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선이는 시내에 임부복을 사러 가기 위해 홀로 버스에 올랐다. 철 지난 원피스와 레깅스로 버틸 수 있는 시기가 이미 지나고 있었기 때문에 기력은 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부터 미리 준비를 해두지 않으면 얼마 후엔 입고 밖에 나설 만한 옷이 아예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임신한 몸으로, 그것도 혼자서 시내버스를 탔다는 걸 부모님이 아신다면 펄쩍 뛰고도 남을 일이었지만 그날 선이는 갑자기 학생 때도 타본 적이 없던 버스가 타고 싶었다. 느릿한 버스에 앉아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시내 풍경도 보고 싶었다. 이상한 충동질이 마음을 산란하게 만드는 날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무작정 시내 행 버스에 올랐다.'차비가 얼마인지 알 턱이 없던 그녀가 지갑을 열고 부산하게 잔돈을 찾자 기사는 짜증스러운 눈빛을 선글라스 너머로 내비쳤고, 급기야 나지막한 욕지거리를 지껄이기도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애쓰던 그녀는 지갑에 만 원 짜리와 신용카드, 수표밖에 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말았다. '“저… 기사님, 만 원짜리인데…….”'그녀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얼버무리자 기사는 있는 대로 짜증을 냈다. 그 사이 그녀보다 앞서 탔던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가 자신의 교통카드를 얼른 단말기에 갖다 대었다.'[감사합니다.]'기계음이 들렸다. 단 한 번도 타인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받았던 적이 없던 그녀였다.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가, 감사합니다.”'선이는 대신 차비를 내준 남자에게 고개를 숙이며 기계음을 그대로 따라했다. 남자는 기타를 둘러맨 채 싱긋 웃어 보이고는 맨 뒷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그 남자의 미소가 선이의 마음속에 담겨 있던 한 남자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부지불식간에 상기된 기억 때문에 선이는 울컥 눈물이 치솟을 뻔했다.'자리에 앉아 창밖을 보니 화려하게 물든 나뭇잎이 그녀를 향해 부산하게 손을 흔들어댔다. 마음 상태와는 상반되게 그 붉은 기색을 향해 같이 손을 흔들며 화답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 창문에 손가락을 살짝 가져다 댔다.'‘오늘은 기분이 왜 이러지?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아.’'그녀가 기대했던 대로 버스를 타는 일은 묘한 설렘과 즐거움을 선사했다. 왼손으로 해를 살짝 가리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새파란 하늘빛이 마음에 딱 들었다. '‘언젠가 그 사람이 물었지.’'-너는 어떤 색을 가장 좋아해?'그때, 하늘을 보던 선이는 ‘하늘색이요.’하고 말했었다. 그러자 그가 다시 물었다. '-하늘색?'-네. 색상환에 나와 있는 하늘색 말고 변화무쌍한 저 하늘, 하늘색 말이에요.'그녀의 대답에 고개가 꺾어져라 같이 하늘을 쳐다보던 그. '그때 그날처럼 고개를 바짝 들고 하늘을 보던 선이는 뒷목이 아파질 쯤이 되자 눈길을 조금 아래로 잡아 당겼다. 빼곡하게 들어선 건물에 눈이 돌아갈 정도로 형형색색 달려 있는 간판이 어지럽게 쉭쉭 지나쳤다. 사람들처럼, 그들이 사는 모양새처럼 들쑥날쑥한 간판들. 저렇게 복잡하거나 어지럽지 않고, 좀 더 단순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집을 나서기 전, 혹시나 싶은 마음에 직장에 있을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직장이 시내에서 가까운 곳에 있을 뿐 아니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월말이 아니니 어쩌면 시간을 내어 같이 쇼핑을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뭐 그런 걸 사는데 남자가 따라가? 당신 혼자 가. 알잖아, 난 바빠. 그리고 근처에 있는 백화점으로 갈 일이지, 뭐하러 사람들 복작대는 시내로 굳이 간다는 거야? 다른 날은 기력이 없어서 자리에 앉아 있지도 못하면서 오늘은 또 왜 그래? 정말 당신이란 사람은 알다가도 모르겠군.'역시나 빤하게 날아드는 그의 대답에 알겠다고 무심한 듯 대답했지만, 전화를 끊고서 선이는 그 자리에 엎드려 한참을 울었다. 이젠 충분히 무디어질 대로 무디어졌다고, 그 사람의 건조한 반응에 이젠 단련될 만큼 단련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전혀 무디어지지도 감정 처리에 노련해지지도 않았다. 늘 똑같은 만큼의 아픔만 느껴질 뿐이었다.'‘벌을 받는 거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죄로 지금 이렇게 벌을 받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넌 당해도 싸. 무조건 견뎌.’'그녀는 이렇게 스스로를 정죄함으로써 남편이 만들어주는 커다란 빈자리를 채워나갔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 상황을 버텨야 한다. 그는 그저 그렇게 무심한 사람이니 그녀만 잘 견뎌내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꾸역꾸역 견뎌내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도 남편을 사랑하게 될지 모르고 그 역시 그런 자신을 돌아봐 줄지도 모른다. 그런 삶은 천천히 자신의 목을 죄는 형벌일지 몰라도 잘만 참아내면 그 형벌이 언젠가는 거두어질지도 몰랐다. 적어도 그날, 그를 그 거리에서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선이는 시내의 임부복 가게를 있는 대로 돌아보았으나 도대체가 마음에 드는 옷이 없었다. 하나같이 알록달록한 색상에 어린아이의 것처럼 프릴이 잔뜩 달려 있는 옷 천지였기 때문이다. 뱃속의 아기에게는 너무나 미안했지만 그런 옷을 걸칠 기분이 아니었다. 슬프게도… 행복하지 않은 결혼이 있듯이 임신 또한 늘 축복인 것만은 아니었다.'그녀는 두어 시간 동안 여러 옷가게를 돌다가 결국 처음에 구경했던 가게로 다시 돌아가 눈에 띄지 않는 검은색 임부 바지 두 장과 어두운 체크 남방 두 장을 샀다. 집에 가서 급히 할 일도 없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시간을 허비했던 터라 다시 바쁘게 버스 정류장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한낮이라서 시내는 매우 한산했다. 선이는 바쁜 걸음을 걷는 와중에도 길가에 늘어놓은 귀걸이나 모자에 눈길을 주었다. 아주 모처럼의 시내 나들이였기 때문이리라. '산뜻한 분홍색에 마음이 동하여 모자 하나를 사고 다시 다리를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다가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에서 풍겨대는 진한 커피 향에 유혹되어 또다시 발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향긋한 커피 냄새를 맡자 금세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한 잔 정도면 괜찮아. 어떤 사람은 하루에 서너 잔도 마셨대.’'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향기 좋은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다리를 쉬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늦었고, 또 바쁘게 가봐야 할 일도 없으며,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는 건 더더욱 아니다. 너무 늦을 것 같으면 가는 길엔 버스 대신에 택시를 타고 가도 되고.'하얀 크림이 얹힌 비엔나커피가 앞에 놓였다. 그녀는 잠깐 행복한 듯 바라보다가 예전에 하던 대로 수저를 들어 크림을 떠서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달콤하고 고소한 맛이 혀를 즐겁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