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상황을 피할 수만 있다면 당장 지옥불 속에 뛰어들라고 말한다 해도 그 말한 누군가를 축복해 줄 수 있을 텐데.’'지유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입안에서의 변화일 뿐, 부드럽게 휘어진 그녀의 입꼬리는 여전히 평온하고 완벽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만에 하나 생길지도 모르는 이런 순간을 대비하기 위해서 그동안 그렇게 요가 학원에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부은 거니까.'‘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쩌고 하는 말이 말짱 과대 선전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유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그 안에서 몰아치고 있는 엄청난 격랑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죽어도 떨어질 것 같지 않던 이글거리는 한 쌍의 눈동자가 드디어 그녀의 얼굴에서 비껴갔다. 고작 몇 초였을 뿐임에도 지유는 얼굴이 잘 구워진 페스트리의 표면처럼 바삭바삭 부서져 내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냥 아프다고 하고 집에 있었어야 했어.’ '때늦은 후회를 해 보며 지유는 누구도 들을 수 없을 만큼 가느다란 한숨을 토해 놓았다. '출발하기 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일부러 미적미적 준비를 늦춰 보긴 했지만 차마 은혁에게 참석하기 싫다는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이번 어썸티브이의 개국 행사는 환희천 엔터테인먼트와 킹덤 프로덕션을 비롯한 국내 기획사들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굴지의 행사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 자리에 환희천의 대표이사인 임은혁이 빠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고 은혁은 자신이 가는 곳이 어디든 결코 지유를 떼어 놓는 법이 없었다. '어차피 한 번쯤 마주칠 것을 예상 못한 것은 아니다. 제법 내놓으라 하는 기획사 대표이사를 남편으로 두고서 강진성 같은 초대형 스타를 영원히 피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았으니. 다만 최대한 피할 수 있을 만큼 피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지유는 슬쩍 눈을 들어 자신을 비껴간 시선의 주인공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야위었나.’'티브이에서는 꼭 실제보다 더 살집 있게 보인다고 악착같이 다이어트에 몰두하던 연습생들의 투덜거림은 비단 변명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요즘 티브이를 틀기만 하면 어떤 프로에서건 인기 가수 강진성의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그것은 이렇게 각이 지고 날카로운 모습은 아니었다. '각지에서 그에게 쏟아지고 있을 살인적인 스케줄을 충분히 이해하기에 지유는 속으로만 고개를 끄덕였다. 깊게 드리워진 다크 서클의 흔적을 교묘히 감출 수 있는 것은 메이크업 팀의 탁월한 실력 덕일 것이다. '은혁이 운영하는 환희천 엔터테인먼트와 진성이 소속되어 있는 킹덤 프로덕션은 자기 소속사의 연예인들을 다루는 스타일이 판이하게 다르기로 유명했다. 환희천이 가족 같은 분위기를 강조하고 개개인의 인간적인 모습과 의지, 노력 등을 높이 산다면 킹덤은 독립적인 성격이 더 짙었다. 누구든 실력이 있고, 자신의 능력이 된다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모토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이 바닥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킹덤이 우선시 하는 ‘실력’과 ‘능력’의 범위는 돈이나 백, 혹은 비겁한 편법까지도 모두 포괄한 항목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킹덤의 대표이사인 양세화는 ‘돈만 된다면 소속 연예인을 불구덩이에라도 던질 것.’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여자였다. '그리고 요즘 최고로 ‘돈이 되는’ 것은 강진성이었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21살에 댄스 가수로 가요계에 입문한 진성은 조각 같은 미남형은 아니어도 꽤나 잘생긴 얼굴이었고, 파워풀한 춤에 걸맞게 큰 키와 탄탄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가 이번 2년만의 복귀에서는 폭발적인 가창력까지 드러내며 새로운 모습으로 팬들을 사로잡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만으로 강진성의 인기가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진성은 드라마틱한 인생 역전의 주인공 중 한 명이었고, 그의 인생 스토리가 오히려 더 고른 연령층과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게 된 토대였다. '삼 년 전, 강진성이라는 이름 옆에는 무수히 많은 스캔들이 따라다녔다. 단 하나로도 충분히 연예계에서 매장될 만큼 지독한 추문들이었기에 누구도 강진성이 다시 재기할 수 있으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삼 년 동안의 잠수 끝에 진성은 다시 나타났다. 뒤늦게 밝혀진 행적들과 알리바이들로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면서. '게다가 그가 직접 작사, 작곡해서 들고 나온 곡들은 강진성이라는 남자가 가수 이상의 진정한 뮤지션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훌륭한 것들이었다. '그렇게 화려하게 재기한 강진성에게는 그 아픔의 시간이 오히려 약이라도 된 것처럼 호소력 짙은 음색과 강인한 정신력까지 곁들여졌다. 그래서 어떤 쇼 프로나 버라이어티에 출연해서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까지 가지게 된 것이다. '정말로 전화위복이 아닐 수 없었고, 그런 그의 인생역전 배경이 있었기에 진성의 인기는 더욱 급상승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저런 다크 서클쯤이야 당연한 것이라 여겨야 했다. 화려한 재기에 붙은 부록 같은 것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다랗고 깊은 눈 밑으로 짙게 드리워진 그늘을 보고 있노라니 지잉 하고 작은 이명같은 아픔이 귓가에 스쳐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이크에서 나오는 작은 소음처럼 희미하긴 해도 결코 놓칠 수 없는 그 울림은 귀를 타고 들어와 깊숙한 어딘가로 파고들었다. 왼쪽 가슴께가 욱신거리자 지유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마도 난 이 남자가 좀 더 행복한 모습이기를 기대하고 있었나 봐.’'그녀의 시선이 생각보다 오래 진성의 얼굴 언저리를 서성였던 모양이었다. 자석처럼 그의 시선이 끌려왔다. '지유는 무심한 듯 조용히 눈을 돌렸다. 마치 만 분의 일 초도 그를 응시하는 데 시간을 할애한 적이 없는 사람처럼. '단지……, 움직이는 시야 속에 그가 있었기에 피치 못하게 스쳐 보아야만 했다는 듯이.'또다시 그녀의 얼굴이 진성의 눈빛 속에서 불타올랐다. '“안녕하십니까. 임은혁 이사님.”'굵고 낮은 목소리가 끼어들어와 대화의 물꼬를 텄다. 무대 준비를 살피느라 한발 늦게 그녀와 은혁을 발견하게 된 진성의 매니저 김문수였다. '순간 지유는 제삼자가 된다는 것이 꽤나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보자 문수의 얼굴에 찰나의 당황이 스쳐 간 것도,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의 동작으로 진성을 툭 건드리는 것도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행동이 스위치가 된 듯, 반사적으로 진성이 허리를 살짝 접었다. '그 기계적인 동작을 보는 순간 줄에 매달려 조종되는 마리오네트 인형이 떠올라 지유는 식도를 타고 역류하는 위산을 꾹 눌러 참아야 했다. '한때는 그녀 역시 저 줄의 어느 끝에선가 매달려 있었다. '오직 은혁만이 세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순수한 호기심과 호감으로 진성의 인사를 받았다. '“대스타시라선지 강진성 씨 얼굴 한 번 보기가 하늘의 별따기군요. 이렇게 우연찮은 기회가 아니면 안 되다니. 인사가 늦었지만 멋진 재기 축하드립니다.”'“네.”'일견 불손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의 단답형 대답에 가볍게 눈꼬리를 올린 것은 은혁 뿐이었다. 그녀는 모든 피가 몸에서 빠져나간 듯 싸늘한 기분이었지만 놀랍지는 않았다. 문수 역시도 얼굴색이 조금 더 어둡게 물들긴 했지만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 '은혁이 다시 말했다. '“몇 번 우리 기획사의 아이들과 합동 공연을 제의해 봤는데 마음이 안 내키셨나요? 물론 우리 아이들이 진성 씨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긴 합니다만, 그래도 제법 괜찮은 퍼포먼스 하나쯤은 나와 줄 듯한데 말입니다.”'이번에는 지유 역시도 움찔하고 말았다. 처음으로 듣는 이야기였다. 침착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저도 모르게 은혁과 진성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무대 준비에 열을 올리던 몇몇의 시선도 그들에게로 집중되었다. '이런 파격적인 제안이 경쟁 기획사의 대표 입에서 직접 나오는 일은 흔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누구라도 들으면 솔깃할 만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하긴, 경쟁사니 라이벌이니 하는 것들에 구애받지 않고 최고의 무대만을 생각하는 것이 임은혁답기는 하다.'지유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틀고 말았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은혁이 재차 대답을 재촉했다. 사람들의 시선 역시도 대답을 궁금해 하며 진성에게로 쏠리기 시작했다. '“‘협찬’은 받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