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당신이 피운 꽃

지금이야 익숙해졌지만 처음에는 남자와 백화점에 온 상황 자체가 어색했다. 그는 이것저것 골라주며 즐거워 보였지만, 그녀는 신체사이즈를 자신만큼이나 알고 옷을 골라주는 상황이 불편한 마음에 건성으로 대꾸했다. 마침내는 우현이 내가 창피한 거냐고 심통을 부렸더랬다. 어울리지도 않는 앙탈에 웃음이 터졌던 기억이 있다.'그래도 오늘은 쇼핑이 즐겁지만은 않다. 의영은 자신의 차림새를 새삼 내려다보았다. 땀에 젖어 끈적거리는 트레이닝복 차림에 길게 구불거리는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하나로 질끈 묶고, 워터베이스 파운데이션만 살짝 바른 얼굴이 창백하다. 부잣집 딸내미 행세를 시작한 후 이런 꼴로 밖을 나다닌 적이 없다. 누구 아는 사람 만날까 봐 두려운데, 옆에서 여유롭게 콧노래 중이신 남편은 노타이긴 하지만 번듯한 셔츠에 미끈한 실루엣의 정장팬츠 차림이다. 평소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 쓰는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남자가 보통 사람보다 월등하다 보니 새삼 그 갭에 마음이 쓰인다. 이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여자라는 눈초리를 받으면 어쩌지. 아니, 그 전에 커플로도 보이지 않는다면. 의기소침해지려는 자신이 싫지만 의식할수록 그 차이가 두드러진다. 그녀는 처음 백화점에 들어온 여자처럼 주변을 마구 의식하면서 걸었다.'“저기 옷이 당신한테 어울리겠다.”'우현은 어때, 하며 그녀의 표정을 살피는 기색이었지만 의영으로썬 이 트레이닝복을 벗을 수만 있다면 잠옷과 드레스 외의 어지간한 옷은 다 소화해줄 각오였다. 다행히 그는 얌전하고 세련된 스타일의 옷을 파는 매장으로 들어섰다.'“이 색깔은 좀 너무 튀고, 이 디자인은 본인하고 따로 노는군.”'우현은 쓸데없이 너무 진지하게 이 옷 저 옷을 맞춰보며 좀처럼 현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잠시 어울려주던 의영은 온 얼굴로 웅변했다. 옷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라니까. 트레이닝복 위에 대 보면 무슨 옷이 어울릴까. 이때 눈치 없는 점원이 끼어들며 적극공세를 펼쳤다.'“어머. 남자 친구 분이 정말 감각 있으시네요.”'“남자 친구 아닙니다. 남편입니다.”'여전히 별 중요하지 않은 데서 집요하다. 점원에게 그들이 부부건 아니건 뭐가 중요하다고 일일이 정정을 하는 건가. 점원이 두 손을 모으며 연극배우처럼 감탄사를 내뱉었다.'“어머어머. 두 분 다 참 선남선녀세요. 남편 분이 다정하셔서 고객님은 참 좋으시겠어요. 보통 남자 분들은 ‘네 마음에 드는 거 적당히 사던지’ 하다가 하나 고르면 ‘그래서 얼만데?’ 그런 표정이거든요. 고객님들을 하도 많이 봬서 잘 알죠.”'“그러니까 이 옷이 더 나을 것 같지 않습니까? 내 부인은 부드러운 색감의 옷이 잘 어울리거든요.”'“난 이게 좋아요. 지금 입을게요.”'점원과 우현이 뜨거운 감자로 그녀를 안주 삼아 씹기 시작하자 의영은 덥석 옷을 집어 채 탈의실로 달려들었다. 그녀가 엷은 코코아색 셔츠에 푸른색의 팬츠를 입는 동안 탈의실 밖에서 점원과 우현의 대화가 간간이 이어졌다.'“부인을 정말 사랑하시나 봐요. 감각도 있으신 데다 다정하시고, 부럽네요.”'사심이 넘치는 점원의 뉘앙스에는 완전히 무심한 우현이 한껏 뿌듯한 목소리로 되받았다.'“완전히 푹 빠졌거든요.”'바지를 꿰어 입던 다리가 꼬일 뻔했다. 정말 저 남자 때문에 창피해서 이 박스 안에 기절하고 싶다. 빨리 이 매장을 떠나려는 일념으로 허둥허둥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우현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기우듬하게 기울였다.'“으으으으음. 나로썬 좀 더 밝은 색으로 입어줬으면 싶지만, 뭐 당신 취향이 그렇다면.”'불만족스러움을 길게 늘인 신음으로 표현한 그가 한쪽을 가리켰다.'“신발은 저것으로 하지. 괜찮아?”'“괜찮아요.”'밝은 코코아색과 오렌지색으로 이루어진 부티다. 발등을 두 군데서 고정하고 발목 부분을 감싸는 신발은 다소 중성적인 느낌을 주었지만 신고 보자 색과 디자인 모두 산뜻하게 잘 어울렸다.'그는 미적거리며 원피스와 재킷을 또 골라 집다가 그녀에게 등을 떠밀려 겨우 계산대 앞에 섰다. 의영은 하릴없이 매장 안을 둘러보다 겨울옷이 여기저기 보이는 데 시선이 미쳤다. 니트류며 코트, 머플러가 때 이른데도 포근해 보인다. 별 생각 없이 매장 앞 마네킹에 입혀놓은 민트색 코트를 만지작거렸다. 벌써 겨울이 다가왔구나.'“이것도 잘 어울리겠다. 우리 의영이는 피부가 하얘서.”'“그래요?”'“응. 입어 봐.”'어울린다는데 싫을 리 없지. 의영은 사양하지 않고 입었다. 몸매가 여성스럽게 드러나는 디자인으로, 맞춘 것처럼 그녀의 몸에 잘 맞았다. 거울 앞에 선 그녀가 살짝 뒤로 돌며 물었다.'“괜찮아요?”'“응. 인형처럼 예뻐.”'으아악! 기겁한 얼굴을 하는 부인에게 엄지를 치켜세우고 싱글싱글 웃더니 이것도 계산해주세요, 한다. 매장을 나오면서도 괜스레 민망한 마음에 얼굴 옆으로 손날을 세우며 그녀가 소리죽여 항의했다.'“제발 그런 말 좀 태연자약하게 하지 말아요.”'우현이 걸음을 멈추며 몹시도 진지한 얼굴로 정색했다.'“뭐? 아름다운 걸 아름답다고 말하지 못하는 건, 호형호제를 못한 홍길동처럼 역사적 문학적인 비극이라고. 그럼 나는 억눌린 감수성을 한껏 발휘해서 신의영의 미모를 찬양하는 시를 사내보에 반포할지도 몰라.”'말로 이 남자를 이기려 한 자신을 탓해야지. 의영은 입을 다물고 휑하니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전히 뭔가 찝찝한 그녀의 내면을 우현이 대변했다.'“참, 속옷은……. 알았어, 알았어. 노려보지 말라고.”'그녀가 또박또박 걷기 시작하자 등 뒤에서 “속옷 찝찝할 텐데…….” 라고 웅얼거리는 소리가 슬그머니 따라붙는다. 속옷 매장까지 이 남자를 달고 들어가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은 그녀가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었다.'“카드, 줘요.”'“왜?”'“속옷 사게요.”'에헤, 하고 의뭉스러운 신음을 흘리면서 우현이 눈치를 본다. 그러다 그녀가 돌처럼 단단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자 마지못해 손바닥 위에 카드를 놓아주었다. 고맙다고 무뚝뚝하게 인사하고 돌아서는 그녀의 뒤에 남겨진 우현이 마지막 발악처럼 중얼거렸다.'“내 여성 속옷 취향에 대해서 한마디 해도 될까?”'이번에도 당당하게 무시했다. 말로는 지니까 가끔은 훈육의 의미로 무시, 라는 교훈을 얻은 그녀가 회심의 미소를 지은 걸 등 뒤의 남자는 모를 테다.

미리보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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