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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은 현관에 버티듯 서서 어두운 거실을 탐색하고 있었다. 여자가 돌아오지 않았다. 휴대폰도 받지 않는다. 전원이 꺼져 있다는 소리만 반복되고 있었다. 그는 짙은 어둠으로 성큼 들어섰다. 아침에 가요. 너무 안 늦게 올게요. 여자가 그렇게 말했던가. '거실 전등을 켜는 손에 신경질이 묻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크게 숨을 쉬었다. 지금 느끼고 있는 정체 모를 불쾌감과 초조함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여자의 집을 서성였다. 그러다 침실 맞은편에 있는 문 앞에 섰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열어 본 적이 없는 방이었다. '제일 먼저 이젤이 눈에 들어왔다. 중간 크기의 캔버스 앞에 등받이가 없는 플라스틱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는 중인 것 같았다. 화폭은 엷은 물빛 바탕으로 칠해져 있다. '그는 가까이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한 가지 색으로 보이는 물빛은 깊고, 얕고, 어둡고, 밝은 빛으로 가닥가닥 겹치고 얽혀 있었다. 이 많은 색의 물빛이 하나의 색으로 보였던 것이다. 고작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작업한 지 며칠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물감이 아직 마르지 않은 상태였고 기름 냄새가 났다. 무영은 한동안 그림을 응시하다가 방을 한번 둘러보고는 침실로 향했다. '여자의 방은 늘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사용한 것 같은. 그래서 어느 것도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는. 마치 호텔 객실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침대에 털썩 걸터앉아 목을 죄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어제도 몇 시간 자지 못했다. 그는 피로했다.'내일부터는 부산에 있을 예정이었다. 한두 번은 중간에 올라올 수 있겠지만 몇 주는 머물러야 했다. 그래서 오늘 여자를 안고 싶었다. 아직도 쉽게 젖지 않는 그 여자를. 하지만 그를 품고서는 천천히 젖어가는. 깊고 따뜻한 늪 같은 여자의 몸을……. '무영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노려보았다. 전등 빛에 눈이 시었다. 깜박깜박. 눈꺼풀을 몇 번 움직이던 그는 의식하지 못한 채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눈을 떴을 때, 파르스름한 새벽빛이 전등불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 속에 도둑고양이 같은 여자가 있었다.'“불 켜.”'그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미안해요. 나 때문에 깼어요?”'여자는 이제 막 돌아온 것 같았다. '“몇 시야.”'여자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보다가 아, 배터리가 다 됐지. 하고는 도로 집어넣었다. 배터리가 다 됐지? 어이가 없어 콧방귀가 저절로 나왔다. '도대체 휴대폰 배터리도 충전 못할 정도로 어디를 싸돌아 다녔던 거야. 동의 없이 24시간 이상 거주지를 이탈할 시. 계약 해지의 사유가 된다. 잊었어? 그러면 위약금은 니가 물어야 하는데. 그동안 돈은 좀 모아 놨나. 겁도 없이 이 밤중에…… 무영은 생각을 닫았다. 머리가 하는 잔소리가 입으로 쏟아질 뻔한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그는 감정을 눌렀다.'하지만 여자를 보고 있자니 자꾸 화가 났다. 아니, 화라기보다는 심술이. 아니, 심술이 아니라…… 채우지 못한 욕구에 대한 불쾌가. 아니, 그게 아니라…… 젠장. 뭐가 이렇게 뒤죽박죽인지.'“좀 늦었어요.”'“좀?” '“길이 멀어서…….”'여자는 지쳐 보였다. 멀었다는 그 길을 내처 걸어온 것처럼. 시선은 그를 향하고 있었지만 아득한 어느 곳을 보는 것 같았다. 어쩐지 슬퍼 보이기도 했고 뭔가에 안도하는 것 같기도 한. 짐작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안해요.”'여자는 웃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나 좀…… 누워도 되요?”'그가 허락할 새도 없이 여자는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가볍게 이는 바람에 여자의 체취가 실려 오자 별안간 욕구가 치달았다. 그에게 등을 보인 여자의 하얀 목덜미가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여자를 품고 싶었다.'무영은 끙 하는 신음을 삼켰다. 본능밖에 남지 않는 짐승이 된 기분이 들었다. 겨우 욕망 하나를 제어하지 못해 동요하는 자신이 못마땅했다.'“그 좀 먼 길이 어딘데?”'말이 불퉁스럽게 쏘아졌다. '“변명을 하려면 깔끔하게 해. 그 좀 먼 길이 어디냐고.”'죽은 듯 고요한 뒷모습에서 가만히 내쉬는 여자의 한숨이 느껴졌다. 지금은 여자를 내버려둬야 할 것 같았지만 무영은 그러지 못했다.'“아! 누굴 만나러 간다고 했지. 그 누가 붙들고 안 놔주기라도 한 건가. 아쉬웠겠네. 시간에 대 오느라 힘도 들었을 테고.”'그때 여자가 천천히 일어나 앉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남아 있는 마지막 자제력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렇게 물었을 터였다. 그 누가 누구야? 남자야? 여자야? '여자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힘없이 입을 열었다.'“왜 이렇게 화를 내요. 스물네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 미안해요. 길이 멀어서…… 좀 멀어서…… 그랬어요.”'여자의 가는 손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동안 머리카락이 참 많이 길었네. 하는 생각을 잠시 했던가. 여자가 가까이 다가와 팔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목을 살며시 끌어안았다. '“기다리는 줄 몰랐잖아요. 알았으면 일찍…… 왔을 텐데. 화내지 말아요. 이제…… 이제는 이런 일…… 다시는…… 안 그래요.”'여자의 가만가만한 목소리가 조용히 귀를 울렸다. '“화난 거 아니야.”'“그래요?”'“내가 뭐 하러 화를 내. 계약 어기면 누가 손핸데.”'“그렇담 다행이구요.”'여자는 조금 떨어지더니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는 그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한 번도 없었던 돌발적인 행동이었다. 무영은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으려고 했지만 여자와 눈을 맞추고 있으려니 픽 웃음이 났다. '그는 여자를 끌어안았다. 여자의 체온이, 한겨울에 따뜻한 보온병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머릿결에서 희미하게 물 냄새가 났다. 모르는 사이 비라도 내렸나. 젖은 흙냄새 같기도 하고 바위그늘의 이끼 냄새 같기도 했다.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는 이 여자가 정말 먼 길을 떠났다 온 것 같았다. 다시는 안 그래요. 하던 말이 단순하게만 들리지 않는 이유를. 지금 여자를 안고 있다는 사실이 안심이 되는 이유를…… 이 여자를 만나고 나서는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그리고 제어할 수 없는 것이 자꾸만 생기고 있는 이유를. 그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미리보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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