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참 지긋지긋하게도 쏟아졌다. 일주일 째였던가, 열흘째였던가. 그 시작이 언제였는지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오랜 시간 비는 내리고, 또 내려 온 세상을 축축하게 만들었다. 늦가을인지 초겨울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가을 냄새가 묻어난 시린 겨울바람과 만난 빗줄기는 거침없이 우산 안으로 치고 들어왔다. '오랜만에 동(冬)정복까지 차려입었는데.'국립 대전 현충원 장교 제 2 묘역. 그 중에서도 윤재의 목적지는 14구역이었다. 63XX번 묘비의 주인 윤해준을 만나러 가는 길에는 언제나 비가 함께했다. 6년 전, 그 녀석이 세상을 떠난 후 사흘 내내 비가 내렸는데, 매해 기일이 되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 6년 째 비가 쏟아졌다.'묘비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얀 안개가 자욱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윤재는 헤매지 않고 단번에 방향을 잡았다. 수많은 사연이 함께 묻힌 이곳에서도 유독 아픈 사연을 지닌, 가장 가엽고 애틋한 곳이 바로 윤해준의 자리였다. 소복하게 자란 잔디를 자박자박 밟아 나가던 윤재는 손에 든 조화(造花) 다발을 다시 한 번 꼭 움켜쥐고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공군 대위 윤해준.''이젠 익숙해질 만도 한데, 여전히 가슴이 시렸다. 높이가 네 뼘 남짓한 묘비 한 가운데 바르게 적힌 윤해준의 존재가 다시 한 번 윤재의 가슴을 헤집어 놓았다. 방 두 칸짜리 BOQ(독신자숙소)에서 함께 먹고 자고 웃고 떠들던 그 윤해준이, 한 사무실에서 비행연구를 하고 함께 비행을 하던 윤해준이 어딘가에서 불쑥 나타나 선배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냐고 물을 것만 같아 자꾸만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되었다.'아직도 귓가에 생생한 그 음성. 맹해 보인다고 했지만 실은 무척 귀여웠던 그 미소. '이 세상 어딘가에 반드시 있을 것만 같아 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해준이 떠났다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나 왔어.”'우산을 접은 윤재는 묘비 옆 작은 항아리에 꽂혀있던 조화를 빼고, 들고 온 새 조화 다발을 꽂은 후 묘비 앞에 섰다. '“시들지도 않는 꽃, 뭘 그렇게 매번 가냐고 구박하지 마라.”'해준의 묘비를 정성스레 쓰다듬는 윤재의 손등위로 빗방울이 떨어져 맺혔다. 진남색의 정복이 비에 젖어 점점 더 짙은 색이 되어가도 윤재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걸음을 옮겨 묘비 뒤편에 선 윤재는 ‘2005년 11월 16일 동해상공에서 순직’ 이란 글자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 진급했어.”'공군 사관학교 출신 전투기 조종사는 1차로 무조건 진급이란 말도 모두 옛말이 되어버린 요즘, 윤재는 엊그제 있었던 진급발표에서 다행히도 1차에 소령으로 진급이 되었다. 선후배들에게 축하전화를 받을 때에도, 가족에게 진급 사실을 알릴 때에도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해준에게 말을 하고 나니 이제야 실감이 났다. '6년 전, 강릉 18전투 비행단 112대대 환상의 콤비라 불렸던 1년차 대위 김윤재와 새내기 중위 윤해준은, 길고 길었던 세월의 터울만큼 그렇게 멀어져갔다.'해주고 싶은 말이 참 많았는데, 입이 딱 붙어버렸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무덤 앞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 잘 도 해대던데……. '윤재는 우두커니 서서 해준의 묘비를 바라보았다. 하염없이 내리는 빗줄기에 온 몸이 흠뻑 젖었지만 우산을 다시 펴지 않았다. 오히려 개운했다. 해준에게 해주려고 기억해뒀던 모든 이야기들이 이 비에 씻겨 내려간 듯해 가슴속 깊은 곳까지 시원해졌다. '하나 둘 이야길 꺼내다보면 다신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까지 꺼내게 될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며칠을 꼬박 앓다가, 괴로워하고, 자책하고, 당분간은 망가져 지내게 될 것이다. 감당하기 힘든 슬픔이 마음을 짓눌러 견디기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찾아올 것이다. 윤재는 그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윤재는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매해 찾아왔다. 해준을 기억하고, 그리워했다. 완전히 잊어버릴 수 없기에, 김윤재의 인생에서 윤해준이란 존재는 지워버릴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윤재는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저기…….”'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면 바람소리에 묻히고 남을 법한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윤재는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그녀였다. 윤재는 단번에 그녀를 알아 볼 수 있었다. '눈을 감아도 눈앞에 아른 거리고, 잠을 청하면 꿈속에 나타나던 그 여자. 꽤 오랜 시간 동안 마음 쓰이게 했던, 해준의 쌍둥이 여동생, 아니 누나 윤소정이었다. '“실례지만 누구……, 시죠? 해준이 동료분이셨나요?”'알아보지 못하는 게 당연한 건데도 윤재는 내심 서운했다. 오히려 기억을 하고 있다는 게 불가능한 건데 욕심이란 놈이 늘 그렇듯 사람을 구차하게 만들었다. '“오랜만이네요. 윤소정 씨.”'“우리가 알던 사이인가요?”'실수하지 않으려는 듯 소정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윤재에게 되물었다. 윤재는 부담가질 거 없다는 듯 밝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소정 씨는 제가 누군지 모르시겠지만, 전 소정 씨를 잘 알아요. 이 녀석 때문에.”'소정은 커다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바짝 얼어버린 소정이 안쓰러웠다. 이만 물러가야겠다고 다짐한 윤재가 짧게 한숨을 내쉬곤 손을 내밀었다. '“다시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요. 또 만났으면 좋겠네요.”'6년 전, 그때 우리가 예정대로 만났더라면……. 약속을 뒤로 미루지 않았다면…….'미련 갖지 말자고, 인연이 아니었기에 이렇게 어긋나버린 것이라고 아무리 위로를 해봐도 스며드는 아쉬움은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그만해 김윤재. 거기까지야.'정말 인연이라면, 언젠간 다시 만나게 되겠지.'그 날이 오면, 그 땐……. '어리둥절해 하는 소정의 손을 잽싸게 낚아챈 윤재가 맑게 웃으며 손을 위아래로 흔들어 일방적인 악수를 나눴다. 찬바람에 꽁꽁 언 작은 손에 아주 작은 온기를 전해주고 아쉬움을 애써 삼킨 채 걸음을 옮긴 윤재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 반갑네. 윤소정…….”'수백 번도 더 불러봤던 그 이름 윤소정. 수천 번도 더 훔쳐봤던 사진속의 그녀는 6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보고 있으면 가슴이 시릴 만큼.'청룡길이라 이름 붙여진 길을 따라 현충관 옆 주차장으로 향하는 윤재의 걸음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하지만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소정을 다시 한 번 보게 되어 마음만은 가벼웠다. 한결 가뿐해 보이던 표정과 똘망똘망 한 두 눈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려 피식 웃음이 났다.'한번쯤은 마주칠 거라 생각 했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긴 했지만 이제라도 만나게 되어 진심으로 기뻤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씩씩해보여서 조금 마음이 놓였다. 가슴 한 구석을 짓누르고 있었던 괜한 걱정덩어리들이 몇 개 정도 내려진 것 같았다. '“고맙다 해준아. 다시 만나게 해줘서.”'그녀와 마주한 시간은 아주 잠깐이었지만, 윤재는 그래도 괜찮았다. 또다시 만날 수 있을 거 란 작은 희망을 가슴 깊은 곳에 꼭꼭 묻으며 빙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