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존

이따금 상상한다. 창공을 가르는 비행기가 구름 속으로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면, 혹은 난기류를 만나 끝없이 아래로 추락해 버린다면, 그리고 그곳에 내가 타고 있다면? 간간이 보였다 사라지는 불빛들이 지상의 별처럼 반짝였다.

한국행 비행기, 비즈니스 석에 앉은 남자의 얼굴이 수척했다. 장시간 비행으로 인한 피곤도, 어이없는 상상으로 인한 기우 때문도 아니었다. 정확이 말하자면 좀 전의 상상은 그가 종종 꿈꾸는 악몽의 레퍼토리였다. 수면 중에도 생생하게 뇌리에 남아 마치 실제로 겪은 일인 것처럼 또렷한 악몽. 꿈속에서 그는 항상 살아남았고 그 후엔 어김없이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왜일까. 살아남지 말아야 할 사람이 살아남은 것 같은 괴로움. 괴로움의 이유를 남자는 알지 못한다. 남자의 어머니는 알고 있을까? 출국 전 어머니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꽃이 참 예쁘네요.”

“그렇지?”

남자의 시선은 꽃이 아닌 어머니 해수에게 머물렀다. 곧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손에 들린 꽃보다 고운 자태를 한 여인은 젊은 시절 내로라하는 배우였고 성진 그룹 차 회장을 만나 성진의 안주인으로 그리고 아들의 어머니로 살아왔다.

“지호야 아네모네의 꽃말이 뭔지 아니?”

“글쎄요.”

“속절없는 사랑.”

‘속절없는 사랑?’

남자는 어쩐지 처연하게 느껴지는 단어를 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아직도 내키지 않니?”

“뭐가요?”

“한국 본사로 가게된 거 말이야.”

꽃의 필요 없는 줄기 부분을 잘라 낸 여자가 아들에게 시선을 두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핀 미소가 따듯하고 온화했다.

“조금요. 낯선 곳으로 떠나는 거니까요.”

다 큰 서른 중반의 아들이 마치 세 살 응석받이같이 느껴져 잠시 옛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아들은 성진 그룹 미국 지사를 맡고 있었고 비즈니스에 있어서만은 모든 이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확고했고 철두철미했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차 회장의 냉철한 경영 방식을 많이 닮아 있었다.

“넌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게 아니야. 원래의 네 자리로 돌아가는 거야.”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거라고요?”

“맞아.”

원래의 자리? 그곳에서 본래의 제 모습은 어땠을까. 잃어버린 기억과 그 기억 속에 머물러 있을 과거를 마주할 시간이 새삼 두렵게 느껴졌다.

“두렵니? 너무 걱정하지 마. 한 실장이 널 많이 도와 줄 거야.”

“진 갤러리 한은성 실장 말씀이세요?”

“맞아.”

“그 여잘 왜 그렇게 신뢰하세요?”

낮은 남자의 음성이 잔상처럼 공기 중에 떠돌았다. 한참만에야 여자가 대답했다.

“누구도 신뢰하지 않은 적은 없었어. 믿었던 만큼 실망을 안겨 준 사람만 있었을 뿐.”

아버지인 차 회장이 그중 한 사람이라는 걸 듣지 않고도 짐작할 수 있었다.

“솔직히 도움은커녕 어머닐 대신해 갤러리를 맡을 적임자라는 것조차 의구심이 들어요. 아직 젊고 또 그만한 경험과 실력이 부족할 거예요.”

“지호야. 내가 그 갤러리를 맡았을 때 몇 살이었는지 아니? 겨우 20대 중반을 갓 넘긴 나이였어. 미술을 전공하긴 했지만 해본 거라고 연기뿐이었어. 여러모로 부족하고 미성숙했지. 그래도 지금까지 잘 이끌어 왔잖니.”

“하지만 한 실장은 어머니가 아니에요. 어머니완 엄연히 다르다고요.”

“맞아. 오히려 나보다 더 강하고 성숙한 아이지. 두려움에 맞서 싸워 이겨 낸 아이니까. 두고 보렴. 잘해 낼 거다.”

무협지에 나오는 여전사라도 되는 것인가. 확신에 찬 해수의 말에 지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려움에 맞서 싸워 이겨 냈다고요?”

“그래. 모두 현실을 피해 도망치려 했을 때 그 아이만큼은 홀로 맞서 싸워 이겨 냈어. 피하지 않았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돼요.”

“곧 알게 될 거야.”

갑자기 찾아온 통증에 해수의 말을 듣고 있던 지호가 관자놀이를 손으로 눌렀다. 은성에 대한 얘기로 확신에 찼던 해수의 얼굴이 아들을 향한 걱정으로 바뀌었다.

“괜찮니? 약은 잘 챙겨 먹고 있는 거지?”

“그럼요. 걱정 마세요. 이러다 금세 잦아들곤 하니까요.”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통증이 이제 일상의 한 부분처럼 느껴졌다. 아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인 해수가 목이 꺾인 꽃줄기 아랫부분을 단번에 잘라 내며 읊조렸다.

“꺾인 것일 뿐 죽은 건 아니란다.”

17년 만이었다. 도망치듯 이곳 공항에 내려 미국으로 떠났던 것이, 그리고 한국으로 온 것이. 어머니인 해수의 말처럼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온 것인지는 조금 더 두고 볼 일이었다. 이른 아침, 가을비가 내리는 공항 밖 풍경은 애타게 가을이 물러나길 바라듯 쓸쓸하고 낯설었다.

“형.”

마중 나온 도윤 덕분에 긴장감으로 굳은 남자의 얼굴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미국 지사에서 함께 근무하다 6개월 전 먼저 귀국한 도윤이었다. 이유는 상사인 남자가 돌아왔을 때 조금 더 유연하게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도윤은 어머니인 해수를 제외하고 남자가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침묵 속 두 사람은 잠시 포옹을 하며 서로의 온기를 나누었다. 거의 매일 한국 지사의 전반적인 일을 보고받기 위해 화상 통화를 나누었던 두 사람이었지만 6개월의 부재도 수족처럼 붙어 있던 그들에겐 긴 시간이었던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