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깐하고 말 많기로 유명한 오성환 교수의 수업은 오늘도 정해진 시간을 훌쩍 넘겨 버렸다. 평소 같으면 살짝 빠져나가기라도 할 텐데 조기졸업을 위한 계절학기 수업이라 서현도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하지만 마음이 초조한 탓에 강의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자,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아직 리포트 제출하지 않은 학생은 내일 아침까지 내 책상 위에 가져다 놓도록.” '오 교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둘러 가방을 챙겨들고 강의실을 빠져나오자 후끈 달아오른 8월의 날씨가 숨을 턱 막히게 했다.'“서현아!”'고개를 돌리니 가영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이미 졸업한 지 오래인 다른 친구들과 달리 영문과 조교가 된 가영은 그나마 서현이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친구였다.'“아, 가영아.”'친구에게 알은체를 하면서도 서현의 발은 계속 움직였다. 가영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렇게 서둘러도 교대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는 것이 촉박한 탓이었다.'“민서현! 좀 기다려 봐. 할 얘기 있단 말이야.”'높이가 족히 한 뼘은 될 것 같은 킬힐을 신은 가영이 발이 아픈지 인상을 찌푸리며 다가왔다.'“아, 미안. 나 알바 가야 되는데, 급한 얘기야?”'“이 언니가 물 좋은 클럽을 하나 발견했단 말이야. 애들이랑 이따 만나서 가기로 했는데 너도 같이 가자.”'자신의 걸음에 맞추느라 여전히 반은 뛰고 있으면서도 발이 아프다는 사실까지 까맣게 잊은 듯 가영이 눈을 반짝였다.'“다음에. 오늘은 니들끼리 가.”'“야! 우리 벌써 한풀 꺾인 스물여섯이야. 이 꽃다운 청춘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 같아? 그러지 말고 오늘만 같이 가자. 솔직히 너, 그런데 한 번도 간 적 없잖아. 일 년 365일 그놈의 알바하느라고.”'가영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서현은 그저 빙긋 웃었다. 그러자 가영이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눈웃음과 함께 윙크를 날리며 사정했다.'“그러니까 오늘만 쉬어. 응? 그까짓 알바, 잘리면 다른 데 구하면 되잖아.”'그까짓 알바라. 서현은 저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수업이 있는 주중엔 오후 다섯 시부터 새벽 12시까지 해서 일곱 시간, 수업이 없는 날엔 24시간을 꼬박 일할 수 있는 자리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까짓 알바일지 모르지만 아버지마저 돌아가신 지금, 복학생 서현에게는 생활이 달린 절박한 일이었다. 하지만 가장 친한 친구라 할 수 있는 가영에게조차 시시콜콜한 집안 사정을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미안해, 가영아. 다음엔 꼭 같이 갈게. 알았지? 나 먼저 간다!”'일부러 더 밝은 표정으로 힘차게 손을 흔들며 그 자리를 벗어난 서현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헉! 나는 죽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편의점까지는 2km. 평소엔 버스비도 아까워 걸어 다녔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택시라도 타야 할 모양이었다. 그러나 택시를 탄다 해도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판이었기에 서현은 택시 정류장을 향해 있는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편의점 앞에 도착한 서현은 재빨리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교대 시간이 지난 상태였다. 지리도 제대로 모르는 어수룩한 택시 기사만 아니었더라도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을 텐데……. 오늘도 눈에 쌍심지 켤 점장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럴 수만 있다면 이대로 어디론가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다. 그러나 어쩌랴. 목구멍이 포도청인 건 자신인 것을. 서현은 최대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섰다.'“이거 봐요, 민서현 씨! 이번이 벌써 몇 번째에요? 한두 번도 아니고 이거 정말 왜 이래요?” '역시나 서슬 퍼런 점장의 목소리가 그녀를 맞았다.'“죄송합니다, 점장님.”'“내가 교대 시간은 늦지 말아 달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요? 내 말이 그렇게 우스워요?”'가뜩이나 좋은 인상도 아닌 점장이 삿대질까지 해대며 숨조차 쉬지 않고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러자 편의점 안에 있던 손님들도 힐끔거렸다. 서현은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그럴 리가요, 점장님. 오늘은 진짜 늦지 않으려고 택시까지 탔는데 글쎄 기사 아저씨가 지리를 ……”'“그딴 변명 듣기 싫고. 자꾸 이럴 거면 다른 데 알아봐요. 나도 참는데 한계가 있으니까.”'점장의 반응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경했다. 하지만 요즘처럼 취직난이 최고조에 이른 때에는 이런 알바 자리조차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 더구나 그만두게 되면 당장 생활고가 눈앞이었기에 서현은 몇 번이고 고개 숙일 수밖에 없었다.'“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절대 늦는 일 없을 거예요. 정말이에요, 점장님.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봐주세요.”'비굴하리만치 간절하게 사과를 한 탓일까. 점장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민서현 씨! 정말 이번이 마지막인 줄 알아요.”'잔뜩 주눅이 들어 있던 서현은 그제야 씩씩한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감사합니다, 점장님! 진짜 열심히 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목청을 높였던 것이 민망했던지 점장은 몇 번이나 ‘흠흠’ 헛기침을 해대며 입고 있던 앞치마를 벗어 카운터 위로 벗어던졌다.'“들어가세요, 점장님.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활기차고 생기발랄한 모습으로 인사를 했지만 점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쌩하니 가게를 빠져나갔다. 서현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러나 점장이 벗어 놓고 간 앞치마에 팔을 꿰어 넣는 순간 왈칵 설움이 북받쳤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비참하지는 않았었는데……. '어릴 적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해 할머니와 아버지 손에서 자란 서현이었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작은 하도급 업체를 운영하신 아버지 덕에 부족함도 없었고, 자애로운 어머니상은 아니지만 5년 전 아버지의 재혼으로 엄마의 빈자리도 채워졌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업은 곧 납품하던 회사가 부도가 나며 난항을 겪다가 결국엔 빚만 남긴 채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도 털털하고 소박한 성격답게 언제나 긍정적이셨던 아버지는 트럭 장사라도 해보겠다며 거리로 나서셨다. 그때가 첫 휴학이 시작된 때이기도 했지만 그때만 해도 서현은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4개월 전 장사를 나갔던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말이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아버지의 소식을 들은 할머니마저 쓰러져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판국이다 보니 학비는 자신이 번 것으로 충당했다 해도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새엄마의 수입만으로는 생활에 곤란을 겪고 있었다. 더욱이 새엄마의 말로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새로운 동네로 옮겨 개업한 식당이 아직 자리가 잡히지 않아 무척이나 어렵다고 했다. 그러니 힘들어도 조금만 더 버텨야 했다. 이제 계절학기만 마치면 졸업을 할 수 있으니 운이 좋다면 곧 취직을 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러면 한결 숨통이 트일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