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선 이야기 : 북동쪽 귀인

은영의 안내에 따라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다가 드디어 한적한 곳의 어느 빌라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점집이라고 해서 기와집에 알록달록한 천이 매달린 대나무 같은 게 꽂혀 있을 줄 알았는데….”

처음 가보는 점집이 신기하여 이리저리 둘러보았으나 외견상 별다른 특징을 찾을 수 없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낡은 빌라였다.

“우리 엄마 단골이야. 아무나 봐주는 데가 아니래. 암튼 용하다니까….”

‘연화 보살’이라고 쓰인 한지가 붙어 있는 101호 초인종을 누르니 초로의 퉁퉁한 아주머니가 반갑게 문을 열어 주었다. 향냄새가 확 풍겨 나왔다. 집 안에 들어서니 비슷한 연령대의 아주머니 여러 명이서 떡이랑, 과일 등 음식 준비에 한창이었다.

“내일 큰 굿이 있어서 좀 바빠.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보살님께 말씀드릴게.”

한쪽 다리를 약간 끌듯이 걷는 아주머니가 안방으로 들어가더니 금방 나와서는 들어가 보라고 손짓했다.

TV에서 보는 것처럼 사천왕 그림 앞에서 무당 옷이라도 입고 있을 줄 알았는데, 기껏해야 쉰 정도로 밖에 안 보이는 단아하게 쪽진 머리의 깡마른 ‘보살님’이 빛바랜 보라색 개량 한복을 입고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연화 보살은 은영을 향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알은체를 했다. 그리고 천천히 나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미간을 약간 좁혔다. 그리고 외모와 딱 어울리는 맑고 높은 목소리로 나른하게 말했다.

“독한 게 붙었네.”

나와 그의 생년월일을 적어 보살님 앞에 내놓았다.

“전생에도 똑같은 인연이었어. 이렇게 얽힌 인연은 질긴 법이지. 사달이 나야지 이생에서 연이 끝날 거야. 이생에서 연이 끝난다 해도 내생에 다시 만날 것이고.”

나오는 게 한숨 밖에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용하다는 무당에게서 부적이나 하나 쓰면 어떨까하는 생각으로 왔는데,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란 말인가? 이러면서 굿하라고 하는 거 아냐? 그거 천만 원 이상 든다고 하던데.

“그… 사달이라는 게, 누구 하나 죽어야 끝난다는 말인가요?”

나는 절망적인 마음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차하면 그런 일도 벌어질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거야. 사람 일을 어떻게 100% 단정할 수 있겠어?”

“좋게좋게 끝낼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자네가 오늘 나를 찾아오면서 그 사람하고 당장 끝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왔어? 내가 그럴 수 있으면 보살이 아니고 도사지.”

“아… 그렇지요.”

예상외의 농담에 살짝 미소를 짓긴 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는 말 때문에 마음은 밝지 못했다.

“꽤 시달렸지?”

“반년 정도요. 최근에 점점 더 심해져서….”

“폭력도 쓰고 그래?”

“직접적으로 폭력을 쓰는 건 아닌데, 집에 쳐들어오고, 물건 부수고, 욕하고, 협박하고….”

보살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럼 나를 찾아오지 말고 경찰을 찾아가야지.”

나라고 왜 그 생각을 안 해봤겠는가? 하지만 그와 근 1년간 연애를 한 사이인데 신고한다고 무슨 큰 처벌을 받을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화만 돋울 것 같았다.

게다가 그는, 경찰이다.

“그냥 좋게 해결하고 싶어서요. 제가 그 사람 인생 망치게 했다가 나중에 있을 후환이 더 무서워요.”

“그런 놈들한테는 세게 나가는 것도 괜찮아. 그래야 정신이 번쩍 든다구. 그런 놈은 만만하게 보일수록 더 날뛴다니까.”

이런 말은 은영에게서도 수없이 들어왔던 얘기다. 내가 돈까지 내면서 용하다는 보살님께 똑같은 얘기를 들으러 온 건 아닌데.

보살은 입을 다물고 내가 써준 사주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북동쪽에서 귀인이 나타날 거야. 추석 되기 전에 이놈도 떨어져 나갈 것이고.”

“정말요?”

역시 용한 보살이다. 보통 동서남북, 사방으로 두루뭉술하게 예언을 하는데, 이 보살은 일단 팔방을 써서 정확도 높은 예언을 하지 않는가?

그런데 다음 주가 설인데, 그놈은 추석이나 되어야 떨어져 나간다니 도대체 몇 달을 더 시달려야 하냔 말이다.

“귀인이 나타나긴 하는데…. 미련하게 귀인 기다리다가 험한 꼴 당하지 말고 위험하다 싶으면 경찰에 신고를 해. 알겠어?”

“네.”

“더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

“뭐…. 부적 같은 건 안 써주시나요?”

보살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30만 원, 50만 원짜리 있는데, 부적 쓰려구?”

“헤? 그렇게 비싸요? 한 10만 원짜리는 없어요?”

“자네 경우에는 부적은 소용없고, 하려면 굿을 해야 하는데, 돈 많이 드니까 그냥 경찰에 신고해.”

나는 복비로 5만 원을 책상에 얹어 두고 그곳을 나왔다. 은영에게서 듣던 말과 똑같은 말을 듣고 5만 원을 내고 나오다니 정말 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조만간 북동쪽에서 귀인이 짜잔 하고 나타난다는 정보를 들었으니 그걸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다.

성북구에서 북동쪽이면 강북구인가? 미아리, 수유리? 아니면 서울을 벗어나서 구리?

참… 내가 한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