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 잘 익은 홍시 같은 노을이 방에 내려앉았다. 유리창에는 주택 사이로 붉은 능선이 퍼져갔고 노을은 한없이 깊어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침대 맡에 앉은 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매트리스가 출렁거리며 한쪽으로 기울었다. 설핏 잠을 방해받았는지 지민이 작게 신음하며 몸을 뒤척였다. 그는 지민의 얼굴을 이윽히 들여다보다 천천히 머리를 쓸어보았다. 고운 모래알갱이가 빠져나가듯 가는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다 문득 여자의 머리칼을 한 움큼 손에 쥐어 보았다. 단 몇 년일 뿐인데, 소녀는 어느새 여성이 되어 있었다. 자그마하게 말랐던 몸에 미약하나 굴곡이 졌고, 둥글둥글 아기 같았던 이목구비가 한층 섬세해져 있다. 그는 머리카락을 놓아주곤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잠시 뒤, 뒤척이는 소리와 함께 여자가 눈을 떠 눈앞의 그에 놀란 듯이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 “다……다니엘 씨?”' 그가 지민을 내려다봤다. 흐릿하던 여자의 초점이 점점 또렷해지더니 안에 그를 담는다. ' “깼어요?”' 그가 나른하게 웃으며 여자의 머리칼을 흩트렸다. ' “일어나요. 밥 먹게.” ' 그가 몸을 일으키고 문을 닫고 나가는 걸 멍하니 바라보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방금 전까지 그가 앉아 있었다는 걸 알려주듯 침대보가 움푹 패여 있었다. 여자는 그곳을 무연히 쓸어 보았다. 아직 온기가 배어 있어 기분이 이상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걸까? 그가 자는 모습을 지켜봤을 거란 생각이 머리맡에 다다르자 심장이 불안정하게 뛰었다. 뭐랄까. 말로써 형언하기 어려운 느낌. 심장께에 좀벌레라도 있어 혈관을 타고 기어 다니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슴이 간지러웠다. 그러고 보니 그가 이 방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왜 들어왔을까. 할 말이 있나. 눈을 떴을 때 그가 노을 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것을 떠올리며 그녀도 그처럼 시선을 창 밖에 잠시 두었다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며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 주방은 석양빛으로 충만했다. 이미 요리를 준비를 마치고 그는 고즈넉한 주방 한 편에 서서 안친 밥을 푸고 있었다. 뭉근한 밥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쪽에선 된장찌개가 펄펄 끓어올라 밥 냄새와 함께 된장찌개의 구수함이 공기 중에서 수채화 물감처럼 섞여 맡아졌다. 그녀가 식탁에 자리를 잡았을 때 그가 막 파를 송송 썰어 된장찌개에 올려놓았다. 도마 위에서 춤사위를 놀리듯 두드리는 칼 소리, 뭉근한 밥상, 앞치마를 두른 그의 뒷모습. 고즈넉한 저녁이었다. 지민은 조심스럽게 눈을 감았다 떴다. 턱을 괴고 그런 남자의 뒷모습을 찬찬히 지켜보았다. 꿈처럼 비현실적이라 생각했다. 아늑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기묘하게 불안하면서도 이 꿈에서 깨어나지 않았으면 싶었다. 새하얀 피부. 노란색이라기보단 레몬색에 가까운 머리칼이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하얀 목덜미를 스치며 살랑거렸다. 그의 몸 전체를 이루는 선들은 하나하나 빚어 세공된 유리처럼 섬세하고 유려했다. 뒤로 깔끔하게 넘긴 머리칼 아래로 은색 십자가 피어싱이 빛을 받아 금속성으로 반짝였다. 모델 특유의 슬림한 몸매는 군더더기가 없었고 그래서 뭘 입어도 어색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를 위해 재단되기라도 한 듯 금세 그의 옷이 되어 버렸다. 그는 저 볼품없는 앞치마마저도 잘 어울렸다. 앞치마가 잘 어울리는 남자라……. 고아원에 봉사 온 여대생들이 아기들 기저귀를 갈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 - 앞치마가 어색하지 않으면 분명 가정적인 남자야. ' 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슬며시 감아 보았다. 그녀의 입새로 작은 한숨이 지어져 나왔다. 그가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건 두 달 전쯤이었다.''' 집무실 창틈으로 흘러나오는 부드러운 피아노 건반이 낡은 복도를 휘감았다. 쇼팽의 녹턴 2번이었다. 그녀는 복도를 훔치다 문득 하던 걸 멈추고 창밖을 물끄러미 올려 보았다. 껑충 드높아진 하늘은 더 이상 두껍고 칙칙하던 여름 장마의 질척한 날씨가 아니었다. 가을 옷을 입은 햇빛. 그 속에 부유하는 공기들. 오래되어 낡은 나무 바닥이 쿰쿰한 냄새를 풍기는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하루는 지민의 일상을, 오늘도 그렇게 적셔갔다. ''『 그렇게 적셔갈 거라고 의심의 여지도 없었다. 』'' 창밖을 빤히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이 불현듯 뭔가를 발견하고 그곳에 멈추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관자놀이로 쭉 하고 미끄러져 떨어졌다. 소매로 한 번 훔치곤 천천히 손을 뻗었다. 창가에 다리를 걸치고 이 안을 넘보는 것을 잡기 위해서였다. 거미. 아침에 거미를 보면 손님이 오는 징조라고 했다. 밤에 거미를 보면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그러면…… 그러면, 아침도 밤도 아닌 오후에 보는 거미는 뭘까……. 멍청히 아무런 뜻도 의미도 없는 것들을 헤아려 볼 때였다. 그녀의 몸이 휙하고 무력에 의해 돌아갔다. ' 노란색의 머리카락. '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게 노란색이었다. 가장 처음 그녀에게 인사한 것이 그 샛노란 머리칼이었다. 가볍고 더할 나위 없이 자유로운, 하지만 어딘가 불안정해 항상 위태로운 그런 색. ' 굉장히 수려한 외모의 남자는 고개가 뒤로 한참을 꺾일 만큼 키가 컸다. 빽빽하게 들어찬 숱 많은 속눈썹이 곡선을 그리며 지그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늘한 눈매는 한시도 눈을 떼게 할 수 없는 마력을 풍겼다. 매끄럽게 쭉 뻗은 콧날. 날카로운 턱선. 꾹 다문 입술이 기묘하게도 선홍색이었는데 그 색이 창 예쁘다고 그녀는 뜬금없이 생각했다. 기품. 그래. 그에게선 남들에겐 느낄 수없는 기품이 흘렀다. '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에게서 시선을 좀처럼 떼지 못한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 날렵한 몸매를 감싼 슈트는 보통 남자들이 입는 양복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똑같은 것임에도 좀 더 자유분방한 느낌을 주었다. 남자의 머리가 노란색이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그는 귀에 굉장히 많은 피어싱을 달고서 왕자님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분명 불량스러웠다. 불량한 왕자님. 그래. 양복을 입은 불량한 왕자님이었다. 지민은 그의 얼굴을 감상하느라 너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깜박 잊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조금이라도 숙이면 이마가 남자의 가슴팍에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아. 지민이 놀라 뒷걸음질을 치려는 순간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손목이 끊어질 듯 아파왔다. 지민의 눈동자가 금세 당혹스러움으로 흐려졌다.' - 왜……왜 이러세요?' 누구세요. 가 맞겠지만 어째서인지 그녀의 입에선 누구냐는 말이 맴돌기만 할 뿐 뱉어지지가 않았다. 누구냐는 그 말이 씹히지 않은 채 모래 알갱이가 되어 까칠하게 입안을 돌아다녔다. 마치 뱉으면 안 된다는 듯, 네가 그런 말을 해선 안 되지 않냐는 듯이. ' 그를……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계속 쳐다볼 뿐. 노려보는 건지도 모른다. 기다렸다고. 왜 이제야 나타났냐고. 도대체 그 동안 어디 있었냐고. 정말 네가 맞느냐며. 지민의 눈이 다섯 번 깜박이는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깜박이지 않았다. 강렬한 시선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밤새 달려와 붉게 충혈된 눈에 벌겋게 도그라진 실핏줄이 터질 것처럼 징그러웠다. 그녀를 담은 다갈색 눈동자에 서서히 물기가 차올랐다. 지민이 팔을 뿌리지치 않은 이유는 무서워서 못한 게 아니라 그의 시선에서 달아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남자도 저런 얼굴을 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남자도 저런 얼굴로 누군가를 한없이 나약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걸. 아름다운 눈동자엔 무수히 많은 감정을 품고서 그녀에게 말하고 있었다. 감히 다 말로 꺼낼 수도,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종류였다. 직경 6mm도 안 되는 동공에 어떻게 저 많은 단어를 실을 수 있는지. 누군가를 향해 애타는 눈길로 그는 무언가를 갈구했다. 고통과 아픔, 애틋함과 설렘, 괴로움과 안도. 비이상적으로 흔들리고 있는 눈이 매우 슬프고 충격 받은 남자의 심정을 한 번에 대변해 주었다. 지민은 어떤 말로 그를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가만히 그의 눈을 마주해 줄 뿐. 분명한 것은 눈동자 안엔, 그녀가 들어 앉아 있었다.' 지민은 어쩌면 그가 아까 전화한 손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