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준은 탁자 위에 있는 생수병을 들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물속의 탄산이 입 안을 싸아하게 자극하며 목을 타고 내려간다. 이런 자극감에 길들여지게 되면 그냥 물은 심심해진다. 어린 시절부터 해외에서 살았지만 막상 탄산수를 마시게 된 것은 러시아에 살면서부터였다. 러시아 하면 언제나 과거의 기억은 하나로 회귀하고 처음으로 그에게 탄산수를 마셔보라고 권했던 사람이 기억난다. 이제는 기억 속에서 조금은 퇴색된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자 그는 머리를 한 번 가볍게 흔들었다. 기억을 흔들어 떨어뜨리려는 듯이. 희미해졌다고 자위하던 오랜 기억들이 스멀스멀 묘지에서 살아 돌아와서 마음의 평화를 깨뜨릴까 두려웠다. '그런 그를 뒤에서 콘서트홀의 여직원이 감탄하는 듯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검은색 턱시도에 하얀 드레스 셔츠를 받쳐 입고 보우타이를 맨 그는 꽤 장신에 군살 없이 탄탄한, 단단해 뵈는 체격이었다. 실제로 리허설 때 처음 보았을 때 깜짝 놀랄 정도였다. 사진으로 보기야 봤지만 실제로 봤을 때 이런 박력이 풍길 거라곤 전혀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동양인치고 하얀 얼굴에 새카맣고 목선을 살짝 넘기는 긴 듯한 머리카락이나 부드러운 얼굴선에서 오는 유약한 인상을, 차가워 보이는 금속 프레임의 안경과 홑꺼풀의 크고 길쭉한 눈이 날카로운 인상을 보태었다. 무엇보다 피아니스트라는 직업이 주는 선입관은 그의 강건한 몸을 보면 완전히 날아가 버릴 터였다. 그는 온몸에서 맹수의 느낌이 나는 남자였다. 실제로 매일 아침마다 수영을 30분 이상 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조깅을 한다고 인터뷰 중에 말한 적도 있었다. 그는 삼십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강해진 카리스마를 있는 대로 내뿜고 있었다. 그냥 곁에 서 있기만 해도 공기가 무거워지면서 주변을 압박할 정도였다. '한국이 낳은 불세출의 피아니스트였다. 185센티미터의 큰 키와 박력 있는 연주. 일본의 잡지에서 붙여준 바람의 피아니스트란 별명답게 대륙적인 기상의 격정적인 연주로 유명했다. 일본에서 아이돌 팬클럽 뺨칠 정도로 열정적인 팬클럽을 몰고 다닌다는 소문도 있었다. 소문을 증명이라도 하듯 일본 투어 콘서트 전 좌석 매진, 앙코르 10회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줄리어드 예비학교 출신, 러시아의 상트뻬쩨르부르크 음악원 수석 졸업, 열아홉 살 때 차이콥스키 콩쿠르 1등만으로도 남들은 상상하기도 힘든 이력이건만, 이후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도 1위를 한 뒤, 스물다섯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유명 오케스트라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콘체르토를 협연했고 실황 앨범까지 냈다. 그는 음악가 지망생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많은 것을 이미 이십대 초반에 이룬 천재였다. '근 십이 년 만의 국내 콘서트였기 때문에 다섯 달 전에 티켓이 풀리자마자 그대로 매진되어 버릴 정도였다. 어디 빈 좌석 하나 보이지 않았고 밖에선 백 명 이상의 사람이 실황을 모니터로 지켜보고 있었다. 어릴 때는 종종 국내 무대에 섰지만 십대 후반에 러시아로 유학 간 이후로는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 이후 단 한 번의 콘서트만 섰을 뿐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국내 무대에 거의 서지 않았다. 스케줄 문제라고 했지만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틀림없다고 관계자들 사이의 소문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가 십이 년 만에 처음으로 서울의 공연장에 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