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빨리 다시 보게 되었네, 우리?”'여전히 흠잡을 데 없는 미소를 지은 채 양세화가 그녀를 반겼다. '“좀 더 오래 고민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시원시원한 성격인가 봐.”'칭찬인 건지 비꼬는 건지 가늠하기 힘든 세화의 말들이 거친 사포처럼 신경을 문질러댔다. 지유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내가 한 선택이야. 후회도 원망도……, 이제 전부 내가 지고 가야 할 짐인 거야.’'양세화의 입장에서야 지난 한 달이 짧았을지 모르지만 지유에게는……, 지옥 같은 시간들이었다. '날이 갈수록 더 짙은 죽음의 그늘을 드리우는 엄마의 병마와 싸워야 했고, 점점 더 빈 고치가 되어 가는 진성을 지켜봐야 했던 나날들. '그리고 그 시간이 그녀에게 안겨 준 것은 엄청난 병원비와 진성이 광적으로 써내려간 부르지 못할 곡들이 전부였다. '그것이 지유로 하여금 현실을 실감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한 발, 한 발 위태롭지만 착실하게 종말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차라리 세화의 제의를 듣지 못했더라면, 그녀 역시도 또 다른 선택권 따위는 꿈도 꿔 보지 않은 채로 현실을 받아들였을지도 몰랐다. '원래 이렇게 살아지는 거라고. 다들 그렇게 사는 거라고. '하지만 한 번 뿌려진 말은 독초처럼 뇌리 속에 파고들어와 제멋대로 싹을 틔우고는 온 심장에 독기를 뿜어댔다. '마음속에 난 균열의 틈바구니에서 한 팔은 엄마에게, 다른 한 팔은 진성에게 맡기고 있는 기분이랄까. '엄마든, 진성이든 어느 한쪽이라도 놓쳐 버린다면 그녀는 곧장 그 균열 속으로 떨어지게 될 터였다. 그리고 그 밑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은 절망 뿐. '슬픈 사실은 그녀의 팔을 잡고 있는 두 사람 중 어느 한쪽도 그녀를 끌어올려 줄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지금 이 순간, 지유는 다시 이곳에 와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의지로 두 손을 모두 놓기 위해서. '그것이 모두 함께 나락으로 추락하지 않을 수 있는, 두 사람 모두를 위한 최선이라고 다짐하며. '그녀의 복잡한 심경이 표정으로 나타났던 모양이었다. 세화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나야 결심해 줬다는 사실만 중요한 거니까.”'지유가 뱉어내듯 말했다. '“강진성을 사랑해요. 그래서 그를 놓아주기로 했어요. 엄마 역시도 사랑해요. 그래서 엄마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고맙게도 그 해결책이 갈등할 필요도 없게 한 가지 뿐이더라구요.”'자신이 듣기에도 서늘할 정도로 시니컬한 어투가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양세화 역시도 그렇게 느꼈는지 처음으로 할 말을 잃은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 '이 끔찍한 만남의 시간을 일 분이라도 줄이고 싶었기에 지유는 세화를 향해 다시 질문을 던졌다. '“내가 진성이를 떠나는 것이 그쪽 조건이라고 했죠? 그럼 그걸 어떻게 증명하면 되는 거죠? 무턱대고 헤어지잔다고 강진성이 순순히 그러마 받아들일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잘 알 텐데.”'세화 역시도 생각해 둔 것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가 잠자코 지유의 앞에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다음 주 수요일이야. 노래 좀 하는 편이라며? 일단은 가수 지망생이라고 해 뒀어.”'완벽하군. '지유는 실소했다. 양세화라는 여자를 얕봐서는 안 된다는 걸 잊고 있었다. '“스폰서인 거로군요.”'부정도 긍정도 아닌 묘한 어투로 세화가 대꾸했다. '“그렇게 거창하게 표현할 것까진 없어. 강제로 어떻게 해 보려는 사람들 틈에 던져 주려는 건 아니니까. 연기를 연기로 받아들이든 아니면 진짜로 받아들이든 선택은 그쪽이 하는 거야. 중요한 건 그 자리에 지유 씨가 나갔다는 사실 뿐이니까. 진실이야 어찌되든 당사자만 함구하면 끝인 거고.”'차갑게 굳어져 있는 지유를 향해 세화가 꽤나 친절한 척하며 덧붙였다. '“아, 정말 가수가 되고 싶다면 나라면 받아들이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권해 주고 싶은데. 윤 이사님, 좀 밝히는 것만 빼면 꽤나 매너남인 데다가 THT기획사도 킹덤 만큼은 아니지만 괜찮은 편이거든. 데뷔하면 잘 키워 줄 수도 있을 거야.”'지유의 침묵이 너무 길어지자 세화가 콧잔등을 찡그린 채 물었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이해했어?”'지유는 한쪽 입술을 비틀며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한글은 5살에 뗐어요.”'또 한참 동안 명함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그녀가 불쑥 말했다. '“실패할 거예요.”'눈을 굴리는 세화를 보며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진성이는 이런 이야기들 믿지 않을 테니까.”'그럴 것이다.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진성이니까. '그러나 양세화는 별 문제 없다는 듯 어깨를 살짝 올렸을 뿐이었다. 옅은 웃음과 함께 세화가 입을 열었다. '“맞아. 믿지 않을 거야.”'너무 순순한 인정에 지유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세화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직접 ‘보게’ 하려고.”'윙 하는 이명을 들은 듯한 느낌에 지유는 저도 모르게 머리를 흔들었다. '진성에게 직접 ‘보게’ 한다 라, 분명 그 역할을 할 사람은…….'지유의 시선이 곁에 서 있는 문수에게로 천천히 움직였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문수는 마치 제 3자이거나 타인이기라도 한 양 그렇게 표정 없는 눈길로 자리를 지키고 서 있을 뿐이었다. '세화가 구상한 시나리오는 지유로서는 상상조차도 해 본 적 없을 만큼 추하고 잔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유는 그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사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벽증에 가까운 진성의 성격을 감안한다면 최상이라고 해야 할까. '“정말, 빈틈이라곤 없군요.”'어처구니없게도 그녀는 웃음이 나오려 했다. 그리고 동시에 울음이 터질 것 같기도 했다.'결국 지유는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말았다. 절대로 양세화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녀의 안에서 또 하나의 자아가 스스로를 비웃었다. '‘울긴 네가 왜 울어? 무슨 권리로? 불쌍한 척, 피해자인 척 하지 마. 박지유. 그런다고 네 자신에 대한 환멸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넌 여기 온 순간부터 이미 저 여자가 내거는 조건이 뭐였든 고개를 끄덕일 준비가 되어 있었잖아.’'잔인한 본심의 질책 덕분에 눈물은 말랐다. '대신 금방이라도 몸이 반으로 나뉠 것만 같은 고통이 그녀를 휩쓸었다. '지유를 무너지지 않도록 도와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세화의 목소리였다. '“난 원래 인내심 많은 사람 아냐.”'부지불식간에 지유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미 그 인내심의 3분의 2쯤은 써버린 상태겠지.’'“상대가 퇴로를 확보하게 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도 아니죠.”'금방이라도 비명을 지를 것만 같은 표정에도 불구하고 예상외로 담담하기까지 한 지유의 목소리에 세화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녀를 보며 문수가 몸을 움직였다. '지유는 손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따라오지 말아요.”'“석하리까지 데려다…….”'그녀의 사나운 시선이 문수에게 날아가 꽂혔다. '“닥쳐요. 한마디라도 더 당신 목소리를 들으면 정말로 피를 보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서슬이 퍼런 그녀의 대꾸에 문수가 굳은 듯이 멈춰 섰다. 지유는 세화를 향해 돌아섰다. '“좋은 충고, 좋은 의견, 좋은 경험 감사합니다. 많이 배우고 가네요.”'그녀의 등 뒤로 문이 차갑게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