듬직한 큰 손이 낮과 밤을 바꾸어 사는 올빼미 족이 분명한 얄팍한 어깨를 슬며시 잡고 흔들었다.'“미호야, 미호야?”'하지만 단잠에 푹 빠진 미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둬서는 안 되겠다 싶은 듬직한 손이 다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미호, 12시가 넘었어. 미호야?”'그제야 수면 안대까지 하고 푹신한 이불에 폭 파묻혀 있던 미호가 고치 속의 애벌레처럼 꿈틀거렸다.'“우우웅!”'귀찮다는 듯 조막만 한 얼굴 전체에 주름을 가득 실은 미호는 투정을 부려댔다.'“5분만, 5분만 더요.”'“촬영해야지. 다 기다리고 있잖아.”'“4시에 잤단 말이에요.”'“8시간 잤으면 충분히 잤어. 자, 일어나.”'똑같은 시간에 자고도 4시간 전에 일어난 김 피디의 일침에도 불구하고 미호는 오히려 더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아이, 졸린단 말이에요!”'한껏 짜증을 낸 미호가 머리끝까지 이불을 홀딱 뒤집어써 버리자 김 피디는 최후의 카드를 내밀었다.'“샐리가 널 젖혔어.”'김 피디의 말이 끝나자마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지구가 멸망을 한다고 해도 까닥하지 않을 것 같던 미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이다. 마치 강시처럼 말이다. 김 피디는 재빠르게 예쁜 강아지 모양을 하고 있는 그녀의 수면안대를 벗겼다. 그러자 자타가 공인하는 깜찍의 결정체인 얼굴이 드러났다. 아직 잠이 덜 깨 부스스하긴 했지만 호수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큰 눈에 매력점 하나가 콕 찍힌 모양 좋은 코와 도톰한 입술이 절로 예쁘다는 탄사를 뽑아내게 했다. 미호가 물었다.'“몇 위에요?”'“6위.”'“샐리는요?”'“3위.”'“꺅!”'피디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외마디 비명을 질러댄 미호는 믿기지 않는 사실에 대해 역설했다.'“어떻게, 어떻게 샐리 따위가 날 젖힐 수가 있어요? 농담이죠?”'“진담.”'피디의 장난에 미호는 길길이 날뛰었다.'“아아악! 싫어, 싫어!”'악을 쓰는 것으로는 모자라 발까지 버둥거리는 것을 보니 잠에서 완전 깼다 싶은 김 피디는 고약한 장난을 멈추었다.'“조감독, 검색 순위 다시 한 번 봐봐.”'“예!”'감독과 쿵짝이 잘 맞는 조감독은 얼른 노트북을 펼쳤다. 그리고 아까부터 요지부동이었던 순위를 확인했다.'“역전인데요?”'“정말요?”'“응. 미호가 4위고 샐리는 9윈데?”'“어디 봐요!”'조금 전까지 이불 속을 파고들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은 날렵함을 보이며 침대에서 뛰어내린 미호는 조감독이 펼쳐 놓고 있는 노트북의 모니터를 확인했다. 조감독의 말대로 저는 4위였고 눈엣가시 같은 샐리는 저 아래 9위에 머물고 있었다. 미호가 활짝 웃었다.'“브라보!”'미호가 소꿉친구인 샐리를 그토록 견제하는 이유가 있었다. 적성에 맞지 않은 공부를 작파하고 몰래 한국으로 들어와 취미인 명품관 순례를 하던 중 김 피디로부터 놀라운 제의를 받았다. 외국 방송에서 인기리에 방영됐던 프로그램의 한국판 주인공이 필요한데 한 번 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부유한 계층의 두 친구가 나와 럭셔리한 삶을 보여주는 프로는 그녀도 즐겨 보던 프로인지라 재미있겠다 싶어 그 자리에서 승낙을 했다. 비록 공중파가 아닌 케이블 티브이이긴 했지만 그것이 더 마음에 들었다. 왜냐하면 저만 보면 고삐 풀린 망아지라고 혀를 끌끌 차는 할아버지가 케이블 티브이를 볼 일은 만무했기 때문이다. 거기까지는 참으로 좋았다. 그런데 다른 케이블 방송에서 철없기로 치자면 저와 쌍벽을 이루는 샐리를 섭외해 버린 것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섭외를 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바로 샐리가 출연하는 프로의 성격이 미호가 출연하고 있는 프로와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는 것이었다. 거기다 기획은 미호 쪽이 훨씬 빨랐지만 샐리 쪽에서 먼저 방송 테이프를 끊어 버린 바람에 졸지에 따라쟁이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 뛰어난 미모와 천진난만함으로 인조인간인 샐리를 쭈욱 밟아 주고 계시다는 사실!’'그 사실에 신이 난 미호는 이제나저제나 하고 저만 기다리고 있던 스텝들에게 필름을 돌릴 시간이 됐음을 선언했다.'“여러분, 사랑스러운 아침이에요!”'미호가 언제 짜증을 냈냐 싶게 화사하게 아침 인사를 건네자 카메라 감독은 즉시 카메라의 ON을 눌렀다. 그리고 시청자들을 대변하고 있는 김 피디가 멘트를 던졌다.'“잘 잤어?”'“네, 매우요. Very nice!”'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어 준 미호가 욕실 쪽으로 움직이자 김 피디가 물었다.'“오늘 일정은?”'“으음, 일단 샤워하고 브런치 먹으러 가야죠.”'“그 다음엔?”'“쇼핑!”'“어떤 거?”'“아무 거나요. 백이여도 좋고 구두도 좋고 옷도 좋고.”'“계획성 있는 소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드니?”'미호의 씀씀이를 알고 있는 김 피디가 살짝 우려의 뜻을 나타내자 칫솔에 치약을 묻히던 미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그건 예산이 정해져 있는 사람들 이야기지 미호 이야기가 아니에요. VVIP 카드를 쓰는 미호는 해당 없어요.”'“그래도 계획을 세워 놓고 구매를 하면 더 낫지 않을까? 너 저번 주만 해도 구두 5켤레나 샀어. 그것도 똑같은 디자인으로 색만 다르게. 그거 낭비지 않아?”'김 피디의 지적에 미호는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전 소비자가 아니라 콜렉터라고요.”'“콜렉터?”'“으응! 우리 할아버지가 골동품을 모으는 거랑 똑같아요. 우리 할아버지도 백자며 청자 바리바리 쌓아 두시고도 만날 사들이시거든요. 그냥 사서 진열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 불면 날아갈까 쥐면 깨질까 하면서 애지중지하세요. 그런 진정한 콜렉터의 피를 이어 받은 미호도 백이며 구두 하나도 안 버리고 애지중지하잖아요. 그러니까 콜렉터. 오케이?”'평범한 뇌구조를 가진 사람이면 할 수 없는 사차원 적 변(辯)에 지극히 평범한 뇌구조를 가진 김 피디가 물었다.'“콜렉터도 좋지만 신상에 대한 욕심을 조금만 버리고 그 돈으로 불우한 이웃들을 돕는 건 어떻겠니?”'“제 손으로 벌면 생각해 볼 문제에요. 하지만 전 할머니한테 손 벌려서 겨우겨우 먹고 사는 불쌍한 학생이라고요.”'“VVIP 카드 죽죽 그어대는 것으로 팔 운동하는 네가 불쌍하면 월급쟁이인 난 가련하겠다.”'김 피디의 자조 섞인 핀잔에 미호는 그때만 기다렸다는 듯 말을 매달렸다.'“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뭐?”'“피디님 월급으로 백 두 개 사면 손가락만 빨아야 하잖아요. 불쌍해.”'개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미호의 대꾸에 적잖이 자존심이 상한 김 피디가 삐딱하게 물었다.'“백만 안티 양성하는 거냐?”'“안티 같은 거 이백만이 와도 거뜬해요. 왜? 난 소중하니까요.”'할 말을 잃은 김 피디가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그래, 많이 소중해라.”'“잠시 후에 봐요. Bye!”'미호는 애교 있는 눈웃음에 손까지 흔들어 주고 욕실 문을 닫았다. 그리고 뉴질랜드산 프로폴리스 치약을 듬뿍 묻힌 칫솔로 양치질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오늘도 즐거운 하루를 만들기 위한 계획을 머릿속으로 착착 짜나갔다.'‘백화점 가서 카디건이랑 신 좀 보고 미용실 들려서 머리 하고 마사지 받고 저녁에는 클럽에서 즐겁게!’'클럽을 떠올리자 절로 부비부비 댄스가 나오는 미호는 콧노래를 부르며 양치질에 전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