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시작은 선계에서부터였다.'시후는 느닷없이 나타나 목갑을 내미는 스승, 화선(花仙)을 올려다보았다. 화선이 명령했다.'“먹어라.”'아름다운 스승의 미모를 곁눈질하며 시후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그의 스승 화선은 인계, 명계, 선계의 3계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선인 중 하나였다. 허나 민폐와 해악을 사방에 끼쳐 존재하는 것만으로 재앙이었다. 그러니 스승이 내민 목갑 속의 신비한 환단에서도 스승의 꿍꿍이속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지사.'“먹으라고 했지 않느냐.”'화선은 거듭해서 말했다.'“좋은 거다. 선력도 높여 주고 도력도 증강시키는 효과가 있지.”'‘믿겠냐?’'시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당할 만큼 당했다. 자신의 스승은 저런 것을 대가도 없이 줄 만큼 착한 선인이 아니다!'“그게 뭐든 안 먹겠습니다!”'“그럼 인세의 시간으로 180년 정도 더 수련하도록 해라. 수련하기 싫으면 먹어라.”'일말의 고민도 없이 말하는 화선의 말에 시후는 두통이 일 지경이었다.'“스승님?”'정확히는 ‘스승 놈’으로 부르고 싶었지만 애써 참기로 했다. 시후는 따졌다.'“벌써 인세의 시간으로 40년씩이나! 수련해 왔습니다. 중간계에 절 처박아 두고 이게 뭐 하시는 겁니까! 저나 저보다 늦게 중간계에 오른 동기들이나 다른 녀석들도 하산하지 않은 이상엔 다들 하급선인 이상이 되어 선적에 올라 도를 닦고 있습니다! 선계에 다들 갔다고요! 저만 선인이 못됐단 말입니다! 왜 저만 여기에 처박혀 있어야 하는 겁니까! 180년은 또 누가 계산한 거냐고요!”'무릇 세상은 크게 3개의 부분으로 나눈다. 하늘 위 선인들이 사는 선계(仙界), 사람이 사는 인계(人界), 지하 깊은 곳에 죽은 자들이 가는 명계(冥界). 그중 선계에 속하되 인간세계와 가장 가까운 곳을 따로 떼어 중간계라 일컫는데 이곳은 선인이 되기 위해 등선한 인간들이 도를 닦고 수련하는 곳이었다.'중간계의 시간은 인계보다 두 배는 더 느리게 흐르는 데 시후는 중간계에서 20년, 인계의 시간으로 40년간 도만 닦았다. 선력이 너무 넘쳐서 선인이 되기엔 충분했지만 스승 덕분에 아직 우화등선도 못하고 허송세월만 보내는 중이다. '화선은 그걸 설명해 주기는커녕 콧방귀만 뀌었다.'“내가 까라면 까는 거다.”'“스승님! 너무하잖습니까!”'스승과 제자 간에 한바탕 말싸움이 벌어졌다.'얼마 후 화선은 자신의 처소인 문정각에 틀어박혔다. 뒤끝이 긴 스승을 위해 시후는 스승이 잡아 온 커다란 생고기를 요리해 바치기로 했다. 좋든 싫든 스승은 굶으면 포악해지니 일단 먹이고 달래야 했다. '선인이라면 무릇 몸을 정결하게 하고 화식을 피해야 하거늘 스승은 화식을 금하는 대신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날고기를 즐겼다. 그것도 육해공 가리지 않았다. 스승이 잡아온 고기가 무엇인지 시후는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잠시 쌀을 가지러 뒤주에 다녀온 사이 커다란 소반 위에 썰어 둔 고기들이 없었다. 고기의 행방을 좇던 시후는 반빗간 앞에서 입가에 나른히 피를 훔쳐대는 화선을 발견했다. '“벌써 다 드셨습니까.”'“배가 고팠거든.”'시후는 또 깊은 한숨을 쉬며 군청색 머리칼에 하얀 백옥 같은 얼굴, 누구보다 깊은 바다색 눈동자를 가진 스승을 응시했다. 화선은 참으로 우아해 보였건만 아아, 통탄스럽다. 저 입가의 선명한 피나 닦았으면 좋으련만. '“자아,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시후 놈, 차를 끓여라.”'반빗간을 대충 정리한 시후가 스승을 따라가 한숨을 쉬며 차를 끓여내는 동안, 화선은 제강(帝江)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뜬금없긴 했지만, 제강에 관한 이야기는 짧게 요약하자면 이랬다.'태초의 제강은 세계의 혼돈을 품은 생물이었다. 혼돈이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그에게는 눈이나 코, 입이나 항문 같은 구멍들이 전혀 없었고 심지어 머리도 없었다. 크고 동글동글한 몸통에 여섯 개의 다리와 두 쌍의 날개만이 있었다. 이 괴악한 생김새를 가지고도 제강은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세상에서 멋진 춤을 추었다고 한다.'제강의 춤과 노래를 좋아하는 선인들은 제강을 위해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 맡을 수 있는 코와 입과 항문을 만들어 선물하기로 했다. 하루에 한 개씩, 그들은 제강의 몸에 일곱 구멍을 뚫었다.'제강의 몸에 구멍이 뚫리자 그 사이로 세계의 혼돈이 빠져나왔다. 결국 7일이 지나 일곱 개의 구멍을 갖게 된 제강은 모든 혼돈을 잃은 채 그 속이 텅 비어 죽고 말았다.'선인들은 제강을 되살리기 위해 영생의 천도복숭아를 구해 와 제강의 몸에 뿌렸지만, 혼돈을 다 잃어버린 제강이 되살아난 것은 무려 만 팔천 년 뒤의 일이었다.'예전과 달리 흉포해진 제강은 되살아나자마자 모든 세상을 파괴하려 날뛰었다. 제 몸을 채웠던 혼돈이 없어져 사리 분간을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강의 혼돈은 만 팔천 년 사이 광활한 우주가 되어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선인들은 혼돈을 대신할 것을 찾아 제강의 안에 채우기로 결정했다. 선택된 것은 혼돈과 비슷한 성질의 꿈이었다. '선인들은 꿈을 가져와 제강을 채웠다. 제강은 되살아난 뒤 영원한 꿈을 꾸며 깨어나지 않게 되었다. 선인들은 지금도 인간계로 먼 여행을 떠나 달콤한 이야기와 꿈을 채집해 온다. 화선도 마찬가지였다. '“제강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북주국 귀왕과 화비의 이야기지.”'“그래서 어쩌란 말씀이십니까?”'사설이 너무 길었다. 지루해진 시후는 말을 잘랐으나, 구름을 베고 누운 화선은 여전히 태연했다.'“세상은 평화로울 만큼 심심하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없어. 그래서 제강은 아주 유쾌하고 재미있고 새롭기까지 한 꿈을 원해.”'이후 화선은 하계에서 무방비 상태로 추락했을 경우, 선인들이 취할 수 있는 생존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시후는 스승의 장광설을 흘려들으며 스승의 생각을 파악하려 애썼다.'그때였다.'“시후 놈아.”'“네?”'시후가 대답하며 돌아보는 찰나, 화선은 잽싸게 시후의 입속으로 환단을 던져 넣었다. 시후는 냉큼 입안에 들어온 환단을 뱉어내려 했지만 환단은 의지를 가진 것처럼 스스로 입안에서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식도를 타고 속에서 불길이 이는 느낌에 시후는 자신의 목을 감싸 쥐었다. 그 열기는 점점 안으로 퍼져 나갔다. 시후는 타는 듯한 갈증에 꺽꺽대며 긴 불길을 토해냈다.'두 눈이 흐려졌지만 시후는 스승이 있을 방향을 노려보았다. 몸이 불타는 것 같았다. 말을 할 수도, 몸을 제대로 가눌 수도 없다. 한데!'―오오오! 완벽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