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마저 붉게 물들어 버릴 것 같은 혈향(血香)이 조금씩 퍼져나가 대지를 뒤덮고 있었다. 짙은 향내에 병사들의 몸이 덜덜 떨려왔다. 유가 다시금 검을 내렸을 때는 사방이 검붉은 피로 강을 이루고 있었다. '“조금 튀었나… 뭐, 그렇다면….”'척박한 대지에 붉은 비를 내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유의 눈이 짙은 살기로 희번득 거렸다. 입가에 미소는 사신(死神)의 그것이었다.'“더 이상 이해시키지 않을 작정이다, 신비. 내 옆에 있어, 두 번 말 안 해.”'현왕조, 피의 황제. 흑무제 현유'의친왕은 신비를 죽이지 않았다. 결코 자신을 죽일 목적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고통을 즐길 뿐이란 것을, 하여 자신이 그 어떤 짓을 하여도 의친왕에게는 그저 자극일 뿐이란 것을. 신비는 알게 되었다. 허탈했다. 분명 의친왕이 직접 신비를 풀어주라 했을 때부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신비는 이를 갈았다. 의친왕은 정말로 자신이 본 사람 중에서 가장 악마 같은 인물이었다. '“계집은 결단코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된다. 얼굴이 떡이 되고, 몸이 걸레가 되고, 손발이 뭉개져도 상관없다. 살려서, 내 눈앞에 대려 와라.”'현왕조 황제의 하나뿐인 혈연, 의친왕 현의강'그녀에게도 세상의 슬픔, 어둠이 없을 리 만무하건만 어쩐지 신비에게는 어둠이 느껴지지 않았다. 스스로의 빛으로 딛고 이겨낸 것이리라. 마치 어둠을 가르고 솟아오르는 태양 같은 존재. 초희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유가 신비를 곁에 두고자 하는 이유를. '“천민의 목숨이 언제부터 자신의 것이었습니까. 한번도 제 의지로 죽고 산적 없습니다. 미천한 신분으로 산다는 건 원래 그런 거예요!”'그 누구도 갖지 못한 특별한 매력의 소유자, 현궁의 새벽을 밝힌다. 신비''* * *''“네 놈이 지금 뭐라 하였느냐.”'신비의 도망을 고하던 시종이 의친왕의 벼락같은 호통에 급히 머리를 땅에 박고 읊조렸다.'“계집이 마을에서 달아났다 합니다.”'“닥쳐라!”'신비가 도망을 쳤단 사실을 그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계집이 어떤 계집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이가 누구인가. 바로 자신이 아니던가.'‘계집이 도망을 하였다?’'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분명 도망갈 기회는 수 천 번도 넘었으나 이제껏 하남성에 눌러 붙은 듯 떨어지지 않던 계집이 아닌가. '“어째서냐! 어째서 계집의 마음이 바뀌었단 말이냐!”'“저, 전하 실은……."'객잔에서의 일은 이미 알게 모르게 온 마을에 퍼져 모두들 모이기만 하면 낮의 일로 왈가왈부 하고 있었다. 허니 모두들 그의 앞에서 입을 다문다고는 하나 언제 의친왕의 귀에 들어갈지 모르는 일. 무턱대고 숨겨봤자 소용없었다. 시종은 약간의 과장을 섞어가며 낮의 일을 간추려 이야기 하였다.'“그래. 내가 제 목숨만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던 계집이었으니.”'신비가 도망치려 한 결정적인 이유를 찾았다 여긴 의친왕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싸늘하게 내뱉었다. '“그 자의 목을 쳐라.”'“그, 그것이 이미…….”'사실을 고하는 시종의 말끝을 늘어뜨렸다. 의친왕은 강단 있게 말하지 못하는 시종의 모습을 짜증스럽게 바라보았다. 시종은 의친왕의 기분을 눈치 채고 빠르게 대답하였다.'“죽은 채로 돌아왔습니다.”'그것이 시종이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유였다. 병사의 시체는 그 어떤 상흔이나 혈흔도 보이지 않았다. 의친왕부 내의 의관들은 정확한 사인을 찾아 낼 수는 없으나 침이나 아주 작은 뭔가에 의해 단숨에 급소를 당해 즉사 한 듯하다고 소견을 밝혔다. 하지만 그 역시도 정확한 사인이 아니라 대체 무엇 때문에 죽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급소라 하나 얇은 침 하나로 사람을 죽일 수 있으려면 상당한 실력을 지녀야 했는데 이 하남성 내에 그런 자는 있을 리 만무했으며 외부에서 온 자라 하더라도 그 병사를 죽이려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 신비가 실력으로 그자를 죽였다는 것 역시 말이 되지 않았다. '“내 병사가 죽었다? 내 손이 아닌 다른 자의 손에.”'시종의 말에 의친왕 역시 같은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정도 실력을 지닌 자가 과연 노리는 것이 비단 한 명의 병사였단 말인가? 몇 가지 가능성이 의친왕의 머릿속을 떠다녔다. 하지만 모든 것은 결국 죽은 자가 되살아나지 않는 이상 죽인 자만이 답을 알고 있을 터였다. '“첩자의 흔적을 뒤져야 할 것이다.”'자신의 손에 죽을 운명의 병사였다고는 하나 자신의 소유물이 타인의 손에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예, 전하.”'“또한 왕부의 사병들에게 똑똑히 알려둬라. 계집은 결단코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된다. 얼굴이 떡이 되고 몸이 걸레가 되고 손발이 뭉개져도 상관없다. 살려서, 내 눈앞에 데려와라.”'‘그래 계집아. 네가 드디어, 드디어 도망을 갔다 이거냐?’'의친왕은 흥분과 희열로 뜨겁게 몸이 달궈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상상만으로 자신의 기분을 돋우는 계집이었다.'‘놀아주마. 어디까지라도 놀아주마!’'이렇게까지 자신의 흥미를 끌게 하는 것을 놓칠 수는 없었다.''신비는 점점 더 걸음을 빨리 하였다. 불빛이 거의 남지 않은 어두운 산중이지만 오히려 몸을 숨기는 데는 최적이었다. 병사들이 곳곳에서 횃불을 밝혀 그녀를 찾고 있었으며 닥치는 대로 날아드는 화살과 표적들을 겨우겨우 피했지만 그 와중에 당한 상처들에서 피가 멈추지 않았다. 그나마 이 산중이 집 앞 같은 훤한 길이란 것이 다행이었다. 하지만 신비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이곳 지리를 잘 안다하더라도 잡히는 것은 시간 문제였을 뿐이었다. 객잔에서 맞은 곳과 추격 중에 당한 상처로 신비는 이미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속에서 뭔가 울컥하며 넘어왔다. 목울대를 지나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객잔에서 복부를 걷어차인 것이 화근이었다. 의친왕의 수하들은 아주 독특한 무기구와 장신구를 갖추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복장 곳곳에 징이 박혀있다는 것이 대표적이었다. 그러니 장화에 역시 박혀 있을 수밖에 없었고 단 한번 걷어차였을 뿐인데 내상이 생긴 듯 했다. 거기다 쉬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도망쳐 다니느라 그 내상이 더욱 악화되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젠 거의 한계에 달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가슴 한 켠이 울렁거리며 목울대를 건드렸지만 신비는 가까스로 집어 삼켰다. 목이 메고 코끝이 찡하게 아려왔다. 신비는 그럴수록 더더욱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여기서 눈물을 보일 순 없었다. 최소한 이곳만은 벗어나서……. '“젠장, 코가 맵다.”'신비는 스스로 한 말에 킥킥거리며 웃었다.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생각해보니 너무 우스웠다. 이렇게까지 몰리고 결국 도망가게 될 걸 왜 여태껏 남아있었는지 자신이 미련퉁이, 바보, 천치로 느껴졌다. 살려주신 스승님께 감사하다가도 차라리 그때 스승님 대신 죽었어야 하는 건 내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신비는 문득문득 가슴이 저려왔다. 그럴수록 병사들은 점점 더 신비를 향해 다가왔다. 신비는 이를 악물었다. 설사 그렇다 해도 여기서는 아니었다. 도저히 설 힘이 없어 신비는 기어서라도 몸을 숨기려 나무 둥치를 향했다. '“저기다! 잡아라!”'그 순간이었다. 나무 둥치를 향해 엉금엉금 기어 몸을 숨기려 하던 신비의 귀에 반대편에서 한 병사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러자 그 즉시 신비를 향해 다가오던 병사들이 반대편으로 추적방향을 수정하여 달려갔던 것이다. '“휘유우.”'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정말로 천만다행이 아닐 수가 없었다. 신비는 깊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잠시 몸을 낮췄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하남성을 벗어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렇게 느낀 신비가 다시금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유는 홀연히 나타나 신비 앞에 섰다. '신비는 너무 놀라 ‘악!’ 소리를 지를 뻔한 자신의 입을 급히 틀어막고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눈을 크게 뜨고 앞에 서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오전에 들른 객잔에서 자신이 구해준, 아니지 자신을 도와준 건가. 하여간 특이한 인연이라 생각했던 그 사람이었다.'“그만 갈까?”'유는 그렇게 말하며 신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신비는 대체 이자가 무슨 말은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네? 누구…… 세요?”'“손을 잡아.”'“무슨 말이에요?”'유는 그런 신비의 말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아랑곳하지 않고 신비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은 채 자신이 왔던 길을 향해 다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딜 가는 거예요?”'신비가 악을 쓰듯 외치며 끌려가지 않으려 버둥거렸지만 유는 길을 가는데 신비의 몸부림이 거의 지장을 받지 않은 듯 계속 걸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원하는 곳, 함께 가줄게.”'“네? 그럼 도성인데, 정말요? 근데 왜요?”'나무나 당연한 듯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는 유의 말에 한 점 의심도 갖지 못한 채 중얼거리던 신비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설마 절 의친왕한테 넘기려는 거예요?”'신비가 급박하게 외치자 유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신비 쪽으로 몸을 틀더니 그의 까만 눈동자를 신비에게 맞추었다. 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허나 약간은 웃음기가 섞인 말투로 물었다.'“지금 이 상황에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거야, 아님 또다시 물어주길 바라는 거야?”'“네?”'“나는 그다지 참을성이 없거든.”'신비는 순간 한기가 몸을 훑고 지나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입가에 살며시 미소를 띠며 나긋하게 말했지만 어쩐지 두려워졌다. 아마 그의 검고 깊은 눈동자 탓이리라. 검은 눈동자에 달그림자가 비쳐 문득 시린 은회색으로 번득인 듯했다.'<본문 제1장 중에서>