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백제 무왕 3년.

복도를 총총 걸어 들어온 정 내관은 굳게 닫혀 있는 문 앞에 섰다.

“폐하, 정 내관이옵니다.”

대답이 없다. 문 앞에 서 있는 나인을 보았다. 나인이 슬쩍 고개를 끄덕인다. 안에 계신다는 뜻이다.

정 내관은 문을 열라는 눈짓을 해 보였다. 나인들이 조용히 문을 열었다. 정 내관이 안으로 들어가자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응?

자리에 안 계신다. 어디 계신 거지?

정 내관의 눈이 대전 안을 살폈다. 그러다가.

“헉!”

놀란 눈이 토끼 눈처럼 커졌다. 눈앞에 펼쳐진 남사스러운 광경에 잠시 멍해 있던 정 내관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황제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폐하. 지금 뭘 하시는 겁니까?”

웃통을 벗어 던지고 겨우 바지 하나 걸친 채 엎드려 있는 황제를 가까이서 보니 다시 기가 막힌다.

“누가 보면 어쩌시려고…….”

말은 그리하면서도 정 내관의 눈길은 저도 모르게 황제의 몸을 훑었다. 원래부터 기골이 장대한 분인 건 알고 있었지만 벗은 몸을 보니 새삼 감탄이 우러러 나왔다. 저잣거리에 나가 보면 철 만드는 사내들이나 백정들의 몸이 저렇다. 워낙 힘쓰는 일을 많이 해 울룩불룩, 살들이 단단하게 구릉을 이루고 바깥에서 종일 생활하는 덕에 살이 어두운 사내들. 그런데 그건 저잣거리에서 힘만 쓰는 무지렁이들 얘기고 여긴 황궁이다. 게다가 눈앞에 있는 사내는…… 아니, 사내님은 백제의 황제 폐하가 아니신가.

정 내관은 황급히 바닥에 떨어져 있는 황포를 들어 올렸다.

“폐하, 곧 대신들이 올 것입니다. 어서 의관을 입으시지요.”

그때였다.

“여든둘.”

황제의 몸이 위아래로 움직인다.

“여든셋, 여든넷…….”

몸이 아래로 갔다가 위로 올라올 때마다 수가 세어졌다. 정 내관은 닫힌 문을 보았다가 다시 황제를 보았다.

“폐하.”

“입 다물라.”

지엄한 명. 정 내관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흔둘…… 아흔여덟, 아흔아홉, 백!”

털썩, 황제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단단한 살이 바닥에 툭, 떨어지면서 철퍼덕 소리를 냈다.

“폐하, 괜찮으시옵니까?”

정 내관이 걱정스럽게 묻자 황제가 인상을 썼다.

“네 눈에는 내가 괜찮은 것 같아 보이느냐?”

저건, 안 괜찮다는 말이지?

“의관을 부르겠나이다.”

정 내관은 냉큼 돌아섰다.

“게 서라.”

정 내관이 걸음을 멈추고 다시 돌아서자 황제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눈치 빠른 정 내관은 황급히 다가가 황포를 너른 어깨에 덮어 주었다.

“치워라. 덥다.”

정 내관은 시무룩한 얼굴로 황포를 다시 자기 팔에 걸었다.

“대체 뭘 하시는 겁니까? 이리 땀이 나도록…….”

사서 고생하는 것도 분수가 있지, 곧 정무를 봐야 할 시간인데 몸이 땀에 흠뻑 젖도록 움직이는 건 대체 무슨 연유인지 알 수가 없다. 백제의 황제가 엉뚱한 구석이 많다는 건 궁 안에 있는 사람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몸 움직이는 것에 있어서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이 다반사였다. 굵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몸을 들었다 올렸다 하지를 않나, 따르는 이들을 다 나가떨어지게 할 만큼 궁 안 정원을 마구 뛰어다니지를 않나, 그뿐인가? 활이며 검이며, 못 다루는 무기가 없는데 가끔은 둥글게 생긴 것을 만들어 발로 차면서 뛰어다니기도 했다.

그게 뭐라더라?

축…… 구? 그래, 그것이라 했다. 편을 짜서 상대의 골문에 둥근 것을 발로 차 넣는 것. 그 둥근 것이…… 공! 그래, 공이라 했지.

정무를 볼 것이 천지라 매일매일 하는 일이 태산인데 젊은 황제는 몸 움직이는 일에 있어서 절대 게을리하는 법이 없었다.

“팔 굽혀 펴기라는 것이다.”

“예?”

정 내관이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이리 팔로만 몸을 지탱해서 아래위로 움직이면 이 부분이 단단해지지.”

황제가 어깨와 팔을 쓱, 만지더니 이내 자신의 가슴팍을 팡팡, 쳤다.

“여기도.”

씨익, 은밀하게 웃는 것이 아주 만족스러운 듯 보였다.

“원래 몸이 탄탄하신데 어찌 이리 고생을 사서 하십니까?”

정 내관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몸 움직이는 것을 게을리하면 이런 몸이 유지가 되겠느냐? 하루만 게으름을 피워도 근육이 처지는 법이지.”

근…… 육? 저건 또 무슨 말인지…… 황제와 얘기하다 보면 세상에 내가 모르는 말이 참으로 많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폐하는 신라와 서역을 오가면서 세상을 다 경험하셨다 합니다.’

‘폐하께서는 이 세상을 안 가 본 곳이 없다 합니다.’

‘안 해 본 일도 없다 하십니다.’

궁 안 나인들이나 내관들이 떠드는 말이 그냥 헛소리가 아니다. 태어나기를 여염집에서 태어났고 자라는 것도 저자의 아이들처럼 자랐다. 그뿐인가? 지금은 안 계신 적통 왕자에게 늘 목숨을 위협당해 신라까지 쫓겨나서 장사치로 사셨던 분이 아니신가. 세상 풍파, 모진 바람을 다 겪어 본 분이시다. 그러니 내가 알 수 없는 말들도 많은 것이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