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즐거웠어요.” '정말 즐거웠을까? 나는 진심으로 그렇기를 바랐다. 하지만 별다른 내색 없이 그저 지나는 인사인 것처럼 밝게 웃으며 답했다.'“저도 즐거웠어요.”'지금 내 눈앞에 서서 해맑게 웃고 있는 사람은 이은환. 그는 현재 웹에이전시를 운영하고 있고, 나는 그 회사의 웹 기획서를 만들어 주었던 프리랜서 기획자였다. '일을 마치면서 언제 밥이나 먹자는 그의 인사에 꼭 그러자고 답을 할 때만 해도 그가 진짜 연락을 해올 줄은 몰랐다. 네 살이나 어린 그가 데이트란 말을 써가면서 만나자고 했을 때는 그저 농담인 줄로만 알았다. '마지막으로 남자가 집에 데려다 준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내게 이은환과의 데이트는 불안과 설렘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집 앞까지 모셔다 드릴게요.”'괜찮다는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뜻 차에서 내려 우리 집 앞 아파트 현관까지 따라왔다. 그는 내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조심히 들어가세요.”'“집 앞인데요, 뭘. 고마워요.”'“음, 다음에 또 봬요. 꼭.”'자신이 한 말이 쑥스러운지 코를 슥 비비며 돌아서는 모습이 새삼스레 귀여웠다. 그렇게 뒤돌아 가는 모습을 잠시 넋 놓고 보고 있는데, 이은환은 가던 걸음을 돌려서 손을 흔들었다. 같이 손을 흔들어 줬더니 활짝 웃으며 양손을 마구 흔들고 먼저 가라는 손짓을 보냈다. 여기까지면 됐다 싶어서 고갯짓으로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어려서 그런지, 원래 사람이 그런지 하는 짓이 참 예쁘다. '네 살 어린 남자를 두고 늙은이 같은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스워서 피식거리며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멍하니 점점 작아지는 숫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조금 비켜섰더니 어깨 위에 큰 손이 올라왔다. 가슴이 철렁했다. 순간적으로 뒤를 돌아봤더니 건들거리면서 히죽거리는 익숙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같은 아파트에 사는 대학 동기 서범진이었다.'“어이고, 안소명 씨. 팔자 좋으세요.”'“아, 뭐야. 놀랐잖아!”'“나 저기 숨어서 다 봤어.”'“뭘 봐?”'“아우, 너 좋아 죽더라. 쟤 누구야?”'“알아서 뭐하게.”'“아니, 뭐. 네가 또 어느 남자한테 농락당하나 싶어서 그렇지.”'“이따위로 농락하는 놈 너 빼고 없거든. 그러니까 좀 꺼져라. 응?”'“싫어. 그 재미없으면 어떻게 살라고.”'신 나서 놀리는 서범진을 무시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서는데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봉지 소리가 들렸다. 열 시가 훌떡 넘은 시간에 굳이 그가 움직였다면 딱 두 가지다. 담배가 떨어졌거나, 맥주가 급했거나. '담배라면 상관없지만, 맥주라면 분명히 날 끌어들일 게 뻔해서, 서범진이 지금 여기 서 있는 이유 같은 건 묻지도 않고 우리 집이 있는 11층과 범진이 사는 8층을 같이 눌렀다. 그러자 뒤에서 범진이 긴 팔을 뻗어 8층 버튼을 다시 눌러 꺼버렸다.'“뭐야?”'내가 쳐다보자 범진이 긴 눈으로 웃으면서 내 어깨를 툭 치며 검은 봉지를 흔들었다. '“친구야, 같이 먹자.”'“친구 좋아하시네. 됐거든.”'내가 다시 8층을 누르려고 손을 뻗자 범진이 내 손을 쳐내며 말했다.'“그렇잖아도 너 기다렸단 말이야.”'“왜?”'“나 오늘 너랑 상담할 게 있어. 좀 심각해.”'“하나도 안 심각해 보이는데?”'“심각해. 들어가서 얘기하자.”'“무슨 일인데?”'“엘리베이터에 서서 할 얘기 아니야.”'범진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하지만 속을 내가 아니다. 아마 저러고 우리 집에 와서는 별 얘기 아닌 걸로 심각한 척하다가 술이나 먹자고 졸라대겠지. 뻔한 패턴이다. 그러나 그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범진이를 거부하지 못한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약한 건 바로 서범진 이 자식이다. 빌어먹게도.'“전신 추리닝 빼입고 검은 봉다리 들고 진지한 척하면 내가 믿겠냐?”'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문을 열자마자 거실과 작업실에 켜진 불이 보였다. 순간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난 오늘 거실 불을 켠 적이 없다. '서범진! 오늘도 나 없는 집에서 놀고 있었구나! '나는 뒤따라 들어오는 범진을 째려보고 잔뜩 독 오른 목소리로 쏘아줬다. '“너, 나 없을 때 우리 집 와서 놀지 말라고 했지! 우리 집이 무슨 동네 놀이터야?”'내가 버럭 화를 내자 범진은 배시시 웃으면서 작게 ‘미안해’라고 말하고는 후다닥 내 작업실로 뛰어 들어갔다. 아마도 내 작업실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겠지. '회사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프리랜서 기획자들 몇몇이 들락날락하며 함께 일하는 작업실을 집 안에 만들어 겸사겸사 혼자 살고 있는 나와는 달리 범진은 누나네 식구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퇴근 후에 누나의 잔소리와 놀아 달라는 조카의 투정을 피해서 우리 집으로 자주 피신해 오곤 했다. '처음 독립을 계획하고 있을 때부터 범진은 자기네 아파트 단지로 오라고 졸랐었다. 엄한 곳에 혼자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오긴 했지만, 범진의 간섭이 이 정도로 심할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다. '에휴, 내 팔자야. 비밀번호를 바꾸던지 해야지.''나와 범진은 대학교 1학년 때 과 OT에서 처음 만났다. 그리고 아주 애석하게도 난 그에게 첫눈에 반했다. 어릴 때부터 미소년에 열광했던 내가 미소년들과 거리가 한참 먼 범진에게 어떻게 한눈에 빠졌는지는 아직도 미지수다. 하지만 범진이 그 길게 찢어진 눈으로 눈웃음을 치면서 손을 내밀었을 때, 이미 게임은 끝나 버렸다. 그 얼굴에서 후광을 봐 버렸으니까.'한눈에 범진에게 반한 나는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었다. 그 호의는 물론 범진이에 대한 흑심을 깔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서범진이 그것을 호의라고만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취미와 관심사가 비슷했던 우리는 서로 통하는 게 많아서 금방 친구가 됐다. 남녀를 떠나서 농담코드가 잘 맞았다고나 해야 될까, 그냥 함께 있는 것이 재밌었다고 해야 될까. 하여튼 그랬다. 우리는 실과 바늘처럼 붙어 다녔다. 범진이 제대를 하고 나서 바로 여자친구를 사귀기 전까지 말이다. '그가 여자친구를 사귀었다는 말에 나는 상처 받았지만, 그가 부르면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마음을 죽이고 그를 안 보는 것보다는 마음이 아파도 그를 보는 게 좋았으니까.'결국 그와 나는 친구로 남았지만 만약 우리에게 적절한 타이밍이란 것이 있었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발전된 관계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늘 빗겨 있었다. '처음에 범진이 내게 손을 내밀었을 때는 이 안정적인 관계를 섣불리 연애라는 불안한 관계로 깨 버릴까 봐 무서워서 모른 척했었다. 당시 CC라 불리는 것들의 불같은 만남과 초라한 종말을 너무도 많이 봐왔기 때문이었다.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간 범진과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나는 그에 대한 확신이 섰다. 그제야 범진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그의 옆에 다른 여자가 서 있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여자친구의 등장에 나는 그저 축하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후에 여러 번 바뀌는 범진의 여자친구를 보면서 적어도 나는 계속 그의 옆에 있을 수 있음을 감사했다. 친구란 허울도 가끔은 좋다고 생각하면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작업실로 들어갔더니 이미 범진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캔 맥주를 마시며 신 나게 게임을 하고 있었다. '“할 말 있다며, 심각하다며.”'“만렙의 길은 언제나 심각하지.”'“내가 말을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