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1. '2. '3. '4. '5. '6. '7. '8. '9. '10.'11.'12.'13.'14.'15.'에필로그'''아이는 움직임이 없었다. 고만한 다른 또래들이 흔히 보일 법한 부산함도 없었다. 나이보다 몸집이 작은 그 여자 아이는 심지어 얼굴에 표정조차 없었다. 윤기 흐르는 머리가 가끔 바람에 살랑거릴 뿐, 무릎을 세우고 정문을 보는 시선을 고집스럽게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정물화의 그것처럼 움직임이 없던 아이가 볼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이내 눈빛에서 반짝임이 사라지고 표정이 실망으로 굳어졌다. 잠시나마 그 아이의 눈빛을 반짝이게 했던 고급 승용차가 아이의 곁을 스쳐 건물의 현관 쪽으로 향했다. 아이는 다시 무심히 무릎 위에 얼굴을 올려놓고 정문을 향했다.''"일곱 밤만 자고 올게. 원장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있어. 알았지?"''엄마가 약속한 일곱 밤이 벌써 스무 번도 넘게 흘러갔다. 하지만 아이에게 그 말은 절대진리였다. 시간만 나면 항상 같은 자리에서 같은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혼자서 심심하지 않아?"'이곳 희망 보육원 원장의 아들 도현이었다. 서은은 대답없이 도현을 말똥히 쳐다보았다. 관심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이보다 세 살 정도는 더 많은 것이 분명한 도현은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드는 것을 느꼈다. 예쁘게 쌍꺼풀진 말간 눈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기쁘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던 탓이었다.'아이의 이름은 서은이라 했다. 처음 그 아이가 엄마 손을 붙잡고 보육원에 들어설 때부터 도현은 유난히 희고 눈이 큰 그 아이가 맘에 들었다. 또래 친구들이 악의없이 놀려대는 장난질에도 모르는 척 그 아이의 주변에서 맴돌곤 했다. 자신에게 없던 여동생이라도 생긴 듯이 기분이 좋아지곤 했던 것이다. 학교에 가면 오빠라고 해야지, 급식으로 나오는 맛있는 간식도 서은이한테 줄 거야. 받아쓰기를 어려워하면 내가 가르쳐 줘야지. 난 오빠잖아. 계속되는 도현의 백일몽을 제지하며 나타난 것은 도우미 아주머니였다.'"서은아, 원장 선생님께 가자. 찾으시네."'서은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귀찮은 듯 더욱 무릎에 고개를 묻어버렸다. 그런 서은을 대신해 물은 것은 도현이었다.'"왜요, 아줌마? 엄마가 서은이를 왜 보자고 해요?"'"글쎄, 나야 모르지. 일단 가보자. 자, 어서 일어나, 서은아. 아줌마랑 같이 가자."'아쉬운 듯 정문 쪽을 한 번 더 보고 마지못해 일어서는 서은이를 데리고 가는 아줌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도현은 곧 뒤따르기 시작했다. 혹시 서은이에게 야단이라도 치면 내가 엄마한테 막 뭐라고 그래야지. 서은이가 얼마나 예쁘고 착한 앤데…….'상담실로 들어서던 도현은 멋진 양복을 입은 아저씨와 엄마가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도현은 이런 광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희망 보육원에서 이런 모습을 본 다음에는 원생이던 아이 하나가 새로운 가정을 위해 떠나 버리곤 했던 것이다. 평소라면 그것은 축하할 만한 일이었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서은이가 가는 일이었다. 도현은 엄마를 노려보았다. 도현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은을 측은하게 바라보던 원장에겐 별로 의미가 없는 행동이었지만 말이다.'"서은아, 인사드리렴. 널 좀 보자고 하시는구나."'사슴같이 까맣고 초롱한 눈으로 서은은 그 사람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꾸벅 인사를 했다.'"안녕하세요. 정서은입니다."'"말씀드린 아이예요. 이제 학교에 갈 나이랍니다. 약속하신 대로 잘 보살펴 주실 것을 믿겠습니다. 사정이 있어서 여기 오게 됐지만, 정말 나이보다 듬직하고 예쁜 아이입니다. 부디 아껴주십시오."'"걱정 마십시오. 서은이라고 했니? 지금부터 아저씨하고 같이 가서, 거기서 학교도 다니고 그렇게 살자."'어린 서은은 앞의 아저씨가 하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내가 왜 이 아저씨랑 살아? 이제 조금 있으면 엄마가 날 데리러 올 테고 그러면 난 그전처럼 엄마랑 둘이 살 건데. 정말 이상한 아저씨였다.'항상 일하느라 바빠서 서은이와 오랜 시간을 있어주지 못하던 엄마였지만, 그래도 밤늦게 피곤한 몸을 이끌고 들어와서도 가만히 자신을 끌어당겨 안아주곤 하던 엄마였다. 그렇게 안기는 엄마의 품이 너무 좋아서 서은은 밤늦도록 엄마가 오기만을 기다리다 엄마가 들어오면 자는 체를 하곤 했다. 잠든 체하는 서은의 머리 위로 엄마는 넋두리처럼 조곤조곤 푸념을 하곤 했었다.''"우리 서은이 하루 종일 혼자 있어도 무섭다고 안 하고 정말 착하기도 하지. 엄마가 바보 같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고생 안 시키는데……."''힘들게 일하는 것은 엄마인데 왜 자신더러 고생한다고 하는지 몰랐지만, 엄마의 어조가 너무 슬프게 들려 서은은 꼭 감은 눈을 뜨지 않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흥분한 어조로 서은에게 말했다. 이제 고생 안 해도 된다고, 며칠만 기다리면 서은이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맡길 데가 없으니까 이곳에서 딱 일곱 밤만 자고 있으면, 이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던 엄마였다.'서은은 그게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엄마의 웃는 얼굴이 정말로 좋아 보여서 함께 데리고 가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어린 서은이었지만, 원하는 걸 말로 표현하는 것은 엄마를 슬프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습관으로 알고 있었다. 갖고 싶은 것이나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등을 말했을 때 종종 엄마가 슬퍼하며 미안하다고 말하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서은은 참았다. 데려가 달라고 떼쓰고 싶었지만 참았다.'이제 엄마가 오면 엄마 품에 안겨서 조금쯤은 투정을 부려야지. 그럼 엄마는 평소처럼 미안하다고 말하고 안아주실 거야. 그리고 어쩌면 서은이가 좋아하는 초콜릿 묻은 도너츠를 사주실지도 모른다. 아주 아～주 가끔이지만, 엄마는 특별한 날 서은이에게 그것을 사주시곤 했었다.'행복한 상상을 하는 서은이에게 이 아저씨는 같이 가잔다. 아아, 이 아저씨는 우리 엄마를 모르니까 엄마가 서은이에게 한 말을 모르는구나.'"안 돼요. 우리 엄마가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단 말이에요."'어른들의 표정이 굳어졌다.'"저기…… 서은아, 이제 엄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