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굵은 땀이 사내의 벌거벗은 가슴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너른 연무장 안에는 사람 키 높이의 짚더미가 대여섯 개 세워져 있었다. 그는 잘 벼려진 검을 들고 날카로운 검세로 짚더미를 단번에 베어 냈다. 짚더미의 단면은 마치 잘 썰린 두부처럼 매끈했다.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탄탄한 구릿빛 팔뚝이 힘차게 꿈틀거렸다. 검날은 오후의 뜨거운 햇살을 받아 번쩍였다.

“나리, 벌써 두 시진이 지났습니다.”

사내의 연무를 지켜보던 강삼이 물이 든 사발과 몸을 닦을 무명천을 들고 와 그에게 바쳤다.

그는 비로소 검을 집어넣고는 숨을 골랐다. 그가 물을 마시는 동안, 강삼은 땀에 젖은 그의 맨등을 닦아 주었다. 강삼의 표정은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이젠 조선 팔도에 나리를 대적할 자는 없을 것입니다. 아마 둘째 서방님도 나리만 못할걸요.”

그는 강삼의 말에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황윤설. 둘째 형은 늘 그에게 무예를 익히라 강권하곤 했지만 그는 무예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진 못했다. 그저 예설이 좋아하니 마지못해 몇 초식을 따라 배웠을 뿐이다.

어쨌든 어깨너머로 보고 들은 게 있어서인가. 작정하고 무예에 매진한 결과, 지난 5년간 그의 실력은 일취월장하였다. 뚜렷한 목표와 의욕이 그를 더욱 성장시켰다.

“소인이 등목을 해 드릴 테니 가시지요. 얼른 의관을 정제하셔야 합니다. 곧 임창 대군께서 오실 것입니다.”

“알았다.”

진설, 아니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 양반들이 주로 여름용 별장을 지어 드나드는 곳이다. 마을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한 70여 간 남짓의 죽자헌(竹子軒)은 뒤에 대나무 밭이 무성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늘 조용했고, 사람들이 드나들어도 요란스럽지 않았다.

죽자헌을 찾은 임창 대군 역시 그러했다. 그는 마치 유랑객인 양 소박한 검은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삿갓을 썼다. 그를 늘 그림자처럼 따르는 주혼 역시 소박한 차림이었다.

해는 아직 서쪽 하늘에 걸려 있었다.

임창 대군과 이수는 죽자헌의 정자에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바람이 대나무 사이를 스치며 서걱서걱 소리를 냈다.

“일전에 내가 했던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가?”

임창 대군은 한담 끝에 마침내 용건을 꺼내 놓았다. 이수는 들고 있던 술잔을 단번에 비우더니 차분히 답했다.

“저의 복권은 거사가 성공한 후에 해 주심이 가하다고 생각합니다.”

“선 대인의 생각은 달라진 모양이던데.”

선 대인은 임창 대군의 거사가 늦어지자 초조해하고 있었다. 경창군의 복권을 성사시키지 못한다면 더 이상의 지원은 없을 것이라는 은근한 압박까지 해 왔다. 이제껏 들인 재물에 비해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지 않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임창 대군 또한 경창군의 복위를 먼저 추진하는 편이 더 유리하기에 내심 그의 독촉을 반겼다. 그리 되면 왕의 주의와 경계가 모두 이수에게로 향할 것이고, 혹여 거사가 발각이 되더라도 이수에게 덮어씌울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수의 생각은 처음부터 변함이 없었다. 그는 임창 대군이 보위에 오른 후에 복권이 되길 원했다.

“정말 학문이 일천하여 때를 미루는 겐가? 박 생원이 말하기를 조카님의 학문은 이미 자신이 가르칠 경지가 아니라고 하던데.”

처음 임창 대군과 대면하였을 때 이수는 자신이 어린 시절에 부모를 잃고 떠돈지라 천자문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으니 어느 정도 준비를 갖춘 후에 나서고 싶다며 시간을 끌었다. 종친은 5대가 지날 때까지 과거에 응시할 수 없기에 딱히 학문을 익혀야 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체면상 게을리할 수도 없었다.

“혹여 일이 잘못될까 봐 이러는가? 물론 쉽지는 않은 일이네. 경창군 형님이 모반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나?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선뜻 행하기 힘든 일이지.”

임창 대군은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동안 자네가 보여 준 성의를 생각한다면 진즉에 뜻을 이룸이 마땅하나, 참으로 여의치가 않군. 금상이 제법 조심스러워 대신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그리 나쁘지가 않으니……. 내 손으로 직접 자네를 복권시키고야 싶지만, 아무래도 당장은 힘들지 않겠나. 자네도 진즉에 약관을 넘겼는데 더 이상 홀로 지내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개의치 마십시오. 조카는 이대로도 좋습니다. 선 대인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흠. 내가 예전에 황 정승가의 여식에게 혼담을 넣은 적이 있네.”

느닷없는 임창 대군의 말에 이수의 표정이 확연히 경직되었다.

“몇 번 본 일이 있는데 참으로 욕심이 나더군. 절세가인에 총명하기 그지없어 딱 중전감이더란 말이야. 지난 몇 년간 이따금씩 황 소저의 근황을 알아보곤 했는데, 얼마 전에 김해의 외가에 갔다고 하질 뭔가. 김해가 그리 가까운 거리가 아닌데 외유가 잦은 것이 마음에 걸려 생각 끝에 사람을 보냈지. 그랬더니 참으로 흥미 있는 소식을 가져오더군.”

임창 대군은 자신의 말이 가져올 파급력을 상상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 소저가 단 한 번도 김해에 간 적이 없다는 것이야 뭐 그렇다 치고. 황 정승가의 셋째 아들이 병약하여 피접을 왔는데 곧 죽어 조용히 상을 치렀다더군.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멀쩡히 살아 있더란 말이지. 하필이면 그 시기가 경창군의 난이 있던 직후이고.”

“확실히 흥미 있는 소문이군요.”

평정을 되찾은 이수가 태연히 대꾸했다.

“소문은 그저 소문일 뿐이지. 하지만 소문을 입증할 물증을 찾았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겠나?”

“…….”

“자네가 복권이 된다면 흠이 되질 않겠으나, 그 전에 이 일이 알려진다면 황 정승의 처지가 그리 순탄치는 않겠지. 다시 한 번 심사숙고해 보시게. 이미 안배는 다 해 놓았으니 자네의 결심만 남았네.”

두 사람의 술자리는 곧 끝났다. 임창 대군이 떠난 후에도 이수는 한참이나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나리, 이를 어쩝니까? 임창 대군께서 이미 다 알고 오신 것 아닙니까?”

보다 못한 강삼이 이수에게 다가갔다.

이수가 그동안 복권을 미뤘던 것은 금상이 그의 얼굴을 알기 때문이다.

임창 대군이 생각한 것은 그 역시 생각할 수 있었다. 자신이 임창 대군이라 해도 먼저 경창군을 복권시켜 방패막이로 삼았을 것이다.

선 대인은 그저 복수를 하고 이수를 왕으로 만들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할 뿐, 그저 장사꾼인지라 제대로 된 정세를 파악할 줄은 몰랐다. 그는 왜 이수가 복권을 미루려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복권부터 하지 않는다면 임창 대군이 거사를 일으킬 때 이수가 치고 나갈 명분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