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낯익은 타인

아침부터 비가 오고 있었다. 아직은 춥고 서늘한 쌀쌀맞은 비. '거대한 호텔의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비에 젖어 온통 눅눅한 잿빛, 그리고 그 사이를 갈 곳 없는 짐승 떼처럼 떠다니고 있는 것은 산만한 우산들이었다.'문득 검고 푸른 우산의 무리 중에서 유독 하나의 우산이 내 시선을 끌었다. 새빨간 우산. 선명한 빛깔의 그 우산 아래로 검정색 부츠와 빨간색 반코트 끝자락이 보이고, 그 옆에는 검은 바지와 검은 구두가 나란히 보조를 맞추며 움직이고 있었다. '저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나는 커피를 마시며 그들이 가고 있는 곳을 상상해보았다. '분위기 있는 찻집, 비싸고 그 값에 비해 음식의 양이 압도적으로 적은 고급 레스토랑, 그것도 아니면 일찌감치 은밀하고 농밀한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 모텔이나 호텔, 혹은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집으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목적지 없이 그냥 걷고 있는 걸 수도 있다. 그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한 두 사람인지도 모르니까.'하지만 이건 모두 저 두 사람이 연인이라는 전제하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저 두 사람은 어쩌면 남매나 부녀지간일 수도 있다. 그저 편한 친구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길거리에서 비를 맞고 있는 남자의 모습에 연민을 느낀 여자가 우산을 함께 쓰자고 했을 수도 있겠다. 그럴 경우, 여자는 아름답고 남자는 멋진 모습일 것이다. 그래서 서로가 첫눈에 반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일은 세상 곳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있다. 그저 내 세상에서만 일어나지 않고 있을 뿐.'“커피 더 드릴까요?”'맑은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혼자 바깥을 보고 있다가 상상력에 탄력이 붙어 급속도로 현실에서 멀리 달아나고 있었나보다. '“네, 감사합니다.”'고개를 끄덕이자 곧 은색의 커피포트에서 맑은 갈색의 액체가 향을 뿜으며 잔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쪼르륵. 마지막 한 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내 잔은 맨 처음과 마찬가지 모습이 되었다. '인생도 저랬으면 좋겠다. 비어있으면 금방 채워지고, 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맨 처음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한숨을 쉬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뜨거웠다. 그리고 잔은 금방 또 한 모금만큼 비워져 버렸다. 인생도 그럴 것이다. 한 모금의 숨을 내쉴 때마다, 그렇게 조금씩 비워져가는 것이다.''호텔 커피숍에서 30분을 기다렸다. '결국 은영은 오지 않았다. 전화가 걸려왔을 뿐이다. 급한 일이 있어서 미안하지만 나올 수 없다는 짧은 말. 별로 화나거나 섭섭하지는 않았다. 기자라는 직업상 그녀와의 약속은 늘 이렇게 제멋대로 바뀌곤 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기대를 하지 않으면 상처 받을 일도 줄어든다. 나는 그 평범한 진리를 일찌감치 깨닫고 있다.'커피숍에서 나와 입구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베이커리로 갔다. 여러 가지 빵들이 예쁜 모양새와 코를 즐겁게 만드는 향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무엇을 드릴까요?”'진열대 앞에 서자마자 상냥하고 직업적인 웃음을 띤 종업원이 와서 물었다. 대답대신 나는 빳빳하고 눈부시게 흰 그녀의 옷깃에 있는 아주 작은 검은 점 하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볼펜 자국일까? 아니면? 하지만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어떤 중년 신사 하나가 키위와 딸기로 듬뿍 장식되어 있는 과일 타르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황급히 뛰어든 탓이다.'“저걸로 세 개 줘요, 아가씨.”'나를 힐끗 보며 고개를 한번 숙여 보인 그가 사뭇 비장하게 내뱉은 말이었다. 빵 하나 사가면서 저리 비장할 이유가 뭐 있을까 싶었지만, 어쩌면 그는 자신이 몹시 급하다는 것을 내게 보여줌으로써 새치기 한 죄책감을 덜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그는 그냥 비장하게 말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지도…….'쓸데없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고 있다. 은영과의 약속이 틀어져서 너무 한가해진 모양이다.'나는 그 중년 신사를 흘끔 바라보곤 발길을 돌렸다. 특별히 빵이 먹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 베이커리의 오렌지색 불빛이 시선을 끌었다. 언젠가 잡지에서 읽었던 것 같은데, 오렌지색 계열의 불빛이 음식을 돋보이게 만들기 때문에, 보는 이의 식욕을 자극한다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그 불빛을 보는 순간 그게 사실일까, 궁금해졌었다.'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식욕을 자극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것은 내가 여기 나오기 전에 밥을 먹었기 때문이지, 저 불빛의 색이나 빵의 모양새나 향 따위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었다. '배가 고프면 식욕은 언제나 일어나는 법이다. 정말로 배가 고프다면 불빛이 오렌지색이건, 초록색이건,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불빛 따위를 가릴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것은 배부른 자들의 사치일 것이다. 나는 그 잡지의 기사가 틀렸다고 생각하며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호텔 문 너머로 보이는 세상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고, 나는 우산이 없었다. 하지만 우산이 필요한 건 아니다. 지하주차장까지는 엘리베이터만 타면 갈 수 있고, 내 차는 세상의 다른 차들처럼 완벽하게 방수가 되는 차니까. '여전히 쓸데없는 생각의 연속.'주차장으로 가서 차문을 열자 차 특유의 냄새가 느껴졌다. 비가 오는 날은 차 안의 가죽시트 냄새가 좀 더 강하게 떠도는 것 같다. 기분 탓일까? 잘 모르겠다. 그냥 그런 것 같다.'차에 시동을 걸고 엔진이 가열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히터를 틀고 잠깐 눈을 감았다. 아까 집에서 나오면서 들었던 파바로티의 노래가 제법 큰 소리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페라 <아이다>의 한 대목, <청아한 아이다>다. '대부분의 오페라가 그렇듯이 <아이다> 역시 비극이다. 이디오피아의 아름다운 공주 아이다, 적국인 이집트로 잡혀 와서, 이집트의 장군과 사랑에 빠져 조국과 사랑 사이에서 번민하다가 결국 마지막에는 둘 다 죽음으로서 마무리되는 슬픈 이야기이다. '언젠가 극장에서 보았던 오페라 <아이다>, 그 때 자신의 조국을 치러 가는 연인을 위해 <이기고 돌아오라>를 부르는 아이다의 목소리는 서럽고도 아름다웠다. '어떤 기분이었을까? 자신의 아버지와 동포를 죽이러 가는 연인을 위해 이기고 돌아올 것을 기원하던 아이다의 심정은?'나는 상상할 수 있다. 그 처참함을, 그 애잔함을, 그 고통을.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영원히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아이다가 아니니까. '세상은 그런 것이다. 내 일이 아닌 것은 아무리해도 완전하게 느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 내게 ‘네가 어떤 심정인지 난 알아, 나도 그런 적이 있는 걸.’ 이따위의 말을 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아무리 비슷한 일을 겪었어도, 타인은 나의 감정을 다 느끼고 이해할 수 없다. 그 사실을 무시하고 타인에게 다 알고 있다고 쉽게 말하는 인간들은 어리석고 오만한 자들이다. 당신은 내가 아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쉽게 하면서도, 실제로 그 뜻을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다.'……졸린다. 히터가 돌고 있나보다. 따스함은 늘 나를 졸리게 만든다.'창문을 조금 열고 차를 출발시킨다. 지상으로 올라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빗방울들이 내 얼굴에 와서 달라붙는다. 이럴 땐 얼굴만 가려주는 우산이 있으면 좋겠다.

미리보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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