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봄의 절정을 달리고 있는 단오절 즈음의 어느 날이었다. 창포꽃 향기가 살랑이는 훈풍에 섞여 돌고 겨울 내내 차가운 잿빛이었던 수목에는 뽀얗게 새 가지가 돋아 이제는 초록이 한창 무성해지고 있었다. 벚꽃은 애초에 눈발처럼 흩어지고 이제 서서히 고개를 드는 아까시나무 꽃 봉우리가 가지 끝에 올망졸망 보였다. '궁 안에서 평생을 보낸 늙은 내관들의 얼굴에도 모처럼 활기가 넘치고, 언제나 땅만 보며 종종걸음 치던 젊은 궁녀와 내관들은 화락하고 따사로운 봄볕 아래 눈이 마주치면 전과 달리 더러는 다정하게 웃으면서 목 인사를 하고는 했다. 막 중궁전의 나인 둘과 눈인사를 주고받으며 해죽 웃던 젊은 대전 내관 둘은 각기 크기가 다른 활 두 개와 화살통을 품에 안고 부지런히 금원禁垣으로 향하였다. '금원에는 이미 연회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는지, 잔디가 넓게 깔린 마당 저만큼 끝에 과녁이 두 개 세워져 있고, 그 주위로 많은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도란도란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정갈하게 관복을 정제하고 있는 백관들 사이사이에 모처럼 궁 나들이를 나선 종친들과 당의를 차려입은 정경부인들이 어울려 서 있고, 모여선 자리의 가장 상석에는 어좌가 나란히 있어 임금인 세연과 중궁인 가림이 배석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봄바람에 어좌 곁에 세워져 있던 노랑 빨강 비단일산이 흥겹게 살랑였다. '활과 화살통을 품에 안고 들어선 내관들이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읍하고는 가지고 온 활과 화살을 과녁에서 스무 걸음 떨어진 곳에 얌전히 놓아두고 물러났다. 세연이 부드럽게 손을 들자 소곤소곤 다정하게 울리던 좌중의 말소리가 천천히 잦아들고, 인물들 사이에서 자그마한 두 그림자가 화살통 곁으로 나아갔다. '“이렇게 좋은 날에 많은 사람이 모여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과인이 모처럼 흥이 나는구려. 거기에 우리 세자와 대군이 그동안 배운 재주를 선보인다 하니 몹시 기쁘고 또한 즐겁소이다. 세자의 보령이 이제 갓 열 넷이 되었을 뿐인데 벌써 활을 잡을 수 있다니, 내가 참으로 흡족하오.”'임금인 세연이 부드럽게 운을 떼자 모여선 사람들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덕담을 건네기도 하면서 분위기를 돋우었다. 화살통 곁으로 선 세자, 검우는 귓전으로 울리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되새기며 ‘후-욱’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남다른 무골에 뛰어난 호남이었던 아버지의 풍채를 그대로 물려받아 또래보다 머리통 반은 더 큰 몸집이 벌써부터 다부진 티가 났다. '“혀엉님.”'그에 반해 이제 갓 아홉 살이 된 동생 가후는 활과 화살이 새로 얻은 장난감인줄 아는지 마냥 천진스러울 따름이었다. 활을 만지작거리며 커다란 눈을 뒤룩거리는 동생을 향해 빙긋이 웃어주고 검우는 화살통에서 살 한 대를 꺼내 크게 숨을 들이키며 시위에 걸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사고를 막기 위해 화살은 촉을 빼고 검댕 묻힌 무명천에 솜을 채워 감아둔 것이었다.'형이 하는 품새가 어린 눈에도 멋있어 보였는지 가후 역시 고사리 같은 손에 활을 겨누며 시위를 잡아당겼다. 검우는 잔뜩 시위를 당긴 손가락에 피가 몰리는 것을 느끼며 잠시 숨을 참았다. 찰나, 핑 하는 파공음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떨어진 과녁의 정 한가운데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검댕 자국이 선명하게 묻어났다. 검우가 시위를 놓은 것이다.'“오!”'주변에서 일제히 환호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세연은 검우의 실력에 몹시 마음이 들떴는지 거의 일어설 듯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검우는 옆 눈으로 보이는 아버지의 반응에 가슴 한편이 뿌듯해지는 것을 느끼며 애써 태연한 척 다음 화살을 골랐다. '‘실수하면 안 된다.’'한 사람을 빼놓고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검우는 이날 아버지 앞에서 활솜씨를 뽐내기 위해 근 한 달 동안 무던히도 연습을 했다. 오늘은 세자책봉을 받은 후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궁술을 선보이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검우가 한 달 동안 연습에 매진한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에게 직접 무예를 가르치고 있는 병판 윤정희 뿐이었다. 윤정희는 지난날 세연을 보필한 공을 인정받아 공신의 자리에 올랐으면서도 현역에서 물러나지 않은 강단 있는 무인이었다. 아버지가 형제처럼 믿고 있는 무장에게 직접 무예를 사사 받은 것이다. 그래서 검우는 속으로 더욱 더 실수하면 안 된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되뇌었다.'“봤소? 응? 홍 승지, 자네도 방금 세자의 실력을 보았나?”'한껏 들뜬 세연이 연신 하문하자 윤정희 옆에 서 있던 홍문휘는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홍문휘 역시 윤정희와 마찬가지로 세연이 새 치세를 열 때 공을 세워 우의정을 제수 받았으나 겸허하게 사양하고, 아직도 도승지로서 왕의 측근을 보좌하고 있는 청렴한 사람이었다. '“전하, 체통을 지키셔야지요.”'밉지 않은 가림의 구박에 세연은 겨우 수선을 가라앉히며 검우에게 시선을 옮겼다. 검우의 숨이 또 한 번 짧게 멈추었다. 핑 하는 소리에 이어지는 퍽 하는 소리. 먼저 찍혔던 검댕 자국을 정확하게 다시 때리며 일렁이는 까만 먼지에 좌중은 또 한 번 환호했다. '옆에서 두 번이나 환호를 받는 형의 모습이 자극이 되었는지 가후도 나름대로 열심히 활을 당겨보고 밀어보고 하면서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이제 아홉 살 밖에 되지 않은 가후에게 활쏘기는 아직 무리였다. '퓽퓽 하는 어설픈 소리와 함께 채 날아가지도 못하고 바로 발치로 떨어뜨리는 가후의 모습에 세연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 반해 검우가 날리는 화살은 도저히 소년의 솜씨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경쾌했으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검우의 어깨에 점점 자부심이 실리며 입가에 여유가 떠올랐다.'“이잉.”'그러나 다음 순간, 막 시위를 놓으려는데 뜻대로 되지 않아 갑갑했는지 이리저리 뒤척이던 가후가 검우의 정강이를 건드리고 말았다. 아차 하는 순간 손에 힘이 빠지며 그대로 날아간 화살이 애먼 곳에 있던 내관을 향하자 사람들 사이에서 위태로운 탄성이 피어올랐다. 다행히 화살은 내관의 근처에도 못 미치고 떨어지고 말았지만 검우는 심장이 떨어질 만큼이나 놀랐다. 촉을 빼두기는 했으나 자신이 쏜 화살이 사람에게 맞는다니 생각만으로도 아찔했기 때문이다.'‘이런!’'좌중의 환호가 놀란 탄식으로 변하며 수그러들자 검우의 이마에 식은땀이 돋았다. 힐끔 세연을 돌아보는데 방금 전까지 웃음이 만면에 피어있던 아버지의 얼굴이 지금은 딱딱하게 굳은 것 같아 가슴이 철렁했다. 여태껏 잘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실망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새삼 가후에게까지 화가 났다.'‘지금부터 잘 하면 돼.’'검우는 다시 침착하게 심호흡을 하고 어깨를 몇 번 털었다. 순간 시야에 자신을 자상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영빈공이 눈에 들어왔다. 영빈공은 임금인 세연의 사촌 동생으로, 따지자면 검우의 작은아버지가 되는 왕실 어른이었다. 아버지에 이어 자신이 몹시 따르는 영빈 숙부의 모습까지 눈에 들어오자 검우의 뇌리로 스승들에게 배웠던 아버지 때의 이야기가 생각났다.'십 수 년 전, 그때는 참으로 서글픈 세월이었다고 했다. 세연의 아버지이자 검우의 친할아버지는 권신에게 눌려 유배나 다름없이 변방의 성으로 쫓겨나 유명을 달리했고, 증조부인 월명대군은 수상한 낙마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 외에도 왕실의 피를 이은 많은 군들과 대군들이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던 때였다.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하던 암담한 세월. 그래서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되었을 때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오히려 아둔하고 노둔한 척 하면서 힘을 기르며 참고 기다렸다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떨치고 일어나도 좋을 만큼 스스로가 충분히 강해졌을 때, 지금도 당신 옆에 시립해 있는 윤정희와 홍문휘를 만나 사직에 암운을 드리우던 권신을 몰아내고 맑은 하늘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고 했다. '검우의 눈이 다시금 세연을 향했다. 글 선생들이 말해주던 이야기 속의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라 마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영웅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더욱 그 앞에서 못난 모습을 보이고 싶지가 않았는데 이런 어처구니없이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검우의 입술이 짓씹어졌다. '검우는 두 번의 화살을 빠르게 연이어 쏘았다. 이어 날아간 화살이 연이어 과녁의 중앙을 두드리자 놀랐던 좌중의 분위기가 다시 화기애애하게 가라앉았다. 세연의 얼굴에도 다시금 미소가 피어났다. 잠깐 흔들리기는 했지만, 곧 내색 없이 당당하게 시위를 당기는 아들의 모습이 흐뭇하여 세연은 짐짓 가림을 향해 귓속말을 했다.'“과인은 처음 열 걸음 앞에 과녁을 놓고 연습을 했는데 세자는 벌써 스무 걸음 앞에 과녁을 놓고 있구려.”'자식 자랑에 여념이 없는 세연을 향해 가림은 예쁘게 웃었다.'“팔불출이 따로 없으시옵니다.”'“하하하. 좋소. 좋아. 내 마음이 이리 흡족하거늘, 그런 말이 무어 겁이 나겠소.”'곁눈질로 어머니와 아버지가 귓속말을 나누는 것을 본 검우의 눈초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무슨 말을 하고 계신 것일까. 혹시 아까의 실수 때문에 자신이 미흡하다고 남모르게 질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예감이 덜컥 들었다. 시위를 당긴 팔꿈치가 비틀, 흔들리며 손을 놓았다. 아슬아슬하게 날아간 화살이 과녁 중앙 어림을 두드리자 세연은 다시금 호탕하게 웃었다. '검우는 조금 전의 실수 때 아버지의 얼굴이 굳었다고 느꼈지만, 사실 그것이 아니라 세연은 그저 단순히 놀랐을 뿐이었다. 그 자신이 벌써 뛰어난 무골이었던 세연은 검우가 날린 화살의 궤적을 이미 꿰뚫어보았던 것이다. 단지 잘 하고 있던 아들이 동생 때문에 실수를 하자 혹여 위축되지는 않을까 싶어 잠시 웃음이 사라졌던 것이다. '검우가 마지막 화살을 신중하게 집어 들었을 때였다. 옆에서 훌륭하게 과녁을 명중시키는 형의 모습이 무척이나 멋있게 보였는지 어린 가후가 별안간 검우처럼 자세를 바로잡으며 흥 하고 숨을 내쉬었다. 고사리 손에 쥠통을 꼭 쥐고, 마찬가지로 화살을 집어 들어 똑같이 흉내를 내어 겨누는 폼이 귀여웠다. 세연과 가림의 미소가 짙어지는 찰나, 두 형제는 똑같이 손을 놓았다.'핑 하는 매서운 소리에 ‘퓨-웅’하는 설익은 소리가 섞이고, 날아간 화살은 둘 다 과녁에 명중했다. 다른 것은 검우의 화살은 과녁의 정 중앙에, 가후의 화살은 과녁의 붉은 원 안에 들지 못하고 판의 귀퉁이를 가까스로 스친 것이었다.'“하하하!”'흐뭇한 세연의 웃음소리가 금원을 쩌렁쩌렁 울렸다. 검우는 한번 실수를 빼고 모두 과녁의 중앙을 때려 맞힌 결과가 새삼 뿌듯하여 한쪽 입 꼬리를 실룩거렸다. 내색하지 않고 의연하게 아버지를 돌아보는데, 호탕한 웃음소리에 활을 내버리고 쪼르르 달려가 품에 안기는 가후의 뒷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어 그대로 일어서며 달려오는 가후를 번쩍 안아드는 아버지의 모습까지. '“명궁이 여기 또 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