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부시게 푸른 하늘이 펼쳐졌다. 생명력을 꽁꽁 숨긴 앙상한 나뭇가지는 하늘을 향해 찌를 듯이 뻗어 있었다. 남자는 선글라스를 벗지 않은 채 차에서 내려 곧장 병원을 향해 걸어갔다. 공항에서 내려 세 시간 가까이 달려온 곳에 위치한 병원은 마을에서도 한참 떨어진 외진 곳이었다. 병원 내부는 색이 덕지덕지 지워진 허름한 외부와 달리 깔끔하게 손질되어 있었다.'후우.'남자는 303호 병실 앞에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문을 열기 전 선글라스를 벗자 날카로운 눈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는 섬뜩한 기운마저 감돌았다.'병실은 고요했다. 그는 곧장 침대로 다가가지 않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뿌연 습기가 뿜어져 나오는 가습기 옆에 빈 물병이 쓰러져 있고, 그 위로 두 개의 링거 주사와 함께 검붉은 피가 담긴 수혈 팩이 걸려 있었다.'똑똑, 주사액과 핏방울은 너무 느리게 떨어졌다.'그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반쯤 내려진 블라인드 아래로 나뭇잎 한 장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게 보였다. 바람이 휙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나뭇잎은 악착같이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으으음.'들릴 듯 말 듯 낮은 신음 소리가 고요함을 깨웠다. 남자는 천천히 침대로 다가가 섰다.'가까이서 보니 여자의 얼굴은 핏기라곤 없이 창백했다.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아니라면 살아 있는지 의심이 갈 정도다. 까칠하니 마른 입술은 살짝 움직이기만 해도 피가 배어 나올 것 같았다. 시트 위에 얌전히 놓인 여자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움직였다.'아기, 내 아…….'남자의 검고 짙은 눈썹이 홱 꺾여 올라갔다. 그는 한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제발, 제…… 발…….'목소리는 낮고 탁해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남자는 힐끗 시간을 확인했다. 의사와 약속한 시간에서 벌써 10분이나 지나 있었다. 병실까지 찾아올 필요는 없었는데…….'뒤늦은 후회에 남자의 미간이 짜증스럽게 일그러졌다.'미련없이 돌아서서 병실을 나갔어야 했다.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여자의 목소리 따위 무시하면 그만이다. 아니, 들어올 필요조차 없는 거였다. 그러나 믿을 수 없게도 남자는 침대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갔다.'인기척을 느꼈는지 여자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메마른 입술과 달리 반쯤 치켜뜬 여자의 눈동자는 촉촉이 젖어 있었다.'여자가 돌아서는 남자의 옷자락을 허술하게 움켜잡았다. 뿌리칠 필요도 없이 뒤로 한 걸음만 물러나도 그대로 떨어져 나갈 정도의 미약한 힘이었다.'의사를 만나보고 오겠습니다.'그대로 나갈 거라고 생각했는지 옷자락을 움켜잡은 여자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꽉 움켜잡고 놓지 않았다.'남자는 서늘한 시선으로 여자의 손과 눈동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부탁, 부탁…… 해요.'갈라진 입술에서 붉은 핏물이 배어 나왔다.'우리 아기, 아기를 부탁……. 미안…… 합니다.'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여자의 손이 시트 위로 툭 떨어졌다. 휑한 병실은 더할 수 없이 고요했다. 그사이 창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하나'''띠링띠리링.'시끄러운 벨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귀까지 틀어막았지만 죽어라 울어대는 벨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아아악!'결국 봄은 자명종 소리보다 더 크게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 부숴 버릴 것처럼 책상으로 달려가 툭 튀어 올라와 있는 버튼을 있는 힘껏 내리눌렀다. 벨소리를 최대한 크게 해놨더니 귀가 다 먹먹했다.'아, 젠장!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 거야.'아주 잠깐 침대에 누운 것 같은데 그사이 두 시간이나 훌쩍 지났다. 혹시 시계가 잘못된 건가 싶어 핸드폰을 확인했더니 전원이 꺼져 있다. 전화받기 귀찮아서 꺼놨다는 걸 깜박했다. 다시 켜놓을까 하다가 그대로 책상 위에 던져 놓고 입고 있는 옷차림에 카디건만 하나 걸쳤다. 자기 전에 뭐라도 마실까 하고 냉장고를 열었는데 김치만 덩그러니 있었다. 집 밖으로 나가본 지가 일주일은 넘은 것 같다. 그러니 제대로 된 식사를 언제 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당장 유 팀장이 쫓아온다고 해도 일단 배부터 채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기름기로 반질거리는 머리카락을 숨기기 위해 모자를 푹 눌러쓰고 우유, 빵, 계란, 라면. 최대한 간단하게 해 먹을 수 있는 것들을 떠올렸다. 근처에 제과점이라도 있으면 생크림 케이크를 사서 통째로 먹어버리는 건데.'일단 분식집부터 들러서 오뎅, 김밥, 떡볶이, 순대부터 사야겠다.'봄은 입속으로 사르르 감도는 침을 꿀꺽 삼키고 졸린 눈을 겨우 끌어올리며 현관문을 열었다.'응애! 응애!'문을 닫고 터벅터벅 몇 걸음 걸었을 때, 숨넘어가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처럼 귓속을 파고들었다.'벌써부터 목소리 성량 키울 일 있나. 왜 그렇게 아기를 울리는 거야.'울음소리만 들으면 누가 꼬집는 줄 알겠네.'인상을 찌푸리며 길게 하품을 하던 봄은 쩍 벌린 입술을 천천히 오므렸다.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날렵한 턱에 푸르스름하게 번진 수염 자국이었다. 손을 대면 까칠한 느낌이 그대로 묻어날 것 같았다. 키는 남들 자랄 때 얼마나 열심히 자랐는지 190은 훌쩍 넘은 것 같고 쫙 빼입은 양복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봐도 꽤 비싸 보였다. 게다가 선글라스는 얼마 전 그녀가 인터넷으로 보고 침을 질질 흘렸던 샤넬 브랜드였다.'와우, 떡하니 갓난아기만 안고 있지 않았다면 휘파람이라도 불었을 것이다. 남자는 그 잘난 외모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빽빽 울어대는 아기를 어설프게 안고 있었다. 달래기라도 하든가, 생긴 건 최상급인데 아기한테는 확인할 것도 없이 빵점짜리가 분명했다.'남자가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 그녀를 지나쳐 갔다.'저…….'전혀 아는 체할 생각은 없었는데 어찌나 아기가 목이 터져라 울어대는지 저도 모르게 남자를 불러 세웠다. 대꾸도 없이 돌아본 남자는 선글라스 때문에 표정은 알 수 없지만 꾹 다문 입술만 봐도 거친 말이 터져 나올 것처럼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아기가 우네요.'우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고함을 치는 것 같다고 말하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그런데 이 남자, 그녀의 말에 그래서?라고 묻지는 않았지만 표정은 딱 그렇게 묻는 것처럼 보였다.'제가 한번 달래볼까요?'이래 봬도 아이를 둘이나…….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남자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기를 그녀의 품으로 쓱 던지듯 내밀었다.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봄은 엉겁결에 아기를 받아 들고 어르기 시작했다.'어이구, 저런 저런. 우리 아기를 누가 울렸을까.'쩌렁쩌렁한 울음소리와 달리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아기는 얼굴이 붉다 못해 시커멓게 질려 있었다. 세상에, 좀 달래줄 것이지. 무슨 나무토막도 아니고 안고만 있으면 단가.'뚜욱. 그만 울자. 이모가 때찌해 줄게. 그만 뚜욱.'품에 안고 살살 달래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아기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잠시 후, 아기는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이렇게 예쁜 아기를 왜 그리 울리는지.'봄은 잠자는 아기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자는 모습을 보니 천사가 따로 없었다.'아기가 참 예쁘네요.'그녀에게 아기를 건네받은 남자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아기를 달래는 동안 마치 먼 외계에서 온 생물체를 지켜보는 것처럼 멀뚱히 서 있기만 하더니 그 흔한 고맙다는 말도 없었다. 딱히 인사를 바라고 한 건 아니기에 봄은 힐끗 남자를 쳐다본 뒤 멋쩍은 웃음을 짓고는 뒤돌아섰다.'응애! 응애!'한 걸음도 내딛지 않았는데 다시 아기가 울기 시작했다. 에라, 모르겠다. 지금 한가하게 남의 아기나 달래줄 형편인가 말이다. 머리를 감은 지 삼 일, 아니, 그보다 더 오래돼서 근질거려 죽겠고, 이럴 시간이면 부족한 잠을 자는 게 백번은 나았다. 게다가 무엇보다 배가 고파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대로 한 걸음 두 걸음을 내디뎠다. 그런데 무슨 조홧속인지 삐약삐약 울어대는 아기 울음소리가 자꾸 뒷목을 잡아당겼다.'돌아설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