메이가 겨우 차와 대문 틈 사이를 빠져나와 이제 막 제대로 된 걸음을 떼려는데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차만큼이나 번질거리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나는 저렇게 멋진 사람을 알지 못하는데… 누구?’'그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답 없이 서 있자 남자가 차문을 열고 완전히 밖으로 나왔다. 머리는 정갈하게 빗겨져 멋스럽게 뒤로 넘어가 있었고, 차와 마찬가지로 윤기 나는 검정색 양복에 역시 파리가 낙상할 만큼 반들거리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옷차림새를 대충 훑던 그녀의 시선이 다시 남자의 얼굴로 거슬러 올라갔다.'쿵!'남자의 눈과 마주치자마자 그녀의 가슴에서 쿵, 요란법석한 소리가 울렸다. 가슴 언저리에 매달려 있던 무언가가 커다란 소리를 내며 아래로 뚝 떨어졌다가 공처럼 통통 튕겨 올라 그녀의 심장을 자꾸만 건드렸다.'‘어라? 이, 이게 뭐야? 애인까지 있는 내가 왜 이래?’'아주 이상하고 생경한 느낌에 메이는 가슴속이 아릿하기까지 했다. 쿵쿵쿵, 가슴속에 들어찬 공은 계속 그녀의 심장을 치받으며 튀어 올랐다.'“누, 누구시죠?”'“타시죠.”'남자가 차 문을 열고 그녀가 오르기를 기다렸다.'“어, 어머, 어머머, 제가 왜요? 댁이 누군 줄 알고 제가 그 차를 타요? 안 그래도 요새 흉악 범죄가 얼마나 빈번하게 일어나는데?”'가슴에서만 뛰던 공이 이제는 양쪽 관자놀이에서도 콩콩 울려댔다. 메이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눈앞의 남자가 아무리 가슴이 떨릴 만큼 멋지다고 해도 누군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차에 덥석 올라탈 만큼, 자신은 한심한 바보가 아니었다.'“걱정 말고 타십시오.”'“이것 봐요, 눈이 제대로 달렸으면 나를 좀 똑똑히 보세요. 나는 돈 많은 집의 딸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눈에 뿅 갈 외모를 지니고 있는 여자도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나를 범죄의 타깃으로 찍었다면 포기하시고, 그게 아니라면 다른 누군가와 혼동한 게 아닌지 확인을 해보시라고요.”'메이는 치한을 물리치려던 의도가 오히려 자신을 괴롭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답답하고 형편없는 처지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너무 적나라하게 까발려놓았다는 후회가 밀려왔으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남자는 비웃지 않았다.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띤 그의 얼굴은 아주 부드러웠고 태도는 그야말로 정중했다.'“유메이 씨가 맞죠?”'‘그래, 내 이름이 유메이인 것은 확실하다. 이런 장난기 가득한 이름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메이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제가 모셔가야 할 분이 확실합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얼마 전에 다리를 좀 다쳐서 오래 못 서 있는데, 얼른 타시죠.”'남자는 다쳤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할 만큼 무척이나 길고 튼실해 보이는 다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양해를 구했다.'“아니, 글쎄 댁이 누군 줄 알고 내가 그 차를 타냐고요. 그쪽이 내 이름을 안다는 것 자체가, 내가 그 차를 타야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잖아요. 안 그래요?”'남자의 입술이 보기 좋게 벌어졌다. 그녀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는지 고개도 몇 번 크게 끄덕였다. 메이의 가슴은 묘한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아, 죄송합니다. 저는 제 얼굴을 기억하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제가 댁을 알아요?”'저렇게 잘생긴 사람을 왜 미처 몰라봤나, 왜 기억을 못 하고 있나, 메이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저택에 몇 번 다녀가셨는데… 저는 주병호 이사장님의 심부름을 왔습니다. 선인병원의 중환자실에서 근무하시는 유메이 간호사님을 지금 빨리 모시고 오라십니다.”'메이는 커다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던 기대감이 펑 하고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턱이 빠질 만큼 잘생긴 남자는 ‘선인병원의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는 유메이 간호사’에게 볼일이 있어 온 것이다. 그녀를 타깃으로 삼은 범죄자도 아니고, 지나가는 여자를 희롱하려 작업 거는 날라리도 아니고, 오로지 이사장의 심부름을 받잡고 왔을 뿐이다.'“아… 그러면 그렇다고 진즉에 말씀을 하시지.”'“죄송합니다.”'메이는 그제야 미적미적 걸음을 옮겨 차에 올라탔다. 넓고 아주 깨끗한 차 내부는 겉모양과 마찬가지로 고급스러움을 물씬 풍겼다. 메이는 괜히 기가 죽었다. 그런 마음을 티내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어깨와 허리를 빳빳하게 펴고 턱도 한껏 치켜들었다. '룸미러를 통해 뒷자리를 흘끔거리던 기사가 시동을 걸자 아까 문을 열어줬던 남자가 메이의 옆을 밀고 들어왔다. 그녀는 엉거주춤 왼쪽으로 밀려났다. 메이는 넓은 앞자리를 놔두고 곁으로 바짝 다가앉는 남자의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싫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즐거움에 비교가 안 될 만큼 불편하고 두근거리는 가슴 때문에 좀 괴로울 뿐이었다.'“부끄럽게도 제가 앞자리 공포증이 좀 있습니다.”'남자는 메이의 불편한 심기를 금세 눈치 채고 알아서 설명을 해주었다. 메이는 최대한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남자가 길쭉한 다리 한 쪽을 그녀가 있는 쪽으로 쭉 뻗었던 탓에 메이는 더 안쪽으로 몸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다리가 불편해서인지, 아니면 원래 예의가 없는 사람이라 그런지, 그것도 아니면 다리가 필요 이상으로 길어서인지, 그녀가 최대한 몸을 반대편으로 옮겼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무릎이 자꾸만 그녀의 다리에 와 닿았다. '‘이, 이런!’'메이는 고민이 있는 사람처럼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었다. 다시금 생각해도 참으로 이상한 것은, 이 남자를 처음 보자마자 가슴을 강타했던 그 진동이었다.'쿵! 가슴속에서 정말 쿵, 소리가 났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사실 남자는 아주 잘생긴 얼굴이긴 했지만 평소 그녀가 이상형으로 그리던 스타일은 분명히 아니었다. 그런데 도대체 이 이상한 감정은 뭐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