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가 살포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윤은 잔잔한 미소를 보여주고 서재를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하신이 그녀를 응시했다. '“나 좀 봐.”'“?”'그녀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조용히 마주하게 된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건조하고 냉엄해보였다. 무슨 말을 듣게 될지 모르는 가운데 그녀는 가슴이 쓰라렸다. 그는 눈빛만큼이나 싸늘한 저음을 흘렸다.'“내 입장부터 말할게. 난 서울로 갈 생각이 없어. 이환이 역시 서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또 사업상의 일은 앞으로 내가 직접 서울을 왔다 갔다 하며 할 생각이야. 하윤이 놈을 강제로라도 자리에 앉힐 계획이고. 그래서 난 하윤이 놈의 의견을 찬성하고 싶지 않다. 네가 생각조차 하지 않길 바라.”'이별의 시간을 허락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헤어져 지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리움이 솟구치며 목 안이 따가웠다. 그녀처럼 가슴이 쓰리고 아렸다. '“이런 내가 지나치게 이기적이라는 걸 알아. 알면서도 난 네가 지금 이대로 내 곁에 있기를 원해. 그게 내 솔직한 심정이야.”'“……!”'은교는 가슴이 꽉 뭉치는 기분이었다. 코끝이 시큰해지며 바보 같은 눈물이 삐져나올 것 같았다. 은연중 그가 저리 말해주기를 바랐던 모양이었다. 자신을 너무 쉽게 보내지 않고 한 번쯤은 강하게 붙잡아주길……. 그것이 사람의 간사한 마음이었다. 마냥 착하기만 한 그녀도 사랑 앞에서는 간사해졌다. 사랑하는 사람의 앞이라서…….'하신은 불편한 감정들을 제압하며 말을 이었다. '“좀 더 냉정하게 말할까? 그깟 대학, 나와서 뭘 할 건데? 어차피 넌 이 집안의 안주인으로 날 내조하며 살아야 할 사람이야. 졸업장을 받더라도 직업을 따로 가질 수 없어. 류씨가의 안주인이 유치원 교사를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내가 싫기도 하고. 난 내 아내가 사회생활을 하기보다는 집안을 돌보길 바라.”'그동안은 아내라는 존재가 어떻길 바라본 적이 없었다. 전처인 나소영에게 말했듯 그저 자신을 귀찮게 하지 않으면 충분했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상대가 연은교인 만큼 바라는 것이 생기고 원하는 것이 많아졌다. '자신의 곁에서 든든한 내조자가 되어주는 것. 언제나 자신의 시선 안에 존재하는 것. 항시 아이들과 자신을 우선시 하는 것. '가부장적인 남자의 전형이었다. 그렇기에 더할 나위 없이 독선적인 모습을 보였다.'“하윤이 놈의 이야기, 못 들은 것으로 하자. 방금 일은 없던 것으로 해.”'단호했다. 그런 그에게 은교가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달싹였다.'“류하신 씨?”'“!”'하신은 검은 눈동자를 번뜩였다. 이름을 부르는 짧은 목소리가 빛의 속도로 심장을 파고들고 거센 파동을 일으켰다. 은교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탄탄한 다리 곁에 다소곳이 앉고 그의 손을 붙잡았다. '“저, 반지 받을게요.”'“뭐?”'그는 뜬구름처럼 들린 말을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러쥔 그의 손 위로 뺨을 기댔다.'“대신 방금 일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게 해주세요.”'“지금, 약을 먼저 먹여주고 나중에 병을 주겠다는 거야?”'하신은 얄미운 수법을 쓴다며 눈살을 구겼다. 은교는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을 내뱉을 때마다 신기하고 귀엽기까지 했다. 사랑스런 눈웃음을 지으며 그의 차가운 손을 꼬옥 움켜잡았다. '“반지, 지금 주실래요? 그리고 생각할 시간도 주세요.”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그는 엄포를 놓는 것처럼 굴었다. 단연코 허락할 마음이 없는 것이었다. 그녀가 슬그머니 울상을 지었다.'“그냥 생각을 해보겠다는 것뿐이에요. 그 정도도 안 된다고 하실 거예요? 실은, 제 꿈이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거였어요. 이제 와서 그 꿈을 이룰 수는 없지만 생각은 해봐도 되잖아요. 그러니까…….”'조금만 양해해달라는 눈빛을 띠었다. 하신은 그녀의 꿈이었다는 말을 유독 씁쓸하게 받아들였다. 누차 하윤에게 들었던 말임에도 당사자를 통해 듣는 건 느낌이 달랐다. 말문을 틀어막고 칼 같은 결심을 뒤흔들었다. '“그럼, 생각만이야. 딱 거기까지.”'“네.”'그녀는 눈을 빛내며 턱을 끄덕였다. 그는 한쪽 눈살을 가늘게 찌푸렸다. 한 발을 물러났지만 못마땅함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곱지 못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반지를 주시게요?”'“반지라도 끼워놔야 마음이 놓이지.”'내 여자라는 증표를 채워놓겠는 소리였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그러쥐며 책상 앞으로 움직였다. 그녀가 그에게 끌려가며 피식한 웃음을 흘렸다. '“역시 반지는 고리 같은 거구나.”'“고리보다는 족쇄라고 해.”'하신은 서늘하게 이르고 책상 서랍을 열었다. 은교는 멀뚱히 멈춰 서며 고개를 갸웃했다. '“족쇄? 고리와 족쇄의 차이가 뭐지?”'분명 무엇인가를 결박시키는 것에 사용되는 단어들이었다. 그렇지만 정확한 의미와 뜻은 엄밀히 다를 것이었다. 그녀는 괜스레 그것이 궁금해졌다. 그는 고급 보석함을 천천히 디밀고 입을 열었다. '“고리와 족쇄의 차이. 먼저 고리는 양 끝을 맞붙여 둥글거나 모나게 만드는 물건. 또는 어떤 조직이나 현상을 서로 연관되게 하는 이음매를 비유적으로 하는 말. 반면 족쇄는 죄인의 발목에 채우는 쇠사슬. 또는 자유를 구속하는 대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아……그렇구나.”'은교는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멍하니 쳐다봤다. '“혹시 국어사전을 죄다 외우셨어요?”'참말 놀라웠다. 하신은 연한 코웃음을 지었다. 가지런한 속눈썹을 내리깔고 멍해져 있는 그녀의 손을 끌어당긴 뒤 약지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서서히 시선을 들며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넌 족쇄를 찼어. 자유를 구속당한 거야. 내 눈앞에서 사라질 수 없게.”'즉각 입술을 덮치고 맹렬한 입맞춤을 가했다. 은교는 휘둥그레 눈을 치켜뜨며 자신의 목덜미와 허리를 포박시킨 그의 가슴을 움켜잡았다. 반지를 받았다는 기쁨을 느껴볼 새도 없이 모든 감각을 마비당하고 말았다. 그의 혀끝은 얼음 속에서 피어오르는 희귀한 불꽃같은 느낌이었다. 희한할 만큼 차가우면서도 불처럼 뜨거웠다. '그녀는 엉겁결에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자신의 모든 감각을 압도해버리는 그에게 바짝 매달리며 뜨거운 입맞춤을 만끽해들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그녀의 유약한 입술을 놓았다. 붉게 부풀어 오른 입술 위로 짧은 입맞춤을 전하며 팔을 거뒀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턱을 추켜올리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명심해. 난 반대한다고 했어. 잊지 마.”'“…….” '은교는 고개만을 간신히 끄덕였다. 폐부에서는 희미한 통증이 느껴지며 심장에서는 성질 사나운 괴물이 괴성을 질러대는 듯했다. 온몸이 아슬아슬 위태로웠다. '하신은 엄지손가락만으로 그녀의 축축한 입술을 쓰윽 닦아낸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의자에 앉고 서류를 붙잡았다.'“그만 나가봐도 좋아.”'“저기요…… 전, 반지를 받는 일이 이렇게 힘든 줄 처음 알았어요.”'그녀가 꾹 감겨 있던 눈을 떠 올리며 어눌하게 중얼거렸다. '그가 턱을 돌리고, 힘이 들 건 또 뭐냐는 눈빛을 쏘았다. 그녀는 입 안의 고인 타액을 삼키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읊조렸다.'“아무튼 나가볼게요.”'주춤주춤 몸을 돌리고 발길을 옮겼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어떻게 걸었는지도 모르게 문 앞까지 다다르며 손잡이를 붙잡았다. '그 순간 살포시 그러쥔 손길에서 찬란한 섬광이 일었다.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관심을 가져달라는 듯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은교는 그것을 보고 흔들리는 초점을 안정시켰다. '투명한 보석이 박힌 반지. '그와 그녀를 속박시키는 고리이자 족쇄였다. 서로를 하나로 결합시키며 구속해버리는……. 구속이라는 말이 껄끄럽긴 해도 반지는 무척이나 사랑스럽고 예뻤다. 문고리를 놓으며 다른 손으로 반지를 가만히 어루만졌다. '“이 보석의 이름이 뭘까요? '“…….”'하신이 조용히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몽환적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수정인가? 되게 정교하고 아름답다.”'감히 다이아몬드라고는 생각지도 못하는 중이었다. 그는 한손에 느긋이 턱을 괴며 고개를 갸웃대는 그녀를 찬찬히 지켜봤다. 그녀는 별안간 반지를 그에게 보이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외쳤다.'“있잖아요? 동생 분께서 오늘 오후에 올라가신다고 하셨거든요?”'“그래?”'“네. 그래서요, 오늘 안에 형수님 소리를 들어볼까 봐요. 이 반지를 보여주면서! 자꾸만 놀려대는 게 은근히 얄미웠는데, 마침 잘 됐어요. 소심한 복수를 해줘야겠어요. 응원 좀 해 주실래요? 잘하라고.” '“선전을 기원해.”'하신은 덤덤한 음성으로 응원해주며 태연하게 시선을 거둬들였다. 덤덤하거나 말거나 은교는 무척 힘이 된다고 주먹을 불끈 그러쥐었다. '“파이팅!”'씩씩하게 외친 다음 서둘러 문을 나섰다. 하신은 손끝으로 미간을 매만지며 옅은 웃음소리를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