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1. 도토리 키 재기'2. 위기의 발렌타이데이'3. 일탈, 그 짜릿함(미팅이여, 영원하라)'4. 공포의 중간고사'5. 백일주를 마시다(첫키스의 추억)'6. 너에게로 가고 싶어'7. 나란히, 나란히, 나란히'8. 성인(成人)?? 성인(聖人)!!'9. 파블로프 가라사대'10. 항원과 항체, 그리고 면역'11. 넌 내 인생의 걸림돌이야'에필로그 '2% 부족한 당신을 위한 사족 하나'''내게는 ‘소원’이 하나 있다. '물론, 자잘하게 바라는 일이야 많이 있지만, 굳이 ‘소원’이란 거창한 단어를 쓰면서까지 꼭 이루어야 할 중대한 일이 하나 있다. 얼마나 중차대한 일이면 다른 것은 소원 축에도 못 끼고 그저 원하는 일 정도라는 변방에서 맴돌고 있을까. '내 나이 이제 겨우 열아홉. 얼마든지 꿈도 많고 바라는 것도 많을 인생의 절정기에 겨우 하나의 소원이라니. 그러나 이루어만 진다면 괄시했던 나머지 수만 가지의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내 인생에 후회는 없으리라. '절치부심, 오매불망, 내가 원하는 소원 하나. 그것은 바로 날벼락처럼 어느 날 갑자기 굴러들어와 내 인생에 갖은 스파크를 일으키는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 녀석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다. '질기기는 십 년 째 끌고 다니는 우리엄마 슬리퍼 밑창보다 질기고, 독하기는 얼마 전 아빠 몰래 거실 장식장에서 훔쳐 마신 양주보다 독하며, 단순하기는 내가 지각할 때마다 보곤 하는 뽀뽀뽀에 나오는 동요가사보다 더 단순한 녀석이 어느 날 맛있게 먹다 이사이에 끼어버린 꽃게껍질처럼 즐겁던 내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며 침입해 들어왔다. 꽃게껍질이라면 양치질을 하거나 이쑤시개를 들고 후벼대면 처리가 되겠지만, 이놈은 어떻게 빼낼 방법이 없다.'나는 딸만 넷인 집안의 천덕꾸러기. 그렇다. 나는 박물관에나 가서 서 있어야 하는 넷째 딸이다. 위로 딸만 줄줄이 셋을 나으신 부모님은 ‘이제 그만’ 이라는 철썩같은 다짐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는 인간적인 마음에 나를 낳으신 것이었다. 낳고 보니 역시나. 어쩌면 내 불행은 거기서 잉태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처음부터 내가 천덕꾸러기였다는 생각을 품으면 곤란하다. 맹세컨대 나는 집안의 막내가 누려야 하는 모든 호사는 다 누리고 살았다. 어느 날 갑자기 재앙처럼 떨어져 내린 놈만 없었다면 나는 지금도 적당한 어리광에 공갈을 섞어가며 부모님과 언니들의 등을 치며 잘 먹고 잘살고 있을 것이다. '내 불행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은 어느 날 집 옆의 비교적 큰 공터에 새로이 집을 짓고 녀석의 식구들이 이사 온 후부터이다. 다른 집의 두 배는 되고도 남을 정도의 커다란 공터에 그림책에서나 보던 예쁜 집이 들어선 것이다. '지어지는 집을 보며 저렇게 근사한 집에서 사는 사람들은 대체 무슨 복인지 모르겠다며 아버지의 심기를 은근슬쩍 긁어대던 엄마는 이사 떡을 들고 우리 집으로 들어서던 녀석의 형을 보고는 무릇, 이 땅의 딸 가진 부모가 그렇듯이 바로 꽂혀버리고 만 것이다.'큰 언니야 그때 당시 이미 대학을 다니고 있었으니 열외로 치더라도 우리 집에는 아직 둘째, 셋째 언니가 겸익 오빠(놈의 형 이름이다)와 비슷한 연배로 줄을 서 있었던 것이다. 하기는 내가 보기에도 중학교 삼학년에 다니고 있던 겸익 오빠는 척 보기에도 나 공부 좀 하고 어느 정도 있는 집 자제요 하는 냄새를 폴폴 풍기고 있었으니 기회는 곧 보험이다 라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던 우리 엄마 가만있었을 리 없다. 나는 왜 안 집어넣느냐고? 아무리 우리 엄마가 조금 뻔뻔하다 하더라도 이제 겨우 초등학교 삼학년인 딸을 엮으려는 생각을 하지는 않으시는 분이다.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아무튼, 그길로 당장 그릇을 돌려준다며 바리바리 밑반찬을 그릇에 담고 그 집으로 건너가신 우리 엄마, 어떤 꽁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그날부터 우리 집과 놈의 집과는 허물없이 지내는 관계가 돼버린 것 이다. '세상사 새옹지마란 명언이 있다. 그 정도에서 그쳤다면 정말로 좋았을 것을. 좋은 일은 언제나 나쁜 일을 몰고 온다. '그 집에는 겸익 오빠 말고도 아들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게 바로 녀석이다. 이름도 웃기다. 겸익 오빠는 폼 나게 겸손할 겸 자에 더할 익. 겸익이다. 이름 탓인지 사람이 정말 나무랄 데 없다. 아는 것도 많고 무엇보다 자상하다. 겸손한 거야 이름만 들어도 아는 사실 아닌가. 비록 엄마는 일찌감치 후보에서 제외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오빠를 상상하며 얼마나 많은 상상의 밤을 보냈는지. (내가 읽는 동화의 모든 주인공에 정말로 딱 어울리는 오빠였다) '그런데 놈은 무익이다. 무익. 웃기지 않는가.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늦둥이로 태어난 놈은 태어날 당시에는 생명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허약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갖게 된 이름이 굳셀 무에 더할 익. 무익이다. 정말이지 백해무익한 녀석. (녀석의 성은 백씨다.) 하얀 얼굴에 꽃미남 스타일의 겸익 오빠와는 다르게 이놈은 어린놈이 얼마나 땡볕에 뒹굴었으면 온통 다 까무잡잡했다. 뿐인가 전체적으로 호리호리한 겸익 오빠와는 다르게 굵직굵직하게 딱 무식한 마당쇠 같은 스타일이었다. '어쨌든 이놈이 나와 같은 나이라는 데서 나의 불행이 시작됐다. 그때까지 늦게 본 막내딸이라며 웬만한 투정쯤은 다 통하던 우리 집에 이상한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한다. 옆집의 무익이는 너와 동갑인데 너보다 어른스럽다는 말은 기본이다. 같은 학교에서 같은 선생님에게(그렇다. 질긴 이놈은 우리 반으로 전학을 온 것이다) 공부하는데 어쩌면 그렇게 성적이 차이 날 수 있느냐며 부모님 이하 언니들마저 나를 무뇌아 보듯 보는 것도 애교로 봐줄 수 있다. '내가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은 뻔뻔한 이놈이 자기 집 놔두고 어느 날부터인가 제집 드나들 듯 우리 집에 드나들며 마땅히 내가 누려야 하는 모든 호사를 빼앗아 가도 누구 하나 저지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뿐인가, 오히려 억울하면 네가 나가라는 식이다. 말 못하는 동물도 자기 영역은 확실히 하는 법이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이자 살아가는 순리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마음이 바다처럼 넓고 착한 것 빼면 시체인 이 강인혜(강인해로 불려지는 건 내가 세상에서 두 번째로 싫어하는 일이다)도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면서까지 참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래서 안 참고 어떻게 했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