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집 안. 아무도 없는 듯 집 안의 적막함을 뚫고 누군가의 손이 아주 자연스럽게 현관문 밖에 붙어 있는 비밀번호를 익숙하게 누른다. 디리링. 비밀번호가 해제되는 짧은 신호음이 울리고 이내 들어서는 한 남자. 자기 집을 배회하듯 그의 걸음은 성큼성큼 망설임이 없다.'달칵, 집 안에 있는 세 개의 방문 중 하나를 열고 들어서니, 아니나 다를까 어질러진 작업대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책상 옆에 널브러져 있는 아담한 체구. '작은 얼굴에 안대를 착용한 채 깊은 잠에 취해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여전히 한번 잠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기세다. 그가 ‘쯧쯧쯧’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녀에게로 단걸음에 다가간 그가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작업대 위에 놓여 있는 종이뭉치들.'“다행히 날짜는 맞췄군.”'혼잣말을 내뱉은 남자가 이내 깊은 잠이 든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가 신고 있는 덧버선을 슬슬 잡아당겨 벗기기 시작했다. 덧버선 두 짝을 쉽게 벗겨내자, 그녀의 작은 맨발이 드러났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가 왠지 자신의 양발이 시린 듯 발가락을 꼬물거렸다. 그 모습에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이내 그 부드러운 미소가 익살스런 표정으로 바뀌더니 곧 그녀의 안대를 슬쩍 앞으로 당겼다가 탁 놔 버렸다.'“아!”'그녀의 입에서 짧은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아이, 씨.”'그러더니 곧 짜증 섞인 웅얼거림이 새어 나온다. 이내 안대를 머리띠처럼 자신의 이마 위로 걸쳐놓은 그녀가 자신 앞에서 장난스레 웃고 있는 남자를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바라봤다. 곧 그녀가 피곤한지 하품을 쩍 해댔다.'“언제 왔어?”'“지금 막.”'“원고 봤어?”'그녀의 반밖에 뜨지 못한 눈이 웃긴지 남자가 웃음을 멈추질 못한다. 그런 그를 향해 입술을 삐죽인 그녀가 다시 한 번 물었다.'“원고 봤냐구우.”'“응, 오자마자 봤어. 챙겼어 벌써.”'원고를 챙겼다는 말에 이내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덧버선을 낚아챈 그녀가 다시 자신의 발에 그것을 껴 신었다. 그리고는 살포시 눈앞에 있는 그를 밉지 않은 눈길로 노려본다.'“야, 강승우!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언제까지 제멋대로 들어올 거야? 비밀번호 확 바꿔 버릴까 보다!”'그녀의 핀잔 아닌 핀잔에 승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얌마, 니가 여자냐? 지도 알면서 한 번씩 꼭 저런다. 지구상에 내가 유일하게 여자로 안 보는 사람, 우리 엄마랑, 너 이단비, 딱 둘이다. 그리고 너 이 촌구석에서 서울까지 고물 경차 몰고 털털거리면서 올 필요 없이 내가 직접 니 원고 받으러 오는데 감지덕지해야지.”'그의 단호한 말에 그녀의 입술이 알게 모르게 쌜쭉거렸다. 단비가 곧 승우를 뒤따라 일어서며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우유 마실래?”'어느새 냉장고 앞에 서 있는 승우가 단비를 향해 우유를 내밀어 보였다.'저건 꼭 지네 집처럼 행동해.'너무나 자연스러운 그의 행동이 익숙한 단비지만, 가끔 승우를 볼 때면 이곳이 자신의 집인지 그의 집인지 착각이 들 정도다.'“컵에 반 컵만 따라 주라.”'식탁의자에 털썩 앉은 단비가 머그잔에 우유를 따르는 승우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봤다.'잘 차려입은 정장이 그의 몸을 알맞게 감싸 주고 있었다. 180센티 조금 넘는 키에 늘씬하게 잘빠진 몸매가 어떤 옷인들 안 어울리겠냐만은…… 이내 단비를 향해 돌아선 그가 그녀 앞에 머그잔을 놓았다. 그러면서 마치 여동생 다루듯 오빠처럼 말을 붙인다.'“설탕은 안 탔다? 어린애냐. 그냥 마셔.”'그의 말에 뭔가 고소하기만 하고 달짝지근한 맛은 없을 밋밋한 우유를 단비의 눈이 내려다봤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곧 한 모금 마셨다.'역시, 우유는 설탕을 조금 타줘야 맛깔 나는데…….'승우에게 잔소리 들을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삼킨 단비가 눈을 끔뻑거렸다.'승우가 곧 단비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는 눈짓으로 2층을 가리켰다.'“2층에 이사 오기로 한 세입자는?”'“내일 오전에 이사 온대.”'단비의 말에 승우가 신기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그래도 이사 오긴 오나 보네. 대중교통도 없는 양평 촌 구석퉁이에 월세 칠십이나 주고 들어올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하다.”'“나도 그래. 없으면 할 수없이 월세 좀 내리려고 했는데, 천만다행이지.”'“어떤 사람이야?”'“몰라. 남자라는 거 밖에는.”'승우의 물음에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 단비가 남아 있는 나머지 한 모금의 우유를 들이켰다. 그런 단비를 눈을 치켜뜨며 쳐다보는 승우.'“얘가 얘가…… 남자보단 여자를 들여야지. 이런 촌구석에 남자 세입자하고 이웃사촌 하는 게 말이나 되냐?”'“니 말대로 월세 칠십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도 감지덕진데 그런 걸 왜 가려. 그리고 나 여자 아니라며.”'아까 자신이 했던 말을 콕 집으며 눈을 가늘게 뜨는 단비를 바라보며 승우가 말문이 막힌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거실로 걸어 나가는 그녀 뒤를 쫓으며 잔소리를 시작했다.'“그거야 물론 내 눈에는 니가 여자로 안 보이지. 우린 형제니까 형제. 그런데 다른 남자들 눈에는 그래도 니가 생물학적으로 여자로는 보일 거 아니야. 아무리 못생겼어도…….”'퍽!'“악!”'순간 단비의 덧버선 신은 발이 승우의 정강이를 강타했다.'“뒤에 한마디만 더해라!”'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에 승우가 아픈 정강이를 부여잡고 입을 다물었다. 저 자그마한 거는 정말 힘도 좋다. 손도 맵고…….'“아, 쓰읍…….”'승우가 곧 단비의 만화 원고를 흔들며 슬슬 현관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혼자서 하지 말고 시간되면 문하생이라도 좀 써라! 맨 날 마감 되서 허덕거리니…….”'“월세 받는 것도 무리수를 둔 마당에 문하생은…… 그리고 만화가 3년차가 무슨 문화생이야! 내 앞가림하기도 급급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