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미끄덩 자식을 어떻게 죽여 놔야 잘 죽였다고 소문에 날까. 프라이팬에 다글다글 볶아 쥑여? 아님, 감자 찌 듯 푹푹 삶아서? 아냐, 아냐, 진득허니 간장 졸이듯 졸여 죽이는 방법도 있군. 흐흐흐…….'누군가 들었다면 기함을 토할 생각들을 끊임없이 되풀이 하는 민재의 입가가 비식비식 올라가더니 급기야는 정신이라도 나간 듯 뜻 모를 웃음까지 흘려보냈다. 상상만으로도 조금 전 받은 스트레스에 3분의 1은 날아가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완 반대로 차를 준비하는 손놀림은 민첩하고도 능숙했다. '송 회장이 즐겨 마시는 차를 넣어둔 차호를 꺼내고 찻잔을 준비하는 동안 상상만으로도 통쾌했던 ‘미끄덩을 잘 죽이는 몇 가지 방법에 대한 고찰’ 은 머릿속에서 흐릿해져갔다. '그러니까, 정확히 30분전, 본채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냥 막연한 불안감을 안고 손님 접대용 다실(茶室)로 향했는데,'“양 비서님, 오랜만이네요?”'다실 밖에는 머리카락 한 올 삐어져 나오지 않게 빗어 올린 30대 중반의 남자가 꼿꼿하게 기립해 있었다. 윤 실장과는 다른, 늘 엄격한 눈빛에 ‘모’ 아니면 ‘도’ 일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송 회장 수행비서인 양준필 비서다.'“예, 아가씨,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회장님 기다리십니다.”'그때였다. 민재의 귀에 낮은 톤의 남자 웃음소리와 함께 할머니의 낯선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내가 제대로 듣긴 들은 건가? 사람이 살다보면 별의별 일들을 다 겪는다더니 지금이 딱 ‘그 별의별 일’ 에 속하는 때가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할머니가 언제 저렇게 소리 내서 웃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었나. 민재는 송 회장이 어떻게 웃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만큼 할머니의 웃음소리는 드문 것이었다. '의문에 찬 민재의 눈이 무슨 일이냐는 듯 양 비서에게 향했다. '“강정혁 씨가 들어계십니다.”'그렇다는 말은, 그 미끄덩이 와 있다는 말이잖아. 젠장, 더럽게도 빨리 왔군. 이 산뜻한 주말에 노인네와 수다나 떨 만큼 그렇게 한가하다 이건가. 저 대꼬챙이 같은 노인네에게 어떻게 웃음을 끌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만으로도 미끄덩이 보통은 넘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아, 비디오가 떨지 말고 잘 해 줘야 할 텐데……. '민재는 점점 가중되는 불안감에 옆에 뻘쭘하게 서 있을 세진을 향해 흘깃 시선을 돌렸다. 본채에 도착하기까지 단 한마디도 없이 꾹 입을 봉하고 있는 게 맘에 걸렸다. 할머니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정도는 미리 귀띔이라도 해 줄걸 그랬나? 괜히 미리 알면 안 한다고 발 뻗을 것 같아서 말을 안 했는데 모르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놀랄수……도…… 어럽쇼? 이 녀석 상태가 왜 이래?'민재의 양 눈썹이 황당하다는 모양으로 치켜 올라갔다. 이 나조차도 기가 눌리는 상황에, 비디오 녀석은 편안하다 못해 심드렁해 보이기까지 한 얼굴인 것이다. 뭐랄까, 빨리 끝내고 잠이나 한숨 잤으면 좋겠다는 듯 게슴츠레 풀리기까지 한 눈. 더불어 미약하게 입을 벌리며 하품까지 해댄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인간이야. 보통 ‘송가 사택’에 들어오면 그 위용에 기가 눌려야 정상인데(나조차도 처음 왔을 때 얼마나 쫄았던가) 이 녀석은 천하태평인 얼굴이나 하고 있으니 불안해하는 내가 오히려 비정상인 것 같다.'한번 긴 숨을 들이쉬자 비디오가 힘내라는 듯 시선을 마주쳐 온다. 알았다는 듯 고갯짓으로 답을 해주고는 다실(茶室)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말도 안 되는 흐름을 막아야 한다. 선 한 번 보고 바로 결혼 강요라니 이게 말이 돼?'“회장님, 민재 아가씨 오셨습니다.”'양 비서가 억양 없는 목소리로 보고하자 곧 웃음기가 묻어나는 송 회장의 유연한 대답이 들렸다.'“들어오라고 하게.”'민재가 문을 열고 다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웃음으로 고개를 들던 할머니와 저번보다 더더욱 느끼해 뵈는 미끄덩의 시선이 동시에 한 곳을 향했다. 그리고 뒤따라 들어오는 세진의 존재에 분위기는 그야말로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급속도로 식어갔다. 순식간에 쥐 죽은 듯 고요한 다실. 송 회장은 유심히 민재와 세진을 번갈아 보았고, 미끄덩 자식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해 입만 벙긋거렸다.'저러고 있으니 느끼하다 못해 바보스럽기까지 하구만. 붕어와 한 족보니? 입만 벙긋거리게?'“조금 늦었어요, 할머니.”'“시간하나 못 지키면서 장차 무슨 큰일을 하겠다는 게야.”'인사치레도 없이 곧장 엄한 목소리로 꾸짖기부터 하는 송 회장의 말은 분명 민재에게는 생소한 것이었다. 고작 몇 분 늦었다고 저러시다니, 아무래도 심기가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지신 모양이었다.'“죄송합니다.”'“게 앉거라.”'송 회장의 못마땅하다는 음성이 떨어지고 민재는 세진과 함께 다실 윗목에 있는 방석 위에 나란히 앉았다. '그래, 그때부터였지. 비디오를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로 만든 것은. '송 회장은 언제 분위기가 가라앉았냐는 듯 다시 인자한 미소를 띠우며 강정혁과 조손지간처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윗목에서 이제나 저제나 세진을 소개시킬 찬스만을 노리고 있던 민재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비디오하고 진짜 사귀는 사이도 아니건만 괜히 이쪽으로 고개 한번 돌리지 않는 할머니가 야속하기까지 했다. '할머니가 이럴 것이라는 예상을 했어야 하는 거였다. 꼬치꼬치 칼같이 캐물을 줄만 알았지 이런 식으로 투명인간 취급할 줄은 몰랐다. 처음부터 할머니는 어떤 사람을 데려오던 상관없었던 것이다. 네가 누구를 데려오던 결혼할 사람은 강정혁 한 사람이라는 메시지. 읏, 이렇게 되면 머리 싸매가며 준비한 연극들 다 소용 없는 거 아니야?'저 얄미운 자식도 그렇지, 뭐가 그리도 할 말이 많은지 주절주절 쓸데없는 소릴 잘도 늘어놓더니만 꼭 끝에 가서는 ‘그렇죠, 민재 씨?’ 라는 둥 ‘민재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는 말로 끝내며 그녀를 대화에 끌어들이려 무던히도 애를 써댔다. 것도 꽤나 귀찮을 정도로. 물론, 곱게 웃어주며 아주 철저하게 무반응으로 응대했지만. 그렇지 않아도 미운 놈은 미운 짓만 한다더니 저 미끄덩 붕어 녀석이 딱 그 짝이다.'더더구나 마음에 들지 않는 건 강정혁의 시선이었다. 그 눈이 몇 번씩 이쪽을 향할 때마다 전신에 소름이 돋아나는 기분이었다.'그녀가 일주일이나 눈물겹게 살을 빼고, 입기 싫은 정장에 하이힐까지 참아낸 것은 오늘 이 자리를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할머니에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물론, 비디오가 설쳐대는 말에 얼렁뚱땅 넘어가, 여자로서 약간의 자존심이 걸린 복수도 포함되어 있긴 했다. 봐라, 네가 그렇게 뒤에서 악담을 했던 여자가 너보다 더 괜찮은 남자와 함께 있다(비록 사실은 아니더라도), 정말 통쾌하고 시원할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유쾌, 상쾌, 통쾌는 고사하고 찜찜하고 드러운 기분뿐이다.'고작 외모 좀 꾸몄다고 마치 딴사람을 대하는 듯한 시선, 게다가 그 시선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경매장 물건 값 매기는 것처럼 기분이 아주아주 드럽다. 그래서인지 아까부터 뽁뽁 솟아오른 닭살들이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고 있었다.'역시, 비디오 말을 듣는 게 아니었어. 복수니 뭐니 괜히 혹해가지고 일주일 동안 그 개고생 한 걸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서러움까지 복받쳐 오른다. '역시 사람은 생긴 대로, 놀던 대로 살아야 별 탈이 없는 거다. 고로 저 미끄덩 붕어에 대한 응징은 내 식 대로 처리하면 그만이다 이거지. 그래, 너 잘 걸렸다. 내가 오늘 얌전히 있다 돌아가려 했건만 네놈의 그 수상쩍은 눈초리를 대하니, 후욱……(숨 한번 고르고) 못 참아 주겠다 이거야. 아주 정나미가 뚝 떨어지게 만들어주마.'어라, 그러고 보니 그쪽에서 먼저 떨어져 나가게 하는 방법도 있었군. 왜 진작 생각을 못했지? 후후후, 미끄덩 붕어 기둘려라! 오늘 산다는 게 얼마나 고난의 연속인지 이 몸께서 제대로 체험토록 해 주마.'민재의 잔인한(?) 결심이 어느새 웃음으로 승화되어 입 밖으로 흘러나왔던지 옆에서 다과 준비에 분주하던 이천 댁이 깜짝 놀란 숨을 들이켜며 미친 사람 보듯 그녀를 돌아보았다.'###'“들게, 내 손녀가 평소에는 좀 덜렁거리기는 하지만 차는 제법 끓인다네. 마실 만 할 걸세.”'송 회장이 살가운 동작으로 강정혁에게 차를 권한다. 그때였다. 평소에는 거의 볼 수 없고 볼 수 있으리라 생각지도 않았던 지극히 다소곳한 행동으로, 절도 있게 찻잔에 맑은 액체를 담아내는 민재의 모습은 차라리 기적에 가깝다는 생각이 세진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꼭 조선시대 양가집 규수라도 되는 것처럼 조신한 몸가짐에 차를 준비하는 손끝에서는 고요함마저 묻어나오는데 얼굴만 같은 딴 사람 같아 생소할 지경이다. '아주 작은 찻주전자는 고작 세 잔을 따르자 바닥이 났고 민재는 준비해온 두 번째 찻주전자에서 맑은 차를 졸졸 따라 강정혁 앞으로 밀어 주었다. '“드셔 보세요, 국내에는 없는 귀한 차에요.”'이러면서 생긋 웃어주기까지 한다. 오늘 여러 번 놀란다. 그렇게 웃으라고 시킬 때는 꼭 원숭이가 웃는 것처럼 잇몸 다 뒤집어 까면서 히죽 웃더니만, 지금은 저렇게 은은한 미소를 입에 머금다니 이젠 미친 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든다.'“이거 민재 씨가 끓여주시는 차를 마시다니 오늘 제가 운이 좋은 모양이군요. 잘 마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